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드리워진 나무 그늘 아래 연분홍빛 항아리를 안고 주름치마를 펼친 듯한 광릉요강꽃. 5월께 피는 이 꽃은 경기도 광릉의 국립수목원을 대표하는 난초과(科) 식물이다. 하지만 정작 광릉수목원에선 이 꽃을 볼 수 없다.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부.산림청이 지정한 멸종위기 식물인 만큼 귀하기는 할 테지만 설마 이 정도일까 싶다.
수목원도 사실 이 문제로 속병을 앓고 있다. 연구용으로 보유 중인 두세 포기가 전부다. 수목원 관계자는 "지난해 인근 자생지에서 다섯 포기를 찾아냈지만 이미 도둑맞았다. 올 들어 다른 곳에서 세 포기를 찾았지만 그대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섣불리 옮겼다가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인공 번식 방법을 찾지 못했고 전국적으로도 50포기 미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940년대 경기도 광릉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전국 10여곳에서 많으면 200~300포기씩 발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1년 내 사라졌다.
깊은 산 속에 임도가 뚫리면서 자생지가 훼손되고, 서식지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캐가기 때문이다. 개체수 자체가 줄면 꽃가루받이가 안돼 번식률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멀리 떨어진 꽃에서 꽃가루를 받아야 열매가 열리는 딴꽃가루받이 식물이기 때문이다.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은 "70~80포기가 꽃을 피우더라도 열매가 열리는 것은 한두 포기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개체수가 자꾸만 줄어드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적당한 곰팡이와 공생관계를 맺어야 씨앗이 싹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열매 하나에는 수십만개의 씨앗이 먼지처럼 들어있는데 씨앗이 너무 작아 싹트는 데 필요한 양분을 다 갖추지 못한다. 곰팡이가 씨앗 내부로 침투해 영양분을 서로 주고 받아야 싹이 튼다. 균근(菌根)이라는 식물과 곰팡이의 공생관계를 7년 정도 지속한 뒤 꽃이 핀다.
옮겨 심으면 쉬 죽는 데도 이유가 있다. 토양의 산도(pH)나 영양분, 태양 빛 등 조건이 약간만 달라져도 공생의 균형이 깨진다. 자칫 잘못하면 곰팡이가 난초를 삼켜버린다.
이처럼 민감한 생육조건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둬도 자연에서 번식이 쉽지 않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지구온난화나 기후 변화의 영향이 더 심해지면 실제로 멸종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광릉수목원에서도 종의 확실한 보존을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수목원 김성식 연구원은 "난초의 생장점을 떼내 키우는 시험관 내 조직 배양에는 성공했으나 토양에 옮겨 심는 과정에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현진오 소장은 "현재 상황에서는 한 개체라도 자생지에 있는 것을 채취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함부로 옮겨 심으면 해당 개체를 죽일 뿐 아니라 자생지에서 자연 번식할 기회도 빼앗는 꼴이라는 것이다. 서울 강남서초환경운동연합 이재석 의장은 "멸종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공배양법 확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최근 광릉요강꽃과 같은 개불알꽃속(屬, 복주머니난 종류)의 난초 몇종을 인공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강찬수 기자<envirepo@joongang.co.kr>
***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중국 밀수품"
◆ 진실과 거짓=봄철 서울 종로5가나 양재동 꽃시장 등에서 개불알꽃, 심지어 광릉요강꽃이 눈에 띄기도 한다는데 정말 인공 번식이 안 될까.
이에 대해 이재석 의장은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몰래 캐왔거나 중국에서 농산물로 위장해 수입된 야생란"이라며 "이를 방치할 경우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개불알꽃 종류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따라 배양된 것이라는 증명이 없으면 국제 거래 자체가 불가능하다.
경인지방환경청 담당자는 "수출입 때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국제적 멸종위기종 식물 가운데 95% 이상이 난초류"라며 "정식 수출입되는 것은 모두 인공 증식이 가능한 풍란 등이고 개불알꽃 종류는 없다"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 난초 시장의 규모는 연간 20억달러(2조30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12만여종에 이르는 난초 가운데 일부 희귀한 개체는 가격이 2만5000달러에 달한다. 서양에서도 개불알꽃속 난초들은 숙녀의 슬리퍼(Lady's Slipper)로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수전 올린의 책 '난초 도둑'에서는 10년 전 미국 연방 기관원들이 '숙녀의 슬리퍼' 2000포기가 중국에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밀수되는 것을 적발했다고 적고 있다.
2004.09.10 18:39 입력 / 2004.09.11 07: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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