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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국제시장... 현봉학 박사와 흥남철수작전
영화 보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나지만 영화 후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결과를 알고 보는 운동경기 녹화중계처럼 맥빠지는 일이 없는 것처럼 영화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말을 알고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싱거운 일인가? 혹시라도 뒤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즐겨야 할 호기심의 현장 충족 직접 즐겨야될 스릴과 반전 등과, 다음 장면에 대한 기대감 내지 예측 적중의 만족감 각자 나름대로 다를 수 있는 해석... 이런 것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도 시나리오 작가의 각색이나 감독의 해석에 따라 천차만별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영화 국제시장을 본 것이 12월 19일이니 꼭 열흘이 지났다..
옛 정자 파빌리언 블로그에서 모셔온 글이다.
세계 전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의 철수작전의 뒤에 미군은 50만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 등 군수물자를 흥남부두에 쌓아놓고 함포로 포격을 해서 모두 폭파시켜버린다. 탄약과 무기보다는 인간의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주의의 정신이 깔려 있다. 영화의 흥남철수 장면은 정말 긴박한 상황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 다시금 생각케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배를 타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가장은 자식을 구하려고 배에서 내려 가족들과 영영 만나지 못할 길로 들어선다1999년에 나는 현봉학박사와 직접 만나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976년에 선친께서 출간했던 함경도 지역의 기독교의 역사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 '아담, 너는 보았는가'라는 책을1999년에 복간하게 되었는데 복간본의 추천사를 현봉학 박사가 썼고 복간기념회에 현봉학 박사가 축사 겸 강연을 맡게 되어 박사께서 머물고 계시던 호텔에서 강연장까지 차로 모시고 오가는 일을 우리 형제 중에서 내가 맡게 되었던 것이다 복간기념회 당시 현박사는 미국에서 은퇴한 뒤 마지막 정열을 조국의 후진 양성에 쏟기로 하고 수원의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 자리 잡으신 것이었다. 10만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포니 대령과 현봉학 박사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57년 내가 사령부 참모부장이던 시절에 수석고문으로서 함께 일해 당시 인원(T/O)과 장비(T/E) 등 해병대의 기반을 수립했다. 내가 만난 포니 대령은 우리 해병을 너무나 사랑했고 오늘날의 해병대가 있게 한 은인이다. 그는 우리 해병대에게 ‘포항(浦項)기지’라는 큰 선물을 남겨주어 지금까지 세계최고 최상의 상륙전 모기지로 활용하게 되었다. 50년 흥남철수작전 때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포니 대령은 피난민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사령부 수석고문으로 2년 동안 많은 일을 한 그는 귀국해 장군으로 전역하였으며 1965년 사망했다. 2005년 5월 거제도에서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에 애드워드 포니 대령과 알몬드 장군의 손자들과 현봉학 씨도 참석해 더욱 의미 있는 행사가 되었다. 그의 증손자 벤 포니(Ben Forney, 24세)가 지금 전남 목포시 영흥중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09년 7월 대학을 졸업하자 한미교육위원단에 한국 교사지원을 했다. 벤 포니는 어릴 때는 증조부에 대해 전혀 몰랐다. 회계사였던 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포니(그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음, 74세)는 아들 네드(Ned)와 손자 벤(Ben)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벤 포니는 “아마도 해병대 장교였던 증조부가 참전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다. 벤 포니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증조부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역사 교사인 그의 아버지 네드 포니가 1990년대 중반에 교원연수 프로그램으로 3주간 한국에 왔을 때, 해병대 통역관으로 흥남철수작전에서 증조부와 함께 일했던 현봉학 씨로부터 “포니 대령의 손자냐?”라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손자(네드)와 증손자(벤)는 그렇게 포니 대령의 미담을 알게 됐다. 2000년 미국을 방문한 현 박사와 포니 장군의 후손들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포니 묘역을 찾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그 뒤 현 박사가 ’07년 세상을 뜬 뒤에도 양 가족의 ‘대(代)를 이은 우정’은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도하 일간지에 벤 포니가 그의 증조부가 구출했던 흥남철수의 피난민들과 기막힌 상봉을 하는 소식이 소개돼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한국의 모세’ 현봉학 해병대 통역관 김성은 부대장은 그가 현시학 해군 소령의 친형이라는 사실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그에게 오랜 숙원을 설명했다. 미 25사단에 가서 신형 BAR자동소총 및 병기와 탄약 등 군수품을 확보해 오라는 부탁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현 씨는 현금을 가득 담은 가방을 든 장교 한 명과 부대를 나섰고 하루 뒤에는 많은 BAR 등 병기와 탄약과 군수품 수십 상자를 트럭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현봉학 박사는 1950년 11월 해병대사령부가 강원도 고성 지구의 고저에 주둔하고 있을 때, 참모장 김성은 대령 때문에 해병대에 다시 종군했다. 거기서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만난 현 씨가 리치먼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의대에서 공부했다는 말에, 군단장이 깜짝 놀라며 “내 고향도 바로 버지니아주의 루레이(Luray)”라며 매우 반가워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알몬드 장군은 한국 해병대 통역관이던 그를 신현준 사령관에게 간청하여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 하였다. ‘포니 로(Forney 路)’ 명명식 “10만여 명의 군 병력과 9만 8천여 명의 피난민, 1만 7천여 대의 차량과 수십만 톤의 화물을 철수시킨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군사적 승리였다.”
영화를 처음 보고 위의 생각대로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국제시장'을 보시라고 권유만 하고 영화에 대한 힌트만 살짝 주고 했는데 문득 영화 후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니라도 이미 수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본 데다가 많은 후기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굳이 내가 먹어왔던 위의 생각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 이 영화에 한해서는 미리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보더라도 그 감동의 정도가 반감되는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은 함흥에서 흥남철수때 미군 LST를 타고 거제도에 상륙, 부산으로 나와 오랜 기간 부산에서 살았던 우리 가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영화관에 들어갈 때까지도 흥남철수로부터 시작되는 내용인 줄 전혀 모르고 그냥 내가 자란 부산, 그것도 학창시절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고 일주일이면 서너 번은 지나다니던 국제시장이 영화의 제목이니 거기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 스토리가 되는 영화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호기심 충족 삼아 갔던 것인데 이런 영화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순간을 주인공 덕수 한 사람의 어깨에 짊어지게 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과 같은 감회를 가지게 하는 영화 동 시대를 조금 늦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사건의 하나하나가 꼭 나의 아버지 세대의 고난, 나의 형님 세대의 어려움, 나의 주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한 좌절을 딛고 일어난 이야기들과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로 가득 메워진 이야기여서 그 고난과 진지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집중하게 하는 독특한 연출이어서 감동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다가왔던 것이다 영화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부터 시작된다.
2차 대전때의 덩커르크 철수작전 등과 더불어 계 전사상 3대 철수작전의 하나라는 흥남철수작전... 압록강까지 일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눈앞에 둔 통일의 기회를 놓치고 혹한의 개마고원, 장진호전투에서 밀려 함흥, 흥남 지역에 고립되게 되었다. 10만의 미군과 국군이 철수하면서 그대로 남으면 공산군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10만의 기독교인을 비롯한 민간인을 배에 싣고 철수한 것이 바로 흥남철수작전이다.
말로 하면 간단한 이 이야기가 각 가정마다 들여다 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함경도민이 죽음을 피해 거제도를 거쳐 부산으로, 서울로 오게 되고 ;가정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극적인 삶들을 살아오게 되는 것이다. 흥남철수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현봉학 박사의 스토리이다. 영화 초반 함상에서 미 10군단장 Almond 소장에게 피난민을 같이 태워갈 것을 간청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그 전쟁의 와중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기독교인인 나의 눈으로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있던 버지니아 주립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귀국해서 세브란스 임상병리실을 개설, 의사와 강의를 겸하여 근무하던 중 6.25가 발발하였다. 피난지 대구에서 황성수 국회부의장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일하고 싶다고 하여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소개를 받아 배속을 받은 것이 미 육군 25사단의 통역이었다
내가 섬기는 신일교회(신당동제1교회란 의미)의 원로장로님 중에 해병대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고(故) 김성은 장로님이 계셨다. 우리 부부가 함흥으로부터 흥남철수작전 때 월남한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우리 부부를 각별하게 대해주시기도 하셨는데 그런 인연으로 우리 부부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회고록 속에 기록해 놓으셨다. 그 분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이자 회고록에 실려 있는 현봉학 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해병 김성은 부대는 피난 수도 부산을 지척에 둔 마산과 고성사이의 진동리전투(1950. 8월 초)승리로 국군 초유의 전 부대원 일계급 특진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8월 17일의 통영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해병대는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게 된다부산에 온 현봉학박사가 마산에 있던 미 25사단에 가기 위한 교통수단이 없어서 마침 이용했던 것이 해군에서 해병대로 지원해서 마산으로 가던 백남표소령의 차편이었다 그런데 마산의 미 25사단을 지나친 것이었다.
미 25사단으로 돌아가자는 현박사의 요구에 백소령은 더 중요한 곳이 있다고 현박사를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데리고 갔는데 그곳이 바로진동리 작전중이던 김성은 부대였다. 미 25사단으로 보내 달라던 현박사의 요구에 반대로 김성은 부대장마저 총을 뽑아들고 해병대에 남아서 도와달라고 하고 마침 현박사의 세브란스 동문인 김성은 부대 소속 오원선 군의관까지 만나 설득당한 끝에 김성은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진동리전투, 통영상륙작전에 참여하게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이 이루어진 후 현박사는 모교 세브란스 병원에 복귀했으나 김성은 대령과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의요청으로 다시 통역으로 복귀, 강원도 고성에서 김성은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1950년 11월 15일 함흥에 주둔 중이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소장이 고성에 있는 한국해병대를 시찰하기 위하여 함흥에서 고성까지 날아왔다 뒤돌아보면 10만이나 되는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역사적인 만남이었지만 거기 있던 누구도그렇게 중요하고귀중한 만남이리라고는 꿈에도생각치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의 인도가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만일 현봉학박사가 원래의 명령대로 미 25사단에 배속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25사단을 따라 진주, 군산, 개성, 평안도 안주를 잇는 경로로 움직였을 것이고 그가 자란 함흥이나 흥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휴전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흥남에서는 10만의 미군과 국군만 철수하고 남은 민간인들은 모두 총살 아니면 아오지 탄광행이 되었을 것이다.
고성에서의 만남을;故 김성은 장관 회고록에서 인용해본다(인용시작) 그때 통역을 맡은 현봉학씨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버지니아주의 독특한 악센트를 알아 들은 알몬드 군단장이 놀랐다"어디에서 그런 영어를 배웠느냐?"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의 버지니아 주립대 의대 출신이다. 그리고 내 고향이 함흥이다." 현봉학씨가 대답하자 알몬드 소장은 기뻐하며 덥석 껴안았다." 정말 반갑다. 내 고향. 리치몬드에서 공부한 함흥 출신 한국인을 여기서 만나다니....." 그러더니 신현준 사령관과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현을 내놓겠느냐?" 우리도 해병대 사람이 이왕이면 미 군단 사령부에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아서 "좋다" 하고 흔쾌히 응했다. 이것이 함흥의 피난민 10만 명을 철수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현봉학씨와 알몬드 군단장의 만남이었다.
이렇게 해서 현봉학 박사는 미군의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받았고 그로부터 한달 후 영화에서 보듯이 10만 명 피난민의 생명을 구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흥남 철수의 장면은 몇 장의 사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 가족과 현봉학박사의 기념사진. 아래줄 왼쪽에서 세번 째가 현봉학박사, 네번 째가 선친 이창승장로 그 오른 쪽이 큰 형님의 장인인 진도선장로평통 자문회의 전국 부의장 역임, 거제고등학교 설립자다. 현박사의 왼쪽이 두번 째가 큰 형님 이장영 전 거제 성지원 대표이사, 왼쪽 끝이 매형인 역촌성결교회 주명훈장로, 그 뒤가 작은 형님인 이순영 동희정공 대표이사 뒷줄 오른 쪽 끝이 필자이다.) 흥남철수 작전에서의 결정적인 공로에도 책이 초간된 1976년 당시만 하더라도 현봉학박사의 이름은국내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아버지의 책에 흥남철수작전과 현박사의 이야기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쓰여 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함흥중앙교회(구 신창리교회) 장로였던 조부와 집사였던 부친 함흥 영생고녀의 교목이었던 현박사의 부친 현원국 목사와 예수교장로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했던 모친 신애균권사도 당시 함흥중앙교회 교인인데다가 바로 이웃집에 살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부친은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전해 들었으리라 하긴 어릴 때의 기억으로 현박사의 형님이자 이화여대 문리대학장이었던 현영학박사가 부산 우리 집에도 몇 차례 들렀던 일도 있었으니 꽤나 가까운 관계였으리라 흥남철수 당시 나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미군 LST를 탔다 부친더러 큰 형님 정도만 데리고 잠시 피해 있다가 오라는 조부의 말씀대로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금은 이미 땅속에 누운 몸이었을게다.
아니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독재 세습왕조에서 저 요덕 수용소에서 ?주림으로, 학대로 어려운 나날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친가쪽 거의 모든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외가 쪽은 이모들만 내려오고 외삼촌들은 내려오지 못했다어머니는 살아계실 때에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속으로 모든 슬픔을 삼켰으리라... 나처럼 어머니의 태중에서 미군 LST를 탔던 나의 아내도 바로 오빠들과 언니, 삼촌들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이다 18년을 우리와 같이 사셨던 장모님은1983년의 '이산가족찾기' 때도 '아마 그 애들은 다 못 살았을 끼다' 라는 말로 애써 눈물을 감추곤 하셨다 큰 누님의 시모 되시는, 1974년 용신봉사상을 받으신 옥수복 권사님도 하늘나라에 가시기 전까지 아침 저녁으로 식사 기도 때마다, 그리고 가정예배의 시간마다 이북에 두고 온 딸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부산에서 우리 가족이 다니던 교회도 함경도 피난민들이 세운 교회라 많은 이산가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서울의 친척들이 다니던 교회 역시 피나민이 세운 교회라 마찬가지였다 이산가족의 방송을 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2001년 미국으로 돌아간 현봉학박사는 2007년 11월 2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생을 보면서 실로 한 인간을 통해서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우연의 일치일까? 결과적으로 현봉학박사를 흥남에 있게 한 김성은 장관도 같은 해인 2007년 5월 15일에 소천하셨다.
그리고 2014년 8월 '귀신잡는 해병'의 주인공 김성은장관이 전쟁기념관에서 8월의 호국인물에 선정된 데 이어 12월에는 국가보훈처가 현봉학박사를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흥남철수는 그 유명한 가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를 낳았는데 바람찬 흥남부두나 국제시장, 영도다리 난간은 우리가족을 포함해서 많은 실향민들의 무대가 되었는데 이번에 영화를 통하여다시 한번역사의 무대에 오른 셈이 되었다 (은방울자매의 '굳세어라 금순이를 올린다) 또 하나 내 기억에 드라마의 제목은 잊었지만 1960년~61년 쯤 즐겨 듣던 라디오 드라마는 '함경도 최또순이를 모르오?' 라는 유명한 억척 피난민 처녀의 이야기를 풀어내었고 이어 도금봉을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는데 '또순이'라는 이름은 지금에도 생활력 강한 아가씨나 아낙네들을 이르는 말로 굳어진 것이다. - 옛 정자 파빌리언 블로그에서 모셔온 글.
또 한사람은 ‘한국판 모세’ 현봉학(玄鳳學) 박사다. 그는 내 해사 동기생 현시학 제독의 형님이다. 흥남철수 때 10만여 명의 피난민 후송에 큰 역할을 해 붙여진 별명이다. 그가 진동리전투의 김성은 부대장 통역관이 된 것은 순전히 강압이었다. 미 25사단장 킨(Kean) 장군 통역관으로 부임하던 그를 해병대 백남표 소령이 붙잡아 왔다. 통역이 없던 김성은 부대장을 위해 백 소령이 현 씨가 통역요원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현 박사는 미국 리치먼드의 버지니아 주립의대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1950년 3월 귀국해 모교 세브란스의대에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한 그는 전쟁이 나자 자신이 터득한 영어로 조국에 봉사할 길을 찾던 중 황성수(黃聖秀) 국회부의장 소개로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신 장관은 이 기특한 청년을 통역관으로 미 25사단장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후 장관추천서를 주어 현지에 부임시키던 상태였다. 그렇게 김성은 부대로 온 현봉학 씨는 해병대 장비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현 박사의 고향인 함흥은 당시 중공군 포위망에 갇혀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미 해병1사단과 한국 해병대,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 미 육군3사단과 7사단 등 군 병력만 10만여 명이 되었다. 거기에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둣가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공산당 색출에 도움을 준 이들은 적치(敵治)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보복을 당할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찾아와 애타게 매달리는 고향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민사고문 현봉학 씨는 애끓는 심정으로 알몬드 군단장에게 건의했으나 여건은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가 뜻밖에 해결되었다.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대 포니 대령은 현 씨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함정 탑재(搭載)의 기술적 대안(代案)을 제시해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싣고 떠나려는 현 씨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떠날 시간이 임박하자 그는 빠진 사람을 살피려 시내로 들어갔다. 미국 신부와 함께 경찰서 유치장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피난민 30여 명을 트럭에 태우고 아슬아슬하게 배를 탔다. 구출된 피난민들은 현 씨를 ‘한국의 모세’라고 불렀다. 또 다른 별명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현봉학 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욱정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버지니아 의대를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은 저명한 혈액병리학자다. 그가 아주대학에 있을 때 신현준 초대사령관의 부인 함혜룡 여사가 치료를 받은 인연이 있다. 지난 ’07년 11월 25일 자신이 근무했던 미 뉴저지주의 뮐렌버그 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형제로 맏형은 이대 문과대 학장을 지낸 현영학 교수, 두 동생은 문필가 피터 현과 내 해사 동기생 현시학 제독이 있다.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돕고 구하는 현봉학과 포니와 같은 사람들은 진정한 휴머니스트(Humanist)로 칭송 받을 만하다. 이들 중에 특히 포니 대령은 내 좋은 친구였다. 이번에 포니의 유족들인 그의 아들 에드워드 포니(Edward W. Forney)와 부인 유본 포니(Yvonne M. Forney) 그리고 증손자 벤 포니(Ben E. Forney)가 ‘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반가웠다. 나는 포니 대령께서 한국 해병대에 기여한 공적에 보답하는 뜻으로 포항 해병대 제1사단에 연락하여 ‘포니 로(Forney Road 路)’ 명명식을 가짐으로써 이 분을 우리 해병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행사를 주관한 1사단장 이영주 소장은 2010년 11월 4일 명명식을 통해 누란의 위기에서 피란민들을 구한 그의 애민정신을 기리고 해병대 1사단 주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포니 대령의 한국사랑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 또한 회고사에서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애드워드 포니 대령이 흥남철수작전에서 수많은 피란민의 생명을 구하고, 당시 포항에 있던 미 해병대 3항공사단 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물려 받아 전략의 맥을 이어 가야 한다’고 건의해 해병대 1사단이 포항 주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으며, 정전 후에도 2년간 한국 해병대 수석 군사고문관으로 근무하면서 해병대 교육에 관심을 갖고 인재 양성에 헌신한 그의 삶을 회상하며 공적을 기렸다.
이날 명명식에서 유족들에게 감사패가 전달되었고, 기념석(記念石) 문구에는 포니 대령께서 우리 해병대를 포항기지에 주둔하도록 한 업적도 기록되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처럼 흥남철수작전에서 보인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의 피난민 구출이라는 박애(博愛)정신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가슴에 남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저서 『한국전쟁』에서 흥남대탈출작전을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