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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새땅 너는 나의 황금나비
2024년 11월 17일 제 964회.
사드배치 결사반대 김천시민 촛불집회
인생은 저마다의 무게와 속도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각자 제 갈길로 흘러가던 우리는 어느 작은 교차로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교차로에서 만난 촛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곳에 모였다.
부쩍 짧아진 낮의 길이와 함께 밤그늘이 벌써 내려와 앉고, 서늘한 바람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갈길 바쁜 여행객들 사이로, 우리들의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다지는 투쟁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반가운 손님들을 기다리는, 영양 만점 생강+대추차와 맛있는 전병..
그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든 촛불 시민들..
따스한 차 한잔의 향기와 온기로 찬바람에 움츠린 몸과 마음을 녹이며, 지난 한주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서로의 정감을 나누면서.. 촛불집회의 시작을 기다린다.
** 집회를 이끄는 김종희 팀장..
작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투쟁의 결기를 담은 구호..
" 전쟁을 반대한다 / 평화에 살자 / 사드뽑고 평화심자 / 투쟁~!! "
** 먼저 가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기리는 묵념,
그리고 민중애국가, 임을위한행진곡 제창.
** 반가운 소식을 전하러 나온 박석민 막내님.
서울에 있는 지인께서 손주의 돐잔치를 하게 되었는데, 돐잡이 결과에 따라 희망하는 단체를 선정하여 향후 10년간 후원을 하겠다고 공언하셨단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석민님이 내놓은 사드팔찌를 2번이나 잡는 바람에, 우리 집회의 최연소 후원자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도대체 그 꼬맹이가 뭘 알고 그랬을까마는..ㅎㅎㅎ.. 이 다음에 꼭 한번 이 집회에 엎고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소식에 모두들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 첫번째 발언자로 나선, 예수살기 백창욱 목사님의 빨치산 이야기.
정지아, 『빨치산의 딸』, 필맥.
" 작가 정지아를 알게 된 건 그의 최근작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서입니다. 나의 그 책을 통해 정지아의 작가적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봤습니다.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 재미있게 쓰다니! 독자들을 마음대로 웃고 울리는 그 솜씨에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그 때 정지아의 처음 작품이 ≪빨치산의 딸≫인 것을 알았지만 굳이 읽을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유는 내 나름 빨치산의 역정을 안다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청년시절 읽었던 빨치산 책들, 이병주의 ≪지리산≫이라든지, 이태의 ≪남부군≫, 또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통해 빨치산의 투쟁역정이 어느 정도 입력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인 소회를 미리 말하자면, 청년시절 읽은 것인지라 세월이 흐르면서 그 생생한 정서는 진즉에 사라졌고 관념만으로 남았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그 놈의 관념. 참으로 몹쓸 놈입니다. 그러다가 페북에서 이범주님이 ≪빨치산의 딸≫에서 인상깊은 대목들을 군데군데 소개했는데, 그 내용들이 주옥같았습니다. 하여 직접 읽어보자 하고, 엊그제 빨치산의 딸을 완독했습니다.
정지아는 이 책을 90년에 발표했습니다. 25살 된 작가 초년생이 첫 작품으로 이런 장엄한 서사를 써 내다니.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닙니다. 작가의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빨치산의 딸≫을 쓰고 난 뒤, 평생 캐내야 할 문학의 금광을 어린 나이에 미흡한 상태로 다 쏟아 붓고 나서 이제 무얼 쓸 거냐고 걱정해 주신 분들이 많았다.”라고.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빨치산의 딸≫은 출간하고 나서 풍파를 겪습니다.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을 걸어서 판금조치를 하고, 출판사의 대표를 구속합니다. 작가도 수배자가 됩니다. 명색이 민주화 대투쟁을 거친 후인 90년에도 한국은 이런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명천지 21세기라는 2024년에도 야만의 정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헌법은 멀쩡합니다. 헌법 21조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집니다. 도대체 이 헌법조항은 뭔가? 장식인가? 우리도 이런 법이 있다고 선전하는 대외용인가? 관념만 몹쓸 놈이 아니라 이 나라 공안들도 참으로 몹쓸 놈들입니다. 그리고 공안의 장난을 묵인하거나 외면하거나 장단 맞추는 기득권 정치세력들. 너희도 똑같은 놈들입니다.
그런 시련을 겪은 후 15년이 지난 2005년에 두 권짜리 복간판이 나왔습니다. 작가는 이 책 성격에 대해 서문과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빨치산의 딸≫은 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거했습니다. 구호 하나, 사용하는 단어 하나라도 당시의 용법대로 쓰려고 노력했다.”라고. 그래서 나는 이 책 제목을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빨치산 투쟁사’라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내 정서를 어떻게 말할까? 책 뒤표지에 유명작가들이 이 책에 대한 평들을 했는데, 김형수의 평이 딱 내 소회입니다. “다 잊혀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 떠내려간 세월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존재의 망각’ 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빨치산의 딸은 말합니다. "이 통렬한 과거사가 우리의 오늘을 만들고 있다! 너무 실감 나서 숨이 막힌다.” 정말 그랬습니다. 숨이 막혀서 한참을 고요히 있었습니다.
아... 빨치산들이여, 나는 이제부터 이렇게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빨치산 동지들을 가장 존경한다고 답할 것입니다. 미제 식민지로 있으면서 그 굴욕을 떨쳐버리려는 의지는 온데간데없는 이 나라의 풍토에서 이 나라의 정통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극한의 고난을 견디면서 미제로부터 조국해방을 위해 관념이 아닌 실제 온 몸을 바쳐 투쟁했던 빨치산이야말로 이 부끄러운 역사에서 그나마 우리가 자긍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했습니다. 일부는 아버지 류혁운 동무의 여정이고 이부는 어머니 이옥자 동무의 여정입니다. 작가는 혁운동무를 그로 칭하고 옥자동무는 그녀로 칭하면서 그와 그녀, 동지들이 겪은 모든 빨치산 투쟁을 사실적으로 전개해 나갑니다. 그 투쟁과정은 사람이 얼마만큼 극한을 견딜 수 있을까를 보여주는 처절한 인생사이기도 합니다.
굶주림, 혹한, 성한 곳 없는 몸,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는 긴장의 생활. 그리고 마침내 산화. 인생 전체로 따지면 길지 않은 세월이라 할 수 있지만 삶의 농도로 따지면 빨치산 생활이 인생의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온 몸과 정신을 바쳐서 역사와 조국이 부여한 가시밭길 운명을 살아냈습니다.
빨치산의 태동은 1948년 여순봉기 때 주도세력인 14연대를 중심으로 한 좌익들이 토벌대 추격에 쫓겨 입산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빨치산의 주무대로 지리산을 가장 많이 회자하지만 그 주변 모든 산이 빨치산의 거점이었습니다. 작가 이름도 빨치산 부모들이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한자씩 따서 정지아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53년 휴전협정을 기화로 빨치산 투쟁은 거의 소멸해갑니다. 최후의 빨치산은 그 뒤에도 존재함을 나타냈지만, 그들이 꿈꾸던 미제로부터의 조국해방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습니다.
북조선과 대치하던 전방 주력부대들이 휴전협정이 되자 빨치산토벌에 전격 투입됨으로 인해 빨치산은 더욱더 고립무원의 처지가 돼 버립니다. 후방보급없는 유격대라는 최악의 악조건에서 해체되지 않고 장장 7-8년을 조국해방 투쟁에 몰두한 것 자체가 세계사 어느 전투에 내놔도 손색없는 놀랄만한 투쟁입니다.
류혁운동무는 철도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혁운의 아버지가 신부 얼굴도 모르는데 일방적으로 혼사를 결정하므로 해서 봉건적 가부장제에 심한 회의를 가지게 되고 방황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좌익이념을 흡수합니다. 그 대목입니다. “너는 잘못된 사회제도의 희생물이다. 좌절하는 대신 그 제도를 개혁하는 데 네 일생을 바쳐라.” 혁운은 한 줄기 빛을 붙잡은 느낌으로 술에 취하는 대신 책에 취해갔습니다. 그리고 혁운은 처음 자신이 붙잡은 이념에 일생을 바칩니다.
혁운의 빨치산 이야기는 57년 봄 전향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작가는 아버지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까봐 조심했을텐데, 혁운은 빨치산에서 혁혁한 투사였습니다. 특히 보급이 떨어져서 부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여러 번 기사회생시켰습니다. 동지들이 소개할 때 ‘그 유명한 혁운동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52년 8월 빨치산이 거의 궤멸단계에 처하자, 지도부는 지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위장자수 전략을 쓰기로 합니다. 그래서 집안배경이 좋은 혁운의 애인 김춘옥을 자수시키기로 하고, 혁운이가 약속장소인 민가까지 호송을 하는데 그만 거기서 경찰에게 포위당하여 혁운도 자수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애인만 자수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빨치산으로 산화할 작정이었는데 그만 일이 어그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당초 의도와는 달리 경찰의 집요한 감시와 미행 속에서 지하조직활동은 무산됩니다. 그리고 믿었던 친구의 배신과 밀고로 체포되고 위장자수가 드러나서 사형언도를 받고, 54년 12월 30일 대법원에서 무기로 형이 확정됩니다. 그리고 57년 봄, 좌익수 전향문제로 떠들썩할 때, 대중을 조직화하겠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전향서를 쓰지만, 정권이 사상범을 얼마나 가혹하게 탄압해 왔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혁운이 겪어야 했을 고통과 좌절을 잘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애인 김춘옥도 빨치산 때는 투철한 전사였지만 완전히 바뀐 환경에서 지하조직건설은커녕, 갇혀 있는 혁운과 헤어지고 그냥 소시민이 됩니다.
옥자동무도 아버지의 일방혼사 결정으로 자신의 꿈을 모두 접은 채 종가집 며느리로 온갖 고생을 하던 중, 좌익활동을 하는 남편 최윤호(최규복의 가명)을 따라 입산합니다. 입산하기 직전 아이를 출산했는데 도무지 맡길 데가 없어서 갓난아이와 함께 거친 산생활을 하던 중, 어느날 토벌대에 쫓겨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이 입을 너무 오래 막은 탓에 질식해서 죽습니다. 그리고 남편 윤호도 소식이 끊깁니다. 정권은 서북청년단까지 동원해서 입산자의 가족들까지 악랄하게 처벌했습니다.
도무지 마을에서 살수가 없게 만들어서 가족들도 억지입산을 하거나 집에서 쫓겨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만삭인 옥자가 해산하기 위해 쫓겨난 집에 몰래 들어가서 애를 낳았는데 경찰은 곡괭이로 방구들을 파헤쳐서 도저히 집에서 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이 개같은 놈들, 짐승이라도 이러진 않겠다아 이놈들아!” 하며 악을 썼습니다.
옥자동무는 그렇게 비통하게 아들을 잃었지만 불굴의 투지로 산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후에는 이현상부대의 정치지도원으로 활약합니다. 하지만 종내는 옥자도 붙잡히고 맙니다. 환자트에 은신하던 동지가 몰래 빠져나가 토벌대에 밀고한 것입니다.
막판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빨치산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조국이 미제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데 우리가 조국을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조국을 지키겠어요” 했던 이들이 이제는 변절로 각자도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혁운과 옥자는 각자의 배필이 있었는데 토벌대의 공세에 변고를 당한 후, 최후의 시기가 지나고 절망에 빠져 방황하던 시절에 다시 만나 동지로 연인으로 부부로 살게 된 것입니다.
빨치산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혁명투쟁을 포기하고 살기 위해 자수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유격투쟁을 지하조직 사업으로 바꾸는 것, 셋째는 사라진 꿈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 있던 대다수의 빨치산들은 세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빨치산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패배했다고 해서 역사가 끝난 것인가? 아닙니다. 옥자는 남부군에서의 만 4년은 그녀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정적이고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이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 희멀건 죽으로 한 끼를 때울 때조차도 그들은 보급투쟁 나가는 동지를 배려해서 자기 몫을 덜어주었습니다. 그들은 토벌대의 추격을 피하여 끝없이 피해 다니고 그 와중에 수많은 동지들을 잃었지만, 그래서 그들이 간절히 꿈꾸던 미제로부터 조국해방 세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빨치산 실존은 그대로 꿈이 현실인 세상이었습니다.
작가의 후기 마지막 대목입니다. “부모님의 옛날 동료들을 만나 뵐 때마다 나는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저런 강인한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역사에 대한 책임감, 진실, 이런 것들의 힘이 아닌가? 막연히 추측은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른다. 그분들을 나는 동독 어느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렇습니다. 나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이 나라 현대사의 정통성을 보여준 빨치산을 따라서 절망하지 않고 사드철회투쟁으로 미제로부터 독립하는 그 날까지 동지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 사족 : 빨치산들은 끝없이 쫓겨다니는 와중에 각종 문서들을 산 곳곳에 비장했습니다. 그 양이 한 트럭분량 쯤 될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비장한 지도급 동지들은 모두 산화했습니다. 즉 어디 묻혀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설령 발견하더라도 비닐도 없던 시절, 그 문서들은 이미 다 썩어졌겠지. 그렇더라도 문서들 흔적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 문서들 일부라도 찾으면 빨치산의 역사를 더 잘 알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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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중을 휘어잡는 .. 이봉란 어머님의 노래솜씨 자랑.
1) 찔레꽃
2) 남상규- 추풍령
3) 조영남 - 모란동백
** 상주에서 오신 .. 노래하는 목수 신명섭님의 무대
" 백창욱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저도 노래를 바꾸게 됩니다..ㅎㅎㅎ.."
1) 노찾사 - 백두에서 한라, 한라로
죽은 자 무엇으로 남았는가
남에 유채꽃 북에 진달래 흐드러져
이 땅에 흘린 피로 맺혀있네
온누리 온몸 흔드는 함성
눈부신 노동과 투쟁의 열매로
아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가
남과 북의 원한 강물져 흐를때
우리는 해방의 나라로 가야하네
온누리 물불로 아름다운 세상
치욕인 산 울음인 산 떨쳐 일어나
아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우리 해방의 나라 기억하리라
산천초목 영원한 기쁨의 나라
온누리 부활로 피어오르니
투쟁이 사랑으로 만나는 세상
투쟁이 영원으로 만나는 세상
아아 통일의 땅에 우리 가리라
2) 겨울 공화국(양성우 시)에 곡을 붙인 후배의 노래
< 친구에게>
3) 일어나
4)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사회자 김종희 팀장의 마무리 발언 :
" 백두에서 한라까지, 마침내 이 땅이 하나가 되었을 때, 백창욱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 때 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 각오와 결심으로 또 한 주를 열심히 살고, 다음주에 이 자리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