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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신비사상과 불교
I. 서론
1. 대화의 접점
일본의 선불교 학자 스즈키(D. T. Suzuki)나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가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과 불교와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나, 옥스퍼드 대학교의 동양 종교와 윤리학 교수였던 제너(R.C.Zaehner)가 힌두교와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을 비교하고,베를린 대학교 교수 헴펠(H.P.Hempel)이 『하이데거와 禪』을 써서 현대 서양철학의 존재개념과 선불교의 무(無) 사상을 의욕적으로 비교했던 것과는 달리, 이슬람 신비주의와 불교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일신 신앙과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불교의 신념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슬람 전공자와 불교 전공자는 각각 다른 분야에서 연구를 했기에 대화적 관점에서 양자의 종교가 서로 상통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해 보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최근에 불교와 이슬람의 상호작용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특히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문명사적 교류의 측면에서 연구한 저술이 나왔다. 하지만 이 책도 신비주의 사상적 관점에서 다룬 책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동서양의 정신적 교류와 지구촌 시대의 활발한 인문과 종교를 아우르는 대화적 관점에서 양자의 비교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종교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이슬람 원리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가 끊임없는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오니즘과 같은 유대교 강경론자들의 반 이슬람주의 경향은 계속해서 전쟁과 분쟁의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평화를 도모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차제에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특히 평화와 사랑을 강조하는 이슬람 신비주의와 불교의 정신을 대비하면서 비교 연구해 보는 일은 지구촌의 평화와 공존에 기여 한다는 점에서 아주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욕과는 달리 양자를 비교 연구한 선행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필자는 나름대로 비교의 틀을 구성하여, 핵심 사상을 선별적으로 구성하여 비교해 보았다. 예컨대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가로는 나사피를 들었고, 불교 신비사상으로는 선불교를 중심으로 하였다.
2. 이슬람 신비사상의 연구사
이슬람 신비 사상의 기원은 850년경에 바그다드에서 비롯되고, 12-15세기 사이에는 모로코에서 벵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수피 성자들과 형제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대학 에서 강의했던 알 가잘리(al-Ghazali, 1111년 사망)에 의해 수피즘이 학문적 차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수피즘이 서구 유럽세계에 확대된 것은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1800년대 이후였다. 서구의 식민지 개척시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서 유럽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특히 수피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1950년대에 이르러 제너가 이슬람 신비주의를 힌두교 사상과 비교하면서 이슬람 신비주의는 비교 종교적 차원에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그 이후 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계속되었으나, 이슬람 신비사상과 수피즘에 대한 영미권의 연구는 앤마리 쉼멜이 1975년에 출판한 「이슬람의 신비적 차원」(Mystical Dimensions of Islam)이라는 책을 통해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쉼멜은 이 책에서 수피즘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수피즘의 고전적 배경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9세기 후반의 신비주의 대가들을 소개하는데, 그 가운데 신비적 사랑의 순교자인 알 할라즈(Al-Hallāj)를 소개하고 있고, 시블리(Shiblī)에서 가잘리(Ghazzālī)까지 신비주의의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주의의 길과 인간의 완전성을 논하면서 선과 악의 문제, 성인(聖人)과 기적, 예언자에 대한 존경, 수피의 교단과 조직, 이븐 아라비(Ibn ‘Arabī)와 같은 신지학(神智學)적 수피즘의 대 학자들을 소개하고, 루미의 시와 같은 페르시아와 터키의 신비적 시들,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의 수피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최근 들어 2012년에 와서 수피즘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조명한 연구서가 나왔다. 각 분야별로 여러 학자들이 논의 한 책으로 1200년에서 1800년까지 무슬림 세계에서 수피즘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역학관계를 연구한 것이다. 이 밖에도 2010년에 존 커리가(John J. Curry)가 1350년에서 1650년 사이 오스만 제국 시대의 무슬림 신비 사상의 변형에 관한 저술을 내 놓았다.
수피의 역사에서 유럽 문헌에 처음 소개된 사람은 8세기의 여성 성자로 알려진 라비아 알-아다위야(Rābi‘a al-‘Adawiyya)다. 그녀는 13세기 후반에 루이스 9세의 대법관 조인빌(Joinville)에 의해 소개 되었고, 17세기 프랑스에서 신적 사랑의 모델로서 순수한 사랑을 논하는 문헌에 언급된 것이다. 그 후 16-17세기에 근동이나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여행자들이 수피 춤을 추는 더비쉬(Dervish)의 의례를 보고하기 시작했고, 1638년에는 이집트의 유명한 신비가인 이븐 알 파리드(Ibn al-Fārid, 1235년 사망)의 시 한편이 번역 소개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동방 신비주의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페르시아의 고전적인 시에서 얻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저명한 시인 사디(Sa‘dī)의 굴리스탄(Gulistān)이라는 시였다. 그 이후 페르시아의 시 연구가 강화 되면서 수피의 시가 영어권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번역상의 한계로 인해 수피즘이 서구적 이미지로 변질 되는 경향도 있었다.
수피즘에 대한 서구인들의 연구가 본격화 된 시기는 여전히 19세기에 유럽과 중동에서 중요한 수피의 텍스트들이 인쇄 된 이후였다. 그나마 텍스트의 출처와 진위를 가려내는 본문 비평 작업도 어려운 일이었고, 20세기에 들어 와서야 쉼멜 같은 학자에 의해 수피즘은 더욱 잘 세련되게 연구 분석 되어졌다. 오늘날 이러한 쉼멜의 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한 학문적 업적을 그의 제자 에른스트가 계승하고 있다. 에른스트는 쉼멜 이후에 논의된 현대적인 자료와 관점을 이용하여 수피즘에 대한 개론적인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특히 오늘날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근본주의자들의 시각과 수피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아주 짧다. 최근 이슬람 신비 사상에 관한 연구 논문이나 출간된 서적도 열 몇 편에 불과하다. 강은애는 서울대 종교학과의 석사학위 논문으로 1995년에 “수피즘(Sufism, 이슬람 신비주의)의 구조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이후 정은영이 수피즘을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의 사상과 비교한 논문(장신대 석사학위논문, 2000년)이 있고, 이명권은 국내 최초로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책에서 ‘무슬림 복음서’를 소개하면서, 무함마드와 예수의 대화와 함께,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을 심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신은희의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 루미의 신비주의 연구”(신학사상, 2009년)등이 있으나 불교적 관점에서 제대로 비교한 논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김관영은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 수피즘(Sufism)의 본질을 중심으로”한 논문과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Sufism)의 실천적 측면에 관한 연구”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그는 신에 대한 ‘앎(靈知, marifa)’과 신의 품에 영원히 머무는 것(baqā)을 궁극적 수행의 목표라고 제시하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서 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mahabba)과 자아소멸(fanā)의 길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의 선불교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교선일치(敎禪一致)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것은 선불교의 사상보다는 지눌의 관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슬람 수행법인 지크르(dhikr)는 율동과 호흡법을 통하여 신의 이름을 연속적으로 외우는 방법인데, 이것이 만트라(mantra)요가의 주문(呪文)이나 불교의 염불과 유사하다고 한다. 특히 김관영은 수피즘의 영적 수행과 관련한 이론에서 힌두이즘의 요가와 선불교의 간화선(看話禪)에 비교하여 설명한다. 또한 수피즘은 내세의 영원한 삶을 강조하는 정통파 이슬람과는 달리 신을 늘 ‘지금 여기’에서 직접 체험하며 신과의 합일을 이루며 사는 것에 있다는 것과 수피즘이 범신론 사상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음도 밝힌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불교 신비주의에 관한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비교한 논문은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이 또한 편중적이다. 이용우의 “선불교의 명상과 기독교 신비주의 비교연구: Thomas Merton과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을 중심으로”(감리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1990년)의 논문과, 하지윤의 “선불교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비교논문(대구 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이 있으며, 인도철학과 관련한 불교 신비주의는 이권학의 “요가철학과 초기불교의 신비주의 성격”(동국대학교 대학원, 1995년)이 있다. 이처럼 불교 신비주의는 대체로 선불교의 사상과 관련한 연구가 많은데 그 이유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든지,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같은 원리를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도 불교 신비주의는 불교 우주론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데, 박혜숙은 이러한 불교 우주론과 신비주의 사상을 낭만주의 미학과 관련하여 논문을 쓴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박혜숙은 이 논문에서 불교의 공즉시색(空卽是色) 사상을 우주론의 기초로 삼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공즉시색’의 우주의 기운을 인도 사상의 브라만의 숨결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상은 본론에서 언급 되겠지만 이슬람 신비주의에서도 나타나는 신의 숨결과도 같다. 하지만 불교에서 여전히 공은 공이다. 따라서 색에서의 집착을 버려야 한다. 유럽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16세기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서였지만 18세기에 본격화 되었다. 산스크리트어도 불과 1780년에야 유럽에 알려졌고,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1820년대에 와서다. 그런 만큼 서양에서 불교를 제대로 이해한 역사도 짧은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와 이슬람의 대화의 역사는 더욱 짧을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서양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관심은 영국은 심령술 모임을 중심으로 주로 윤회와 업에 관심을 보인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공(Le Neant), 절대(L’Absolu), 우주의 기운(L’Ȃme universelle)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도 박혜숙은 불교의 본래적 의미를 적절히 번역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불교의 공사상은 허무주의로까지 인식되어진 결과를 초래 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헤겔 또한 불교를 니힐리즘의 종교로 이해하게 되는 행로를 열었다고 최근 서구의 드로와 같은 불교학자들의 지적을 인용한다. 그러나 헤겔은 무(無)를 “보편적이며 순수하고 추상적이며 무정형이므로 절대와 같다”고 하여, 불교의 무(無)는 서양에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을 상징하는 신과 동일시되게 되었다. 이것은 신이 결정되지 않은 ‘무 결정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무’와 상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헤겔은 무의 경지에 이른 해탈의 상태를 신과 합일 된 경지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해탈은 헤겔에 이르러 신과 소통하는 성령 충만한 시간이 된다. 이것은 불교의 본래적인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슬람 신비주의의 사상도 이처럼 불교 신비주의 사상과 만나게 될 때 해석상의 주관적 차이가 발생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교 종교학적 차원에서 양자의 신비주의 사상을 어떤 맥락과 구조 속에서 비교 가능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보는 것도 다원주의적 지구촌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각각의 종교나 교파를 초월하여 신비주의 사상가들은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와의 합일을 통한 궁극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는 공통의 요소와 특징을 지니고 있다.
II. 이슬람 신비 사상의 특징
1. 이슬람 신비주의와 수피즘
1) 이슬람 신비주의
이슬람의 신비주의 사상의 근거와 자료는 꾸란(Qur’an)과 성스러운 우주관(Mi’raj, 무함마드의 승천이야기) 그리고 신비적인 시적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초기 신비주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수피들의 사상은 모두 꾸란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로서의 꾸란이 이미 신비적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무슬림 사이의 신비적 전통은 이슬람 신앙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해 왔다. 처음엔 아라비아어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페르시아어와 터키어 등으로 이슬람 신앙의 신비주의 전통은 확산 되어 갔다. 그 가운데서도 근대 유럽 학자들은 수피즘을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이라는 별도의 범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신비주의 사상가인 알 가잘리(Abu-Hamid Muhammad al-Ghazali, 1058-1111)에 의하면, 이슬람의 중심 사상은 ‘이슬람’이라는 말보다 ‘신앙(iman)’이었다. 신앙은 꾸란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용어지만 ‘이슬람’이라는 말은 불과 8번 정도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부차적인 용어였다. 그러나 이슬람이라는 말은 알라 신에게 헌신하는 자들의 공동체와 관련하여 파생된 용어이기에 알라를 신앙하는 공동체의 대 내외적으로 그들 자신을 한정하는 정치적 의미와 영역의 실제적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불교(Buddhism)나 힌두교(Hinduism)와 같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가지는 학술적인 용어로 자리 잡기는 19세기 초 동양학자인 에드워드 레인(Edward Lane)이 유럽 언어권에 도입한 결과였다. 그 이전에 유럽인들은 이슬람이라는 말 대신에 무함마단(Muhammadan) 혹은 마호메탄(Mahometa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비 무슬림(Muslim) 학자들이 지칭하기 시작한 이슬람이라는 용어는 이제 점차 무슬림이라는 용어로 대치되고 있는 추세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수피즘이라는 말도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이 용어 또한 유럽의 동양학연구자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 된 것이다. 신비주의라는 용어는 영미 권에서 잘 정의된 내용으로는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정의가 있다. 그녀는 「신비주의」(Mysticism, 1911)라는 책에서, ‘인간의 영적 의식의 본성과 발달’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신비주의는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거대한 영적 흐름”이라고 설명하면서, 예컨대, 지혜와 빛과 사랑과 무(無)라고 불리는 ‘하나의 실재(One Reality)’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정의 외에 하바드 대학의 인도-무슬림학 교수였던 앤마리 쉼멜(Annemarie Shimmel, 1922-2003)은 신비주의란 우리의 인식으로 설명할 수 없고 철학이나 이성의 도구로 설명이 불가능 하지만, 오직 마음의 지혜, 즉 ‘그노시스(gnosis)’로 실재의 일부를 통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궁극적 실재(Last Reality)에 이르기 위한 통찰은 감각이나 이성의 도구가 아닌 ‘내면의 빛’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세상적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피들이 말하는 ‘마음의 거울을 닦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오랜 기간의 ‘정화를 통해서’(via purgativa) 가능한 것과 같다. 이를 통해 결국 신비주의의 마지막 목표지점인 무지의 베일을 벗고 신의 원초적 빛으로 가득한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을 이루어 사랑과 지혜가 가득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2) 수피즘
이슬람 신비주의로 대표되는 수피즘은 아라비아어의 ‘수프(Suf)’ 즉 ‘물감을 들이지 않은 양모’라는 뜻에서 파생된 용어다. 따라서 수피즘은 거친 양모를 입고 일정한 세속적인 삶과 거리를 두고 경건한 삶을 사는 자들의 생활 방식과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이러한 거친 양모를 입고 지내는 사람들의 풍속은 근동 지역과 페르시아 일대에서 정복적인 전투적 삶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획득하여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사는 부유층에 대한 일정정도의 저항정신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한 것이나, 불교의 승려들이 사치스런 의상을 피하고 단정한 수행복을 입는 것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수피들이 이러한 의상을 착용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다. 이들은 수도원의 은둔 생활 보다는 대중들에게 신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한다. 이는 수피들이 명상과 반성적 삶의 숙고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은둔적 삶을 취하기보다는 대외적으로 활동적인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수피 운동을 형식주의와 이성적 도그마주의를 거부한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적 분위기에 비교하기도 한다. 이러한 수피의 저항 운동은 형식화된 기성 종교의 배타성과 권위주의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주의와 이성주의는 종교의 다양한 심층적 차원의 풍부한 경험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수피들은 이성적 지식 그 자체를 초월하거나 특별한 지식으로서의 영적 인식(gnosis, ma’rifa) 또는 체험적 인식을 중시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수피즘의 자유와 보편주의의 이상에 대한 가치는 높은 존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중세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 시인 잘랄 알딘 루미(Jalal al-Din Rumi, 1207-73)에 대해서는 누구도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터키에서 살면서 이슬람의 신비 운동을 강력히 불러 일으켰고, 종교 학자로서, 설교가로서 수피 지도자로서 방대한 양의 시와 산문과 편지를 썼다. 그 가운데서도 6권으로 된 25,000구절의 서사시 마스나비(Masnavi)는 유명한 영적 걸작의 고전으로 남아있다.
수피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유럽의 동양학자들의 경우는 수피를 종교적 신앙과 실제의 각도에서 연구를 하는가 하면, 무슬림 신비주의자들은 윤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수피는 루미의 고전적인 시집 외에도 하얀 옷을 입고 춤추는 터키의 더비(Dervish)들을 통해서도 널리 전파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수피즘에는 본질상 신과의 내밀한 사랑과 교통이라는 측면이 있다. 수피가 이슬람의 제도와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본질적인 의미에서 수피는 이슬람 전통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학자들에 따라 수피를 정의하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대개 종교의 제한성을 넘어 우주적 영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뒤에서 고찰 하겠지만 이슬람과 수피라는 단어는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무슬림까지만 해도 이 두 용어는 오늘날처럼 그렇게 구분되는 차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 안에서의 수피의 활동은 일반적인 다양한 체험의 영역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수피즘은 이슬람과 관계가 없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민족의 무슬림들은 수피가 이슬람과 관계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는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 시인 루미(Rumi)에 대해서는 깊이 공경하고 있다. 서양에서의 수피즘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불과 200년도 지나지 않았다. 기독교 외에 타 종교에 대한 관심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서구인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산의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수피즘에 대한 현대적인 논의의 시작은 대략 1750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피즘에 대한 초기 유럽의 관점은 파키르(Fakir)와 더비쉬(Dervish)로 요약된다. 파키르는 아랍어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Faqir’에서 온 말로 이슬람의 고행 수도자를 일컫는다. 더비쉬는 페르시아어의 ‘다르비시(Darvish)’를 터키어로 부르게 된 말로 ‘문 곁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탁발 수도사에 비유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후 이들은 수피의 춤을 추는 집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1868년에 미국 외교관이자 번역가인 존 브라운(John P. Brown)은 「더비쉬, 동양의 영성」(The Dervishes, or Oriental Spiritualism)라는 책을 써서 동양의 낯선 이슬람 풍속을 서양에 알렸던 것이다.
수피즘의 특징을 잘 알려주는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인 파키르의 뜻은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좀 복잡한 역사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인도 무갈(Mughal)제국의 페르시아 기록에 의하면 파키르는 수피 금욕주의자나 방랑자들을 포함하여 요기(yogi)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비-무슬림들을 지칭하는데 쓴 용어였다. 영국이 19세기에 인도를 점령했을 때 바로 이 용어를 그대로 수용했는데, 거의 전적으로 힌두 금욕주의자들에 대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수도원의 조직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방랑 거지들”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관계없이 영국인들은 이들을 파키르라고 불렀다. 파키르라는 단어가 우연히도 영어의 협잡꾼이나 행상인을 뜻하는 ‘페이커(faker)’라는 용어와도 유사했기에, 영국인들은 이들 금욕주의자들을 사기꾼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영국의 외부 관찰자들의 시각과는 달리, 더비쉬나 파키르라는 단어는 영적인 가난을 의미했고, 신과의 관계 속에서 가난하게 되는 것을 뜻했다. 또 다른 종교 전통에 의하면 수피에게서의 가난은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돌아서서 신의 실재를 체험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한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빈곤이 나의 자랑이다.”라고 했던 말을 되풀이하여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1) 수피즘의 두 가지 차원
쉼멜은 각 종교가 지니는 신비주의 사상의 요소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꼽는 것은 신비적 차원의 두 가지 경험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수피즘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예컨대, ‘무한성의 신비주의’와 ‘인격성의 신비주의’의 두 차원이다. 전자의 차원은 고도의 순수성을 지닌 것으로 플로티누스(Plotinus)의 사상이나 우파니샤드(Upanishad)의 체계 가운데, 특히 상카라의 불이론(advaita)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경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이론(不二論)적 사상들은 이븐 아라비(Ibn ‘Arabī)의 학파에서 형성된 수피즘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멘(Numen)적인 현상도 모든 존재를 넘어선 존재, 혹은 심지어 무(not-Being)로도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사고의 범주로 포착하여 설명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시간적인 무공간적인 무한한 절대적 존재로서의 유일 실재(Only Reality)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절대적 신성의 존재’에서 비롯된 ‘제한적 실재’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무한한 바다의 물방울 같이 사라지는 개별적 영혼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예언자들이나 개혁가들에게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인격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범신론이나 일원론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의 유출설과 같은 주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creatio ex nihilo)’ 성서적, 꾸란적 사상과 대치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격성의 신비주의’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순종과 사랑의 형식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수피즘의 초기 형태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신비주의는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 신비주의의의 경험적 유형은 ‘의지적 유형’과 ‘그노시스적(靈知) 유형’의 두 가지 각도에서도 설명되기도 한다. 전자는 예언자 전통에서 말하듯이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형식이며, ‘그노시스적 유형’은 신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열망한다. 신에 대한 본질을 ‘알 수’는 없지만 우주의 구조와 계시의 문제를 더욱 심층적으로 알고자 하는 경험적 태도다. ‘마리파(ma‘rifa)’ 즉 ‘그노시스’의 명상적 학파의 창설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둔 눈(Dhū’n-Nūn, 859년 사망)이 그의 동료 신비주의자들에게 경고한 메시지는 ‘그노시스’의 한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다. 신을 지적해 내려고 하는 것은 연상주의(shirk)일 뿐이며, 참된 그노시스는 당혹스러움(bewilderment)뿐이다.” 이러한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그노시스적 접근 방식은 신지학적 체계를 만들어 낸다. 이 같은 두 가지 형식의 신비주의가 이슬람에서 강력히 공존하다가 후기에 갈수록 서로 혼용된다.
수피즘이 형성되던 시기에 후즈위리(Hujwīrī, 1071년경 사망)는 신에 대한 수피의 두 가지 접근 방식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친밀감(intimacy)”이냐, “공경하는 마음(respect)”이냐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존귀한 분에 의한 사랑의 불로 녹아진 사람과 아름다운 분에 의한 명상의 빛에 응시 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신의 행위를 명상하는 자와 신의 존엄함에 놀란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우정의 추종자요 후자는 사랑의 동반자다.” 이러한 표현에서 보듯이 수피즘에도 신비적 체험을 하는 방식이 서로 다름을 보게 된다. 이 밖에도 수피즘의 신비적 체험에 대한 현상적 접근은 다양하다. 사실상 그 경험적 깊이를 말로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2. 중세 이슬람 나사피(Nasafī)의 신비사상
이슬람 신비 사상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가 나사피(‘Azīz ibn-Muhammad-i Naasafī)다. 이슬람 역사에서 나사피의 신비 사상을 고찰해 보려고 하는 이유는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이 교리적이지 않고 실질적이라는 점이다. 그에게서 진리는 이슬람의 교리 보다는 개인적 경험이 더 중시된다. 그는 진정한 이슬람은 신학의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종교인들의 마음을 수용하는 정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더비쉬들에게 주는 경고에서, 위선적인 설교 강단이나 사원에서는 물론 환상에 사로잡힌 독선적 수피의 수도원에서도 진리나 현인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사피는 참된 종교란 교파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외형에서 존재로, 신앙에서 참 지식으로 이끄는 내적인 성취에 의해 성립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 성취를 주장하는 그의 사상을 우리는 신비주의 사상이라 부를 수 있다.
1) 신비 수행의 목적: 영적 성취와 자유
나사피는 신(알라)을 아는 현명한 사람들이야말로 참된 종교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는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는 비전(秘傳)의 통찰력을 제공하는 고등 지식을 획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그는 신학자들이 “종교적 도그마의 길을 걷는다.”고 본 반면에, 신비 사상가들은 “늘 새롭게 출발하는 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에게서 신비 사상가들은 늘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는 자들로 묘사된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육조단경’의 ‘혜능의 길’보다는 ‘신수의 길’에 비유된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생명의 정화(vita purgativa)’를 통한 ‘내적 삶(inner life)’을 강조한다. 이 내적 삶의 신비로운 수행의 목적은 ‘완전한 성취(completeness)’, ‘완전한 성장(full-grown-ness)’ 그리고 자유(freedom)라는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이 중에서 나사피는 ‘완전한 성장’과 ‘자유’에 주목하여, 이를 나무의 열매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나무의 열매가 완숙(bāligh)해지면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 때 열매도 나무에서 자유(ḥurr)로와 진다. 영적인 경험도 마찬가지로 ‘완숙’에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모든 도상의 수행자의 목표지점(nihāyat)은 이러한 영적으로 완숙한 자유로운 경지다. 따라서 성숙을 위한 영적 훈련이야말로 수행자들이 바라보는 종착점(ghāyat)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자유다. 나사피에 의하면, 이슬람 신앙은 “신(알라)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고 하는 고백에 의해서 성립된다. 이 신앙 고백은 바로 우상과 같은 자신의 이기심을 초월하는 것을 뜻한다. 일단 이 초월이 가능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2) 사랑과 지성의 빛, 그리고 영혼
나사피는 지적 통찰력을 중시한다. 그런데 사랑은 지적 통찰의 활동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승화된다는 것이다. 나사피는 이렇게 말한다. “지성의 빛이 예리하게 빛난다 해도, 사랑의 불빛은 훨씬 더 예리하다.” 사랑의 불빛은 지성의 빛과 결합하여 ‘빛 위의 빛’이 된다. 지성의 빛은 집안의 일부를 비추지만 사랑의 빛은 집안 전체를 비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사피에게서 사랑의 불빛은 이기심을 소멸시키는 신비로운 힘이 된다. 물론 이러한 것은 오직 내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묘사가 가능한 것이다. 몇 가지 이슬람 전승에 따라, 나사피는 신이 최초에 이성(理性)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이 이성은 지성의 빛이다. 왜냐하면, 이 빛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영혼은 삶에 관계된다. 영혼은 삶에 활기(muḥyī)를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앎’과 관련하여, 참된 종교적 ‘이해’라는 것도, 객관적 실재(ḥaqīqat)와 결부된 인간 영혼의 정체성을 통각(統覺)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영혼의 직접적인 통각은 단순한 신학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영혼의 거듭남과 같은 비전(秘傳)의 심원한 지식으로 가능하다고 나사프는 말한다.
그는 신학자들이 코끼리 장님 만지듯이 코끼리의 일부를 코끼리라고 하는 것처럼, 종교의 우주적 차원을 말하지 못하고 공식적으로 가르쳐지는 신학적 일부의 지식(exoteric knowledge)을 고집한다고 말하면서 우주를 하나의 전체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신비적 지혜(esoteric wisdom)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나사피는 왜 그토록 이슬람의 공교(公敎)적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가 보기에 대다수가 모든 것이 화해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영역으로 자신을 이끌지 못하고 종파적 제의에 매몰되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일부의 지식에 빠져서 전체를 보는 눈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사피는 바로 이점을, 앞서 말한 불교적 우화 가운데 하나인,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신학자들의 어리석은 지식에 비유한 바 있다.
3) 나사피의 일원론 사상
나사피는 그의 백과사전적인 「실재의 베일을 벗기다」(The Unveiling of Realities, Kashf ul-ḥaqā‘iq)라는 저서에서 ‘신비’와 ‘실재’를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이 두 개념은 경험적 차원뿐만 아니라 실제로 비밀스런 지식의 차원이다. 그는 특이한 신지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는 커다란 재난에 직면하여 1,000년에서 7,000사이의 크고 작은 주기(週期)를 통과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순환 사상은 윤회 사상을 엿보는 듯하다. 나사피 당시의 사상가들을 4개의 그룹으로 나눈다면, 신학자와 철학자, 윤회를 믿는 사람들 그리고 일원론자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나사피는 일원론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 일원론을 옹호할 뿐 아니라,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 그리고 문법 학자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나사피가 이토록 일원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근거로는 세계에는 오직 유일한 존재만이 있는데, 그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다. 나사피의 논리에 의하면, 신이라는 존재 이외에 어떤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면, 존재라는 측면에서 관련하여 볼 때, 신은 그의 동료들이나 경쟁자들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들 두 존재는 연관되거나 분리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 어떤 것과도 연관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유일한 것이라면 둘이 될 수 없고,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있어 왔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늘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나사피는 말한다.이것은 또한 “신(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말을 “신 이외에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과 존재는 동일한 개념이 된다.
(1) 불의 일원론과 빛의 일원론
이 같은 이슬람 유일신 사상의 철학적 일원론으로의 변신은 곧바로 현상계에 대한 존재의 관계문제를 야기 시킨다. 나사피는 일원론(ahl-i waḥdat)의 다양한 관점을 차례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불의 일원론(așḥab-i nar)’과 ‘빛의 일원론(așḥab-i nur)’과 같은 구분이다. 불의 일원론은 각각 이 단계에 돌입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음과 과오(nașb)가 소멸되고 그 자신도 소멸된
것을 말한다. 불은 우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태워서 소멸시키고 그런 다음 그 자체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빛의 일원론은 각각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그가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불은 존재를 소멸시키는 반면에, 빛은 존재를 존재하게하기 때문이다. 나사피는 불의 일원론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과 세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불의 일원론자들은 세계가 그들 자신을 포함하여 단지 관념(khayal)과 외형(numayish)에 불과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이나 거울에 비쳐진 형상이며 꿈같은 이미지로서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어떤 실체가 있다고 주장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참된 존재인 신의 존재는 ‘무의 존재(nonbeing, nēst-numāy)’로 나타나며, 상상의 존재이지만 세계의 존재로서, 존재(hastnumāy)로서 드러난 ‘무-존재’다. 그리하여 세계는 신을 통하여 ‘존재(being)’하고, 신은 세계를 통하여 ‘드러난다(appears)’. 또한 신은 세계의 실재이며 세계는 신의 형태다. 이런 점에서 세계와 신은 하나의 몸통을 이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공(空)’과 ‘색(色)’이 하나로 통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원리와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나사피에 의하면 신이 현존하지 않는 세계에는 어떤 원자(原子)도 있을 수 없다. 실재 없는 관념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사피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을 공기에 비유하여, 세계 속에 드러나는 신은, 신기루 속에 드러나는 공기에 비유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참된 존재는 어디서부터 기원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서도 나사피는 불의 일원론자들 가운데 두 가지로 세분화 한다.
첫 번째, 유일무이한 존재는 영적 세계와 더불어 시작되며, 신은 단지 세계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핵심일 뿐이다. 이는 마치 공기와 신기루의 비유를 통해서도 설명되는데 참된 존재의 영적 세계가 공기에 해당한다면, 외관상 드러난 물질적 세계는 신기루의 차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의 일원론의 두 번째의 유형은 신에게 안과 밖의 차원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은 두 가지 대립되는 차원이기에 신에게는 그런 대립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실재로서의 신은 단지 관념과 외형에 불과한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모두 초월해 있다. 이러한 불의 일원론은 인도 사상의 마야(Maya) 이론과 유사성을 지닌다. 불의 일원론과 달리 빛의 일원론은 범신론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이를 나사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함께 하는 만물은 신의 존재다. 존재 안에는 이원성이나 다중성이 허용될 수 없고 오직 유일무이한 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신 이외에 어떤 다른 것도 존재가 될 수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신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안이며 밖이요, 아는 자요 알려지는 자다.”나사피는 이러한 존재를 세계 혹은 신이라고 묘사 할 수 있고, 아니면 신은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명명되지 않은 채로 남을 수 있다고 한다. 오직 존재의 속성이나 형태만이 이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빛의 일원론도 나사피는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물질적인 외부 세계와 영적인 내적 세계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참된 실재라는 것이다. 마치 자녀가 출산하게 되는 것은 부부 사이의 명목상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결속(ittișāl-i ‘ishqī)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창조물은 활성화된 실체다. 결속이 해체되어 죽게 되면 몸은 물질적 세계로 가고 영혼은 영혼의 세계로 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직 몸만 변화를 겪고 영혼은 변화되지 않는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빛은 사라지지 않듯이 말이다.
두 번째 유형의 빛의 일원론은 영적 세계나 물질적 세계 모두 발달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광물질에도 영혼이 부여되어 있어서 무기물, 식물, 동물, 인간의 단계를 통하여 점차 완전성에 이른 다음에 인간의 정점에서 다시 광물질로 영원히 거듭하며 순환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해탈 없는 윤회 사상을 보는 것과도 같다. 바로 이러한 관점을 나사피도 동의하고 지지한다. 빛의 일원론 가운데 바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내용을 좀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세계가 신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갑자기 창조되었다거나 서서히 발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신은 어느 순간에도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구조의 높고 낮은 차원의 계급 구조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절대자가 감각적인 세계 질서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존재는 결코 발달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오직 개별적인 ‘특별한 어떤 것’, 혹은 각각의 ‘부분’이나 각각의 ‘물질’만이 발달될 수 있을 뿐이다. 존재 그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구성성분만이 광물질에서 인간 등으로 이동할 뿐이다.
나사피는 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부분과 전체의 두 측면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응시하게 될 때는 다양성과 불완전성을 보게 될 것이다. 존재의 개별적인 부분들은 존재의 영원한 흐름의 특별한 단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체를 응시하게 될 때, 그 안에 통일성과 완전성을 보게 된다. 이 같이 만물은 지금처럼 늘 있어왔고 또 동일한 조건으로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 될 수 없고, 완전성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 구성원의 흐름과 이동에는 4개의 웅덩이(ḥawḍ), 즉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자연적 영역을 거치게 된다. 마치 사막의 낙타 대상이 하나의 휴식처에서 또 다른 휴식처로 끊임없이 이동하듯이 계속하여 이들 존재의 구성원들은 영원히 순환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사피의 우주관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지상의 존재 구성원들은 이동한다. 그러므로 이 순환에는 시작이 없다. 그런데 또 다른 이슬람 우주관에 의하면, 이러한 지상의 순환주기(광물질, 식물, 동물, 인간) 바깥의 세계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 세계와 바깥 세계 영역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점에 대한 나사피의 세계관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2) 지상 세계와 바깥 천체세계의 영혼
나사피가 말하는 일원론자들에 의하면, 지상에는 광물과 식물과 동물(인간을 포함하여)의 영역이 있는데, 광물의 단계에는 신비적인 표현으로 ‘지상의 천사들’이라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네 가지 ‘기초적 영혼’이 있다. 식물 단계에서는 ‘영혼’이 있다고 하고, 동물 단계에서는 ‘이성(理性)’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사피는 철학자들과 영혼의 윤회를 믿는자들은 영혼이 식물 단계에서 출발하지 광물 단계는 아니라고 한다. 철학자들은 식물단계의 영을 자연의 영이라 하고 동물단계의 영을 동물의 영이라 하며 인간의 영을 정신의 영이라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윤회를 믿는 자들은 영혼 보다는 정신을 강조하며 자연정신, 동물정신, 인간정신의 셋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인간은 정신과 영혼의 세 가지 다양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식물적인 자연정신은 오른쪽의 간(肝)에, 동물적인 영은 왼쪽의 심장에 인간 정신의 영혼은 두뇌에 있다는 식이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정신 영혼(the soul spirit)’은 천체의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나사피는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를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천체의 정신과 영혼의 지식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실재를 반영해 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공에 얽매어 있는 자연적 인간의 지식보다 몇 배 더 우수하다.나사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체의 영혼들에 의해 알려진다. 천체의 영혼들은 모든 존재자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실로 천체의 영혼은 심지어 비존재 혹은 아직도 출현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이 천체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보다 뛰어나며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눈을 가진 셈이다. 그런데 나사피에 의하면, 인간도 초감각적인 세계와 감각적인 세계가 하나가 되는 그러한 상태에 자신을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명상적인 사람들은 자신 속에 반영되는 각각의 새로운 영역의 지식을 가지고 내적 발달의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최상의 천체의 영혼과 ‘완전한 인간(insān-i mukammil)’의 반영 속에서 자신을 알게 되고, 이렇게 해서 창조의 목적을 달성한다(만일 일원론의 체계에서 창조라는 말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3) 신의 두 이름: 연민과 자비
나사피는 꾸란(Quran)관 관련된 신의 현현의 두 정점의 신비적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상의 천체의 영혼에 대한 이름은 ‘연민(Raḥmān)’이며, 최상의 천체의 유형(有形)은 ‘왕위(王位)의 보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보좌’ 위에 ‘연민’이 자리 한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의 영혼의 이름은 ‘자비(Raḥīm)’이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의 몸은 보좌가 되며 그 위에 자비가 자리한다.
이와 같이 나사피는 신의 두 가지 이름을 ‘연민과 자비’의 형식으로 설명 한다. 이 두 가지 이름은 꾸란 전체의 구절을 앞서가는 것이며, 신의 두 가지 다른 인격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는 마치 그리스도교 신의 삼위일체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예컨대, ‘자비’는 ‘아들’, ‘연민’은 ‘성령’, ‘알라’는 존재의 궁극적 단계에 있는 이들 둘 위에 보좌로 있는 ‘아버지’가 된다.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알라(Allah)
연민(Raḥmān) 자비(Raḥīm)
물론 나사피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공식을 적용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세 가지 인격의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일원론자로서 존재의 형태를 차별화시켜 보려는 의도에 따른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신비적 성장을 통해 ‘만유(the All)’의 지식을 통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만유’와 그리고 ‘신’과 일치가 되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만유’와 ‘완전한 인간’은 둘이 서로를 껴안는 접점이 된다. 즉, ‘만유’는 자연적 본성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이 자연적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신은 오직 이들 둘이 서로 일치하여 모든 적대와 대립이 사라지는 통합의 상징과 개념으로서만 위에 있는 존재다.
(4) 인간과 우주
나사피는 인간이 우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소우주(microcosm)로서 우주의 축약판이다. 따라서 우주는 인간이 확대된 모습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나사피는 우주를 ‘빅 맨(Big Man)’, 인간을 ‘리틀 맨(Little Man)’이라 묘사한다. 그는 천체들 중의 천체인 최상(最上)의 천체는 모든 다른 천체를 포괄하며, 전 우주는 ‘빅 맨’의 피부에 비유한다. 그리고 고정된 별들의 천체를 머리와 발에 배치시키고, 황도 12궁의 별자리는 12종류의 동물의 힘에 비유한다. 또한 10개의 인식 감각 기관을 내부와 외부 각각 5개의 인식으로 분류한다. 외부 인식은 상식, 상상, 추리, 기억, 조합 능력이다. 그리고 나머지 원인과 실행이라는 두 개의 동인(動因) 감각이 있다. 나머지 별들은 식물 생장과 관련되다. 칠층 천(天)은 7개의 내장에 비유된다. 위, 십이지장, 공장(空腸), 회장(回腸), 맹장(盲腸), 결장(結腸), 직장(直腸)이다. 7개의 행성은 인간의 7개의 기관 즉, 뇌, 폐, 심장, 간, 신장, 방광, 비장에 해당한다. 이처럼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소우주가 된다. 이는 마치 인도나 중국 사상에서 인간이 소우주에 비유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천체의 운행을 인체에 비유한 음양오행 사상과도 유사한 일면이 있다. 나사피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존재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특질로 형성되고(mușawwar) 부여된다. 인간은 ... 오, 그대는 신이라는 책의 복사판이어라. 오, 그대는 황실의 아름다운 거울이어라. 세계에 있는 그 무엇도 그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대가 무엇을 바라건 간에 그대 자신을 바라는 것이라. 왜냐하면 그대 자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사피의 주장은 인도 사상의 핵심인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바, “그대가 바로 너다(Tat tvam asi)”라는 선언을 연상케 한다. 한마디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나사피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류들 각각이 하나의 거울이지만, 인간은 전체 우주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전 우주가 담겨 있고, 인간 그 자체는 하나의 작은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거대한 우주가 전개해 가는 모든 것을 자신 속에서 전개하는 존재 그 자체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이렇게 말한다.
“오, 더비쉬여, 신의 집, 예루살렘, 하늘의 집, 종말의 망우수(忘憂樹), 잘 보존된 서판, 위대한 보좌, 숭고한 정점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특질이자 단계들이다. 지식, 무관심, 여기, 이후, 낙원, 예언, 성스러움 이런 것들도 인간의 특질이자 단계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인, 무지, 사탄, 지옥, 무저갱과 같은 것들도 인간의 특질이자 단계다. ... 오 더비쉬여, 유일신을 믿는 신앙의 정점에서 다신주의로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 인간과 신이 두 실재라고 믿지 말라. 그렇게 되면 두 개의 존재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나사피는 인간의 극단적인 양면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과 인간은 두 개의 독립된 실재라고 믿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신과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신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결함투성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사피에 의하면 여전히 인간은 창조의 정점이며, “존재의 심장”이고, “나무의 열매”에 비유된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천체는 “나무의 뿌리”와 잇닿아 있다. 그리고 심지어 지성과 영혼(‘uqūl, nufūs)이나 천체와 별들(aflāk, anjum)도 인간에게서 그들의 완전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만물의 목적은 인간이 되는데 있고, 일단 인간이 되면 존재하는 세계 모든 것들의 상승(mi‘rāj)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지상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을 거쳐 천체의 영역에 이르는 데는 오직 하나의 줄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처음에 천체의 영역, 곧 ‘원-이성(原-理性, original reason)’으로부터 출발하여, 천체를 거쳐 지상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상승한다.
(5) 세 종류의 인간
나사피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7단계로 구분되는 그의 우주관에서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과 자연, 빛과 어둠 사이에 위치하여, 천상의 세계는 천국이 되고 지상 세계는 지옥이 된다. 인간이 이성과 빛을 잃으면 어둠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서 모든 부분을 이해하는 지식으로서 ‘세계의 가슴’을 차지하지만, 부분들은 가슴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광물질의 자연 단계에서 최상층의 단계인 천체의 영역에 이르기까지는 7단계를 거치는바 인간은 그 중간인 4번째의 단계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물질에서 식물, 동물, 인간, 행성, 고정된 별들의 영역, 천체의 영역이다. 이 7단계에서 인간 이전의 아래 단계인 광물, 식물, 동물은 악마와 사탄이 자리한 ‘지옥’의 영역에 해당하고, 인간 그 상위의 영역인 행성에서 천체까지는 ‘낙원’의 영역이다. 그리하여 지옥에서 낙원에 이르는 전 영역이 아래 위에 걸쳐서 인간과 결부되어 있다. 이 같은 관점에 근거하여 나사피는 인간을 3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 유형은 앞서 언급한 인간 이하의 지옥의 유형이고, 두 번째 유형은 천사와 지능과 영혼에 관계하는 낙원의 영역이며, 세 번째의 유형은 이 7단계를 넘어서 신에게 도달한 신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의 사람들이 되는 완전성의 길은 광물질로 가는 길과는 반대방향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더비쉬들에게 주는 메시지에서, 이성을 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천사 가브리엘이나 인간에게 활기를 주는 미카엘 같은 천사 혹은,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의 나팔을 부는 자에 비유한다. 더 나아가 이성은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는 아담으로, 자연(ṭabi‘at)은 악마로 불려진다. 이처럼 천사는 이성으로, 사탄은 자연으로 묘사된다. 인간이 사후에 지옥으로 갈 것인가 혹은 낙원으로 갈 것인가 하는 오직 인간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나사피에 의하면, ‘상승적 윤회(naskh)’는 광물의 형태의 영혼을 벗어버리고 식물, 동물, 인간, 천사의 단계로 새로운 몸을 갈아입는 것을 말하고, ‘하강적 윤회(maskh)’는 그와 반대의 단계를 거친다. 예컨대, 인간이 동물의 단계로 하가하여 변형 될 때는 그 순간 개미와 같은 기질이 지배적이면 개미로, 혹은 쥐로 변형 된다는 것이다. 혹은 개나 고양이 혹은 뱀이나 전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광물질로의 하강도 같은 원리다. 이처럼 인간 영혼의 상승과 하강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의 결과에 따라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일단 완전성을 획득하면, 영원한 변화와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인간이 지식(智識)과 의(義)를 가지면 가장 높은 단계인 ‘만유-정신(All-soul)’과 ‘만유-이성(All-reason)’의 단계에 도달한다. 결국 지옥이나 낙원으로 가게 되는 인간의 판단과 행위는 바로 앎과 의로움으로 규정된다. 즉 신을 알고 거기에 알맞은 의로운 행위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상승과 하강은 이해되지만 식물이나 광물질의 상승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나사피는 전 자연적인 영역에 사랑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 개념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사랑은 전 우주적 속성이며 이 사랑의 힘에 의해 각각의 피조물들은 궁극적 목적을 향해 지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은 우주발생론적인 에로스가 아니라, 일종의 성장의 힘으로서의 리비도(libido)와 같은 것이다. 나사피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그들의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데 그 목적(nihāyat)은 완전성이며, 만물의 끝(ghāyat)은 인간이라는 종(種)이다. 그러나 도중에 자신들의 의지를 거슬려 폭력적으로(Qasrī)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목표는 성숙함이며 그 끝은 자유다. 만물이 전진하게 되는 동기는 사랑(‘ishq)이다. 식물의 씨앗이나 동물의 정자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실로 세계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이 없다면 천체도 돌지 않을 것이며, 식물도 자라나지 않을 것이고 동물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은 그들 자신을 위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눈을 뜨듯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앞서 언급한 빛의 일원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 세계가 신이라면 왜 특별한 것들에 대해 숭배를 하는가? 이 점에 대해 나사피는 논쟁을 회피하고 다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사피는 신을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본질(실체), 외형(형태), 그리고 정신(영혼)이다. 본질은 신의 순수 개념이고, 외형은 그 개념이 드러난 형태다. 그리고 정신은 본질과 외형을 모두 포괄한 개념이다. 이점은 물의 예를 통해 설명 되는데, 모든 식물 속에 물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각각 물의 본질/실체(dhāt)과 외형(wajh)을 보여 주는 것이며, 정신(nafs)은 모든 물의 총체성(majmū’)을 말하는 것에 비유된다고 한다. 바로 이 물의 속성과 같이 신은 또한 참된 빛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독특한 형태의 빛은 신의 외형이며 빛 전체는 신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에서 바라보는 그 무엇이라도 그것은 신의 외형을 보는 것이다. 이는 꾸란에서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대가 무엇을 바라보던지, 거기에는 신의 외형이 있다(2장 19절).” 그리하여 나사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오직 신의 외형만 바라보는 사람은 다신론자다. 외형을 넘어서 본질을 보는 자 그는 하나의 신을 믿는 자다. 이와 같이 만물을 경배하는 것은 신을 경배하는 것이다. ... 그러나 다신론 주의자들은 신의 외형을 보고 신을 경배 한다 해도 신의 일면만 볼 뿐이다. 그리하여 예언자들은 ‘제한된 신(ilāh-i maqayyad)’에서 ‘무제한적 신(ilāh-i muṭlaq)’로 나아갈 것을 말했다.”
이와 같이 나사피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실체(dhāt)과 외형(wajh) 그리고 정신(nafs)이라는 3가지의 모습과 원시적 발아의 배태(胚胎)적 형태(jāmi‘a)와 발달된 형태(mutafarriqa)의 2형태를 취한다고 말한다. 본질적 상태는 계란이나 곡물의 씨앗과 같은 상태로서 이를 배태기적 가능성의 형태라고 한다면, 나무나 인간이 완전히 성숙해진 상태를 ‘발달된 형태’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존재가 드러나고(inbisāṭ) 연장된(imtidād) 상태를 정신이라 부른다. 드러남은 존재의 발산이며, 연장은 몸의 성장과 움직임을 뜻한다. 이 정신-존재의 발산과 움직임을 신학자들은 ‘주(Lord, rabb)’라고 부른다. 이것은 ‘정신을 아는 자는 주님을 안다’는 말과 같다. 더 나아가 ‘그 자신을 아는 자는 주님을 안다.’는 말과도 같다. 신학자들이 주라고 부르는 정신을 아는 단계는 모든 적대적인 관계나 대결의 단계를 넘어, 수치나 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단계다. 그러므로 여전히 감각과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유로운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사피는 신의 존재 방식이 배태(胚胎)적인 형식의 발아의 본질 단계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드러난 외형과 정신의 단계에 머무는 존재라고 말한다.
본질 단계는 가능성만 있을 뿐 성숙함이나 완전함이 결여된 상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사피는 ‘자연’의 미성숙과 ‘우주’의 성숙에 대해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물질적 세계를 꾸란에 비유하되, 각각의 종류별 속(屬)을 꾸란의 장에, 각각의 종(種)을 구절로, 그리고 각종 개체를 글자에 비유하고 있다. 이리하여 나사피는 그의 모든 신비적 사상을 꾸란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꾸란을 읽거나 들음으로서 세상의 덧없음을 초월하고 영적 세계로 진입하여, 한 순간 전 책의 지식을 홀연히 획득함으로써,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책을 덮고 책에서 떠나 천국에 이를 것임을 말하고 있다.
III. 불교 신비주의 사상의 특징
1. 불교의 신비사상
베다의 제의와 형식화에 치우친 브라만교에 대한 도전으로 탄생한 불교 사상은 석가가 깨달은 연기(緣起)설과, 고통과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얻게 하는, 이른바 사제팔정도의 가르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석가는 기존의 인도 사상에서 유행하던 업(karma)과 윤회(samsara) 사상을 나름대로 재정립하여 공(空)과 무아(無我)설에 입각한 해탈(moksha)의 가르침(dharma)을 폈는데, 그의 사후에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학자들의 해석상에서 데라바다(Theravada, 상좌불교)와 마하야나(Mahayana, 대승불교)로 크게 나누어졌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티베트 불교 또한 독창적으로 전개되어 졌고 중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석가의 가르침 중에서 팔정도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분류되어 공통적인 수행법으로 전수되고 있고, 석가의 깨달음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도 큰 틀에서는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점차 불교의 교리가 번잡해지고 형식화되어지자 중국에서 공사상을 기초론 한 선불교(禪佛敎) 운동이 일어났다.
불교 신비주의는 바로 이 선불교 전통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선불교 전통은 중국의 선종(禪宗) 계통에서 발전한 것으로 선종은 초조(初祖) 보리달마의 선법(禪法) 이후로 당(唐)대에 성행했고 이후 한국과 일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선종은 『능가경』과 『금강경』 등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데, 그 주장하는 바는 세계의 현상들이 본래 무(無)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요한 선정과 같은 수련을 통하여 해탈을 얻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속박을 벋어나 해탈을 이룬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견성(見性)’해야 하고 견성하게 되면 성불(成佛)한다는 것이 선불교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견성성불’의 방편으로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든지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같은 것은 모두 불교의 깨달음과 해탈을 위한 중요한 신비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견성’과 ‘깨달음’은 일반적으로 혼용 되어 왔지만, 깨달음은 한 차원 더 깊은 단계의 수행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서양의 불교학자 윌리엄 함레스(S. J. William Harmless)는 “Mysticism and Zen Buddhism: Dōgen(1200-1253)”이라는 논문에서 선불교는 기독교나 이슬람 신비주의보다 더욱 깊은 신비주의적 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나 이슬람 신비주의는 어디까지나 신비주의의 정의 자체에 있어서 신과 인간 영혼의 합일을 말하지만, 선불교에서는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의식의 차원에서 더욱 신비적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카모디(D. L. Carmody and J.T. Carmody)는 석가의 깨달음이야말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같은 신비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본고에서는 다양한 불교 신비주의 내용과 학설이 있지만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과의 비교라는 측면에서 선불교 사상의 내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불교의 핵심 사상들을 간략히 고찰해 보자.
1) 공(空, Śūnyatā)에 대한 이해
불교에서 공은 단순히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의 없음(無我)’을 뜻한다. 그런데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에 의하면 공은 긍정과 부정, 존재와 비존재, 영원성과 소멸의 딱 중간에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 세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覺者)들은 이 단계를 초월한다. 여래는 중도의 법(Dharma)을 가르치는데, 이 중도가 곧 공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Absolute)도 공이며, 만물도 공이다. 그 공속에 열반도 있고, 세계도 맞물려 있다. 둘은 더 이상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이것이 불교의 신비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콘즈도 궁극적 진리는 더 이상 과학적(Scientific)이 아니라 신비적(mystical) 진리라는 점에 동의한다. 심지어 사성제(四聖諦)라도 잠정적인 진리일 뿐 궁극적인 가르침은 못되며 형언할 수 없는 일자(One)의 빛의 세계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다.그 점에서 선불교가 말하는 불립문자의 차원일 수도 있다. 콘즈에 의하면, 공은 또한 내적인 자유를 의미하고, 니르바나에 대한 명칭이며, 해탈로 들어가는 문의 하나다. 또한 공은 결핍을 의미하지도 않고, 순수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순수한 비교(秘敎)적 용어다. 공은 그래서 오직 신비적인 명상을 통해, 실천적 지혜를 터득함으로써, 세상적인 무지를 극복하여 세상을 초월하는 해탈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2) 불교의 우주론: 공간과 시간 구조
불교에서는 윤회(saṃsāra)를 믿는다. 그러나 윤회의 시작은 붓다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윤회의 기간은 헤아릴 수 없는 영겁(永劫, aeon)의 세월을 거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영겁의 기간에 대해서도 붓다는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지 않고 다만 비유를 들었을 뿐이었다. 예컨대, 7마일의 길이와 7마일의 높이를 가진 거대한 바위를 곱고 가는 옷자락으로 100년에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가서 마침내 바위가 다 닳을 때까지를 한 영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백년도 천년도 십 만년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윤회와 관련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설명되는 네 개의 요소가 완전히 종식되는 것은 열반(涅槃, nirvāṇa)이라고 하는 의식에 있다. 그리고 초기의 니까야/아함경(Nikāya/Āgama)에 의하면, 우주를 삼천(三千)세계 등의 구조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도 우주를 충분히 표현해 낸 것이 아니고 전승된 자료를 설명해 주는 것뿐이다. 이들 초기 경전이 불교 우주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후의 아비달마(Abhidharma) 전통에서 정교하게 체계화 되어 지금까지도 불교 우주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비달마의 우주론에 의하면, 윤회하는 세계는 11개의 차원으로 구성된 욕계(kāma-dhātu), 16개의 차원으로 구성되면서 여기서 가장 높은 단계는 브라흐마(Brahmā, 梵)가 있는 색계(rūpa-dhātu), 마지막으로 4차원으로 구성된 무색계(arūpa-dhātu)의 삼계에서 모두 31개 차원의 존재 영역이 있다. 윤회하는 욕망의 단계의 가장 낮은 차원은 지옥의 존재(niraya)로 표현되고 가장 높은 차원의 단계는 의식도 무의식도 없는(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존재다. 그런데 가장 높은 단계의 존재도 그 수명이 84,000의 영겁이다.
4) 깨달음을 얻는 지혜와 선정(禪定)의 길: 열반
불교에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 Buddha-dhātu, tathāgata-garbha)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성(神性)이라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윤회에 휩싸여 있다. 윤회에 사로잡혀 있는 한 고통(duḥkha)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무색계의 최상층에서 84,000영겁의 기간을 살면서 정신, 물리적 고통을 겪지 않고 존재하는 브라흐마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열반(nirvāṇa)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해탈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인간(the Great Man)’은 삼계의 마지막인 31단계를 넘어선 제32의 차원으로 벗어나야 한다. 윤회는 오직 31단계의 차원까지만 거듭되기 때문이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해탈의 길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중심 사상이다. 이를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四聖諦)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의 소멸’(nirodha)은 곧 열반의 증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을 제거 할 수 있는가? 이는 고통의 뿌리인 ‘갈애(渴愛, taṇhā)’를 없애는 것이다. 갈애의 소멸은 인연연기설에 입각한 무아(無我)를 깨닫고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과연 갈애를 제거한 해탈의 상태인 열반은 절대적 진리이자 궁극적 실재로 여겨지기에 감각적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절대적 진리는 그러한 언어적 감각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떠나 사유 할 수 없기 때문에 열반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갈애의 소멸(taṇhakkhaya)’, ‘조건에 구애되지 않음(Asaṃkhata)’, ‘욕망의 소멸(Virāga)’, ‘(발생의)그침(Nirodha)’, ‘꺼짐(Nibbāna)’ 등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지고선(至高善, summum bonum)’은 살아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살아서 열반 증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분노와 염려 같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의 정신적 건강은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와 미래에서 떠나 오직 현재를 누리고 즐긴다. 그는 이기적 욕망과 증오, 무지, 교만 등 모든 ‘오염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순수하고 온화하며 우주적 사랑과 연민 그리고 이해와 관용이 가득하다. 이는 마치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빛의 사람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열반은 선악과 시비(是非)와 같은 이원론과 상대성의 관념을 초월한다. 심지어 열반을 기술하는데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인 ‘행복(sukha)’도 이원적인 차별을 넘어선 개념이다. 한때 사리붓다가 “열반은 행복이다.”라고 하자, 웃다이(Udāyi)가 물었다. “감각이 없는데 무슨 행복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자 사리붓다는 한 차원 더 높은 철학적 논조로 “감각이 없기 때문에 행복이다.”라고 했다. 열반은 논리와 이성(atakkāvacara)을 넘어서 있다. 사성제에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 고통을 중지시키는 일을 도(道, magga), 곧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고 한다. 극단적인 쾌락이나 금욕의 길을 피하는 것이다. 이 정도는 ‘팔정도(Ariya-Aṭṭhaṅgika-Magga)’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팔정도는 다시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로 요약된다.
윤리적 행위로서의 계는 우주적 ‘사랑과 자비’행이다. 불교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행위로서 두 가지 가르침이 있는데, 하나는 동정심(karuṇa)이요 하나는 지혜(paññā)다. 그러므로 자비와 지혜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두 가지 특질이다. 이러한 계는 정언(正言), 정업(正業), 정명(正命)에 해당한다. 정(定)은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며, 혜(慧)는 정견(正見), 정사(正思)에 해당한다. 여기서 팔정도의 마지막 단계인 선정(禪定)은 아주 중요하다. 열반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4 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는 욕망이나 근심 같은 것을 버리고, 기쁨과 평온의 심리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로는 모든 지적 활동을 중지하고 평온과 마음의 집중을 유지하면서 기쁨과 행복감을 느낀다. 세 번째 단계로는 행복감이 마음 가득한 상태에서 적극적인 감각인 기쁨의 느낌도 사라진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의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평정심과 각성의 단계만이 남는다. 혜(慧)는 잘못된 견해로 인한 집착을 버리는 정견과 참된 지혜를 생각하는 정사를 말한다. 이와 같이 사성제에 입각한 팔정도는 궁극적인 실재 곧 열반을 증득하는 가장 높은 지혜의 길이 된다.
2. 선불교의 기본적 가르침
1) 선(禪)의 특징?
근 현대의 인물 가운데서 서양에 선불교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가장 권위 있는 사상가 중의 하나는 스즈키(Daisetz. T. Suzuki)다. 그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서문을 쓴 책, 「선불교 개론」에서 선이란 무엇이며, 선은 허무주의인가를 묻고 답하며, 비논리적인 선, 더 높은 긍정으로서의 선, 실천적 선, 깨달음 그리고 공안(公案)과 명상과 수도생활을 논한다. 이 책에서 스즈키는 선을 논리나 분석으로 이해되는 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논리는 사고의 정반대를 다루는 이원론적 성격을 띤다면, 선은 전체적인 마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은 불가피하게 신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선은 분석적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나 성스러운 텍스트나 상징체계를 근간으로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선을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스즈끼는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면서, 선은 단지 ‘길’을 안내해 줄 뿐이며, 경전에 있는 모든 불자들의 가르침은 지성의 먼지를 닦아내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이다. 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인식론과 유사한 구조적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선은 또 허무주의(nihilism)도 아니다. 다만 선은 어떤 확고한 단정이나 영원한 긍정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은 종교인가라는 물음에 스즈끼는 답한다. 엄격히 말해서 신을 예배한다든가 하는 의례행위를 하지 않기에 종교는 아니라고 말한다. 더구나 사후에 누군가 돌봐주어야 할 영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은 교리나 모든 종교적 부담에서 자유롭다. 그런 점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선이 추구하는 것은 부정을 통한 더 높은 차원의 대립이 없는 긍정이다. 그런 점에서 선에서는 신이 있다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선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그러한 신은 없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어떠한 단정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선불교 사원의 불상마저도 돌이나 나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철학도 종교도 아니다. 다만 선은 개념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요소와 직결 된다는 점에서 근원적이고 창조적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지침은 돈오(頓悟)에 입각한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그 어떤 외형에서가 아니라, 누구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실재로서의 불성(佛性), 곧 불심(佛心)의 정체를 곧 바로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모든 형태를 넘어서 있는 자신의 본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 깨달음의 수행과 견성성불
선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원오심요』(圓悟心要)에 의하면, 깨달음을 위한 참선수행의 모범과 방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는 조사선(祖師禪)에 의한 깨달음을 위해 발심(發心)과 학도(學道), 오입(悟入)과 수행 방편을 말하고 있는데, 이치적으로 반드시 거치게 되는 ‘이수돈오(理須頓悟)’와 현실적으로 점진적 수행을 필요로 하는 ‘사요점수(事要漸修)’를 말하고 있다. 이때 말하는 돈오점수의 근본 내용은 직지인심을 통한 견성성불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밝은 마음으로 근본에 이른다.(明心達本)’고도 한다. 이를 위한 수행으로서 다양한 화두(話頭)를 내세워 연기공성(緣起空性)에 입각한 본래청정심을 획득하는, 이른바 담적응연(湛寂凝然)의 경지에 도달하는 현성공안(公案)의 방편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수행의 방편의 목적은 미망(迷妄)을 벗어나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사(無事), 무위(無爲), 무분별(無分別)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해탈이요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는 물론 초기불교의 수행법으로서 팔정도의 정념(正念)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사념처(四念處, cattāro-satipaṭṭhānā) 수행과 같은 방편도 있다. 신수심법(身受心法)으로 요약되는 사념처 수행이 관(觀)을 뜻하는 위파사나(Vipaśyanā, 慧)와 고요한 삼매(Samādhi)를 목적으로 하는 사마타(定)로 발전했지만, 이는 초기 불교 경전인 니까야와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에 이미 잘 나와 있는 것으로, 각각 수행법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니까야 문헌에서는 사념처를 통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깨달아 아라한의 궁극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에, 구사론에서는 궁극적 경지에 이른다는 표현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관(止觀)의 명상적 수행법이 후에 선불교의 화두와 같은 신비적인 그러나 꼭 신비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견성성불의 길을 열어간 것임은 틀림없다.
중국 당나라 말기에 와서 중국 선의 한 형태로서 나타난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조주(趙州)나 임제(臨濟)에 의해 참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대혜(大慧)때에 널리 성행한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선불교와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모든 과정이 오직 견성성불의 가르침일 뿐이다. 여기서도 공안은 어디까지나 해탈과 열반 증득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목적은 물론 아니다.
3) 궁극적 자유로서의 열반
선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영원한 자유다. 그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으로서 좌선, 공안 등과 같은 다양한 지침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 모든 대안들도 모두 에고(ego)를 벗어나서 전체적인 우주의식을 갖게 되는 일과 연결되고 있다. 일개 개인의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전체적인 우주의식을 가지게 되면 결국 선 수행의 결과도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깨달음이 결국 자비와 연민의 보살행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인류 평화를 위한 공존의 윤리와도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궁극적 자유로서 열반을 말하자면, 살아서 얻는 유여열반(有餘涅槃)과 죽음 그 이후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인류 공동 사회의 차원에서 볼 때, 유여열반의 모습이 더욱 중요하다. 유여열반은 자타불이의 자유로운 공존의 세계를 스스로 도모하기(Self-dependent) 때문이다. 이 유여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열반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멸도입멸(滅度入滅)’로서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상태다. 이는 궁극적인 최고의 경지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의 4가지 덕목이다. 견성성불을 통한 열반의 증득은 생사의 문제를 초월한 일체무애(一切無碍)의 경지에 들게 할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처한 온갖 위기와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인류 평화와 공존의 지혜를 얻게 해 준다.
이슬람 신비사상과 불교 3
IV. 이슬람과 불교 신비주의의 접점들
어느 것이나 비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객관성을 담보하기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비교를 통해 감추어진 부분이 더 잘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이슬람과 불교의 비교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유일신 사상과 무신론 사상이 처음부터 유사성이나 일치성을 찾는 일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신비주의 사상을 고려해 본다는 점에서는 상당부분 구조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에서 그 비교가 가능할만한 부분들을 몇 가지 개념으로 선별적으로 정리하여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1. 정화(淨化)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과 불교는 모두 인간의 오염된 부분을 정화시키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영혼은 신 앞에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mahabba)과 오염된 자아의 소멸(fanā)을 중요한 수행의 요소로 삼는다. 예컨대, ‘생명의 정화(vita purgativa)’를 통한 ‘내적 삶(inner life)’의 강조다. 이는 불교 또한 공(空) 사상에 입각하여 무아(無我)를 논하면서 철저한 자기 비움의 길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수피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행도 바로 정화의 의식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수피 춤이다. 수피 춤의 수행도 이슬람학자 쉼멜이 앞서 말한 것처럼, 무지의 베일을 벗고 신의 원초적 빛으로 가득한 ‘신비한 연합’을 이루어 사랑과 지혜가 가득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점에서는 불교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과의 연합’에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에고에 입각한 무지를 떨어내는 정화의 노력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수행 방법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2. 신인합일 사상과 일원론
이슬람 신비주의에서 신과의 합일을 말할 때, 거기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쉼멜의 지적처럼, ‘무한성의 신비주의’와 ‘인격성의 신비주의’의 두 차원이다. 이 때 전자의 경우는 상카라의 불이론(不二論)과 같은 고도의 순수한 일원론적 사상을 전개하는 것이다. 불교 신비주의도 바로 일원론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때,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예컨대 궁극적 실재를 ‘열반’이라고 한다면, 무아를 통한 열반의 증득이 곧 우주적 합일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양자가 모두 ‘모든 존재를 넘어선 존재, 혹은 심지어 무(not-Being)’로도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한한 사고의 범주로 설명 될 수 없는 무시간적, 무공간적인 절대적 존재로서의 유일 실재(Only Reality)와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나사피가 당시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거부하고 일원론을 주장한 이유는 세계에 오직 유일한 존재만이 있고, 그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신이라는 존재 이외에 어떤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면, 각 존재는 의존적이거나 분리되게 된다. 그러나 신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유일한 것이라면 둘이 될 수 없고,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있어 왔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늘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한 “신(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말을 “신 이외에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과 존재는 동일한 개념이 된다. 이것은 범신론적 주장과도 흡사하다. 나사피에게서 신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자면 중중무진 연기하여 발생하는 법계, 그 자체를 나사피는 하나의 유일한 존재인 신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3. 빛(신성)과 불성(佛性)
이슬람 신비사상가 나사피는 지적 통찰력을 중시했는데, 사랑이 지적 통찰의 활동을 돕는다고 했다.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승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성의 빛이 예리하게 빛난다 해도, 사랑의 불빛은 훨씬 더 예리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불빛은 지성의 빛과 결합하여 ‘빛 위의 빛’이 된다. 그리하여 그에게 사랑의 불빛은 이기심을 소멸시키는 신비로운 힘이 된다. 그런데 이 빛은 사랑과 지성의 빛이자 동시에 영혼의 빛이다. 영혼의 빛은 ‘우주를 하나의 전체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신비적 지혜(esoteric wisdom)’의 빛이다. 그렇다면 이 영혼의 빛은 곧 불교의 불성(佛性)과도 비교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인식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전체적 시각, 그것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를 바라보는 붓다의 눈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신과 세계와 공즉시색
나사피는 앞서 보았듯이, 세계를 일원론의 시각에서 보면서도 ‘불의 일원론’과 ‘빛의 일원론’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불의 일원론에서는 어리석음과 과오가 소멸되고 그 자신도 소멸된다. 불은 문제가 되는 것을 소멸시킨 후, 그 자체도 소멸시킨다. 한편 빛의 일원론에 도달한 사람은 그가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은 존재를 소멸시키는 반면에, 빛은 존재를 존재하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신과 세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도 있다. 불의 일원론자들은 세계가 그들 자신을 포함하여 단지 ‘관념’과 ‘외형’에 불과 할 뿐이라고 본다. 마치 거울에 비쳐진 형상 같은 이미지로서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사피는 참된 존재인 신의 존재는 ‘무의 존재’로 나타나며, 존재로서 드러난 ‘무-존재’라고 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신을 통하여 ‘존재’하고, 신은 세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또한 신은 세계의 실재이며 세계는 신의 형태다. 이 점에서 세계와 신은 하나의 몸통을 이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공(空)’과 ‘색(色)’이 하나로 통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원리와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나사피에 의하면 신이 현존하지 않는 세계에는 어떤 원자(原子)도 있을 수 없다. 실재 없는 관념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사피의 일원론적 실재로서의 신의 존재는 불교에서 마치 ‘공(空)’의 실재를 연상케 한다. 공은 드러나지 않지만, 오히려 ‘공’ 속에서 만물이 드러나는 원리와도 같다. 마치 유식학(唯識學)의 무위법(無爲法)에서 말하는 바, ‘허공무위(虛空無爲)’처럼, 진여(眞如)가 허공처럼 무애하고 두루 편재한 모습일 것이다. 색 없는 공이 없고, 공 없는 색이 없듯이, 신 없는 세계 없고, 세계 없는 신과 같은 구조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사피는 신을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존재의 차원으로만 이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우주 순환론과 윤회론 : 하강과 상승
나사피에 의하면, 모든 지상의 존재요소의 흐름에는 4개의 웅덩이(ḥawḍ), 즉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영역을 거치면서 영원히 순환 한다. 이 순환에는 시작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지상의 순환주기(광물질, 식물, 동물, 인간) 이 외에 바깥 세계의 영역이 또 있다. 지상 세계와 바깥 세계 영역 사이에 대한 나사피의 우주관은 한 마디로 윤회론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물의 단계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 기초단계의 ‘기초적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식물에는 ‘영혼’이, 동물에는 ‘이성(理性)’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영혼이 광물단계에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나사피에 따르면 인간은 소우주다. 우주는 ‘빅 맨’이요 인간은 ‘리틀 맨’이다. 최상(最上)의 천체는 모든 천체를 포괄하며, 전 우주는 ‘빅 맨’의 껍질이다. 그리고 12궁의 별자리는 12종류의 동물의 힘에 비유하고, 10개의 인식 감각 기관을 내부와 외부 각각 5개의 인식으로 분류한다. 외부 인식은 상식, 상상, 추리, 기억, 조합 능력이다. 그리고 나머지 원인과 실행이라는 두 개의 동인(動因) 감각이 있다. 또한 칠층 천(天)은 7개의 내장에 비유된다. 위, 십이지장, 공장, 회장, 맹장, 결장, 직장이다. 7개의 행성은 인간의 7개의 기관으로 뇌, 폐, 심장, 간, 신장, 방광, 비장에 해당한다. 이처럼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소우주가 된다. 이는 마치 중국에서 음양오행으로 인간을 소우주에 비유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내용들이 불교의 우주론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불교 유식학(唯識學)의 인식론에서 오근(五根)과 오경(五境)을 말하는 것이라든가, 원인과 실행이라는 인과관계는 유사성을 지닌다. 특히 인간의 영혼 속에 전 우주가 담겨 있다는 나사피의 생각은 ‘일체유심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나사피가 말하는 지옥이나 천국 개념도 마찬가지다.
나사피에 의하면, 우주의 순환에 있어서 지상적인 모든 것들이 인간을 거쳐 천체의 영역에 이르는 오직 하나의 단선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처음에 천체의 영역인 ‘원-이성(原-理性)’으로부터 출발하여, 지상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상승하는 순환구조를 이룬다. 그 순환과정에서 ‘상승적 윤회’는 광물 형태의 영혼을 벗어버리고 식물, 동물, 인간, 천사의 단계로 새로운 몸을 갈아입는 것이고, ‘하강적 윤회’는 그와 반대의 단계를 거친다. 예컨대, 인간이 동물의 단계로 하가하여 변형 될 때는 그 순간 개미와 같은 기질이 지배적이면 개미로, 혹은 쥐로 변형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육도윤회(六度輪廻)를 말하는 것과 흡사하지만 성격은 좀 다르다.
나사피에게서 인간은 창조의 정점이며 동시에 결함을 지닌 신적인 존재다. 그래서 윤회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정점으로서의 인간은 광물질에서 천상의 영역까지 7단계로 구분되는 그의 우주관에서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인간은 이성과 자연, 빛과 어둠 사이에 위치하여,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인간이 이성과 빛을 잃으면 어둠이 되고 지옥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이 7단계의 영역을 넘어설 수 있다. 마치 불교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넘어서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나사피에게 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신과 합일되는 단계다.
6. 완전한 인간과 붓다
이슬람의 신비 수행의 목적은 영적 성취와 완전한 자유다. 수행을 통해 ‘완전한 성취’, ‘완전한 성장’ 그리고 ‘자유’의 획득이다. 이슬람이나 불교를 막론하고 지옥으로 갈 것인가 극락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karma)에 달려있다. 나사피가 말하듯이 인간은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 윤회를 거듭하지만, 일단 완전성을 획득하면 영원한 변화와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해탈의 구조는 불교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사피에게서 마지막 궁극적인 도달점은 ‘만유-정신(All-soul)’과 ‘만유-이성(All-reason)’의 단계다. 그는 만물이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데 그 목적(nihāyat)은 완전성이며, 만물의 끝(ghāyat)은 인간이라는 종(種)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목표는 성숙함과 자유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사랑(‘ishq)’이라고 한다. 이 사랑의 힘으로 천체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사피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실체과 외형 그리고 정신이라는 3가지의 모습과 원시적 발아의 형태와 발달된 형태의 2형태를 취한다고 말한다. 곡물의 씨앗과 같은 가능성의 형태와 완전히 성숙해진 발달된 형태다. 이렇게 하여 존재가 드러나고 연장된 상태를 정신이라 부른다. 이 정신-존재의 발산과 움직임을 신학자들은 ‘주(Lord, rabb)’라고 부른다. 이것은 ‘정신을 아는 자는 주님을 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자신(정신)을 아는 자는 주님을 안다.’는 말과 같다. 주라고 부르는 정신을 아는 단계는 모든 대립의 단계를 넘어, 자유로워지는 단계다. 그러나 감각과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나사피는 ‘자연’적인 것의 미성숙과 ‘우주’의 성숙에 대해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를 꾸란에 비유하고, 각각의 속(屬)을 장(章)에, 종(種)을 구절(句節)로, 그리고 개체를 글자(子)에 비유하면서, 꾸란을 읽거나 들음으로써 세상의 덧없음을 홀연히 깨달아, 책을 덮고 영적 세계로 진입하여,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천국에 이를 것임을 말하고 있다.
V. 결론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과 불교는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다른 입장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신비주의를 말할 때는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세계의 현상적 측면 보다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궁극적 실재를 모두 추구한다는 점이라든가, 인간의 내면을 중시하여 궁극적 실재와의 신비적 합일 또는 연합을 이룬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그 합일의 과정에서는 모두가 내적인 ‘비움’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은 양자의 수행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잘 드러난다. 이슬람에서 ‘파나’라든가 불교 사성제에서의 ‘멸(滅)’이 거기에 해당한다. 특히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가운데서 수피즘은 신학적인 가르침을 담은 교리보다는 신과의 직접적인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선불교가 말하는 불립문자와 견성성불 사상이 상당히 유사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이성이나 감성보다는 신비적 직관을 중시하는 수피즘은 선불교의 직지인심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슬람의 신이 존재자로서 유일하다고 주장하지만 나사피 같은 신비주의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을 세계라고 보고 범신론적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공즉시색의 논리와도 어느 정도 비교 가능한 부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세계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나사피의 주장과 불교의 공 사상과는 분명 거리가 먼 것이기는 하지만, 영혼의 부분을 별도로 논의한다면 신과 세계의 존재 방식이 공즉시색의 구조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슬람 신비주의의 우주론과 윤회 사상은 불교의 우주론이나 윤회 사상과도 흡사한 부분이 많다. 다만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은 상승과 하강하는 단선적 순환 구조 속에서 인간을 중간 단계에 배치하는 것이 불교와 차이점이 있다.
지금까지 동 서양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과 불교 신비주의를 직접적으로 비교한 논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다문화적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슬람은 더 이상 신비주의적 집단이 아니라, 이웃하는 종교일 뿐이다. 불교도 처음에 중국에 들어 왔을 때는 외래 종교였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생활화 되고 토착화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종교인구 가운데 그리스도교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이슬람과 5번째로 종교 인구를 형성하고 있는 불교가 서로 소통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특히 신비주의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자비와 연민’의 정신은 모두가 반드시 이 시대에 함께 공유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 신비주의에서 신은 ‘빛’에 비유되고 사랑은 세계를 움직이는 신의 영혼이다. 빛과 사랑, 그것은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공통요소다. 인간은 서로에게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신의 사랑의 빛을 가진 자로서 혹은 붓다의 자비와 연민을 지닌 자로서 우리는 공존과 상생의 미덕을 발휘하며 평화로운 세계를 함께 일구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필자는 불교의 유식 사상과 이슬람 신비주의의 ‘연합’ 사상을 더욱 연구해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지면서, 본고가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더욱 밝고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