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성의 함락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던 상황과는 판이하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이삭의 축복과 야곱의 축복이
서로 달랐듯이 여기서도 그렇다.
이삭은 장래 일에 대하여 에서와 야곱을 축복할 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야곱을 에서보다 앞세우게 되었지만,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축복의 방향과 내용을 미리 알고 축복에 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이 무사히 홍해를 건너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의 '믿음'이란
하나님 자신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성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믿음이 홍해를
완전히 갈라놓은 다음에 바다 가운데로 걸음을 내딛는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로 벽이 되니" (출 14:21-22)
즉, 저들은 바닷물이 넘실대는 해변에서 자기들이 바다로 들어서면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 주시리라고 '믿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바다를 완전히 갈라놓은 다음에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는 이와 같지 않다.
요단강이 단순히 홍해보다 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는 요단강이 언덕 위로 흘러넘치는 시절이었고,
이렇게 범람하는 강으로 발을 내디딘다는 것도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요단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던
그의 선배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수 3:14-16)
홍해를 건너는 것보다 더 거짓말 같은 기적이 요단강에서 일어난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손을 바다에
내어밀어 바다를 완전히 갈라놓은 다음에야 백성들이
바다로 들어서지만(이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흐르는 강물 위로 그냥 발을 들이미는 것이다.
홍해와 요단강이 상징하는 의미는 단 한마디로 얘기할 수 없지만,
출애굽과 가나안에의 여정에 있어 이 둘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의미심장하다.
우선 그 인도자부터 홍해는 모세였으나 요단강은 여호수아이다.
모세가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라면 여호수아는 문자 그대로
예수의 그림자이다(히 4:8).
이런 면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마 11:12)'는
예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세와 시내산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
즉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까지이다.
홍해는 애굽 땅과 광야를 갈라놓는 지점이다.
홍해 저쪽이 애굽 땅이라면 홍해 이쪽은 광야이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 받은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는데(고전 10:2), 이 점도 유념해야 한다.
홍해는 애굽 세계로부터 가나안 세계로의 회개이며
돌이킴이다. 그러나 홍해를 건넜다고 곧바로
가나안 땅이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무얼하며 지냈던가.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들을 40년씩이나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던가.
40년의 광야생활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단순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던가.
광야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애굽의 경험과 애굽의 삶이 죽는 곳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처럼 원망하고 불평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광야의 삶이 자꾸만 애굽에서의 삶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도 굶어죽지 않았고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음에도(신 8:4)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떻게 하든지 애굽으로 돌아갈 궁리를 했었는데,
이러한 반동의 근거는 오직 그들이 애굽의 삶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그리워했다는 점이다.
광야생활은 이들 곧 애굽의 삶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이다. 이들이 죽어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널 수 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 자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애시당초 인생이란 이런 광야생활이려니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여행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오로지 가나안 정복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이런 자들 곧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의 것이며
가나안을 향해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애굽의 찌꺼기가 모조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는 나의 '죽음'이요 '성령세례'이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는 홍해를 건널 때처럼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물에 발을 디딤으로써 갈라지는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는 새 언약적 사역을 하시는 것이다.
이 사역의 일꾼이 여호수아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모세의 사역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儀文)의 직분이었다면, 여호수아의 사역은
육의 심비에 영으로 새기는 새 언약의 직분이다(고후 3:3-11).
요단강은 이러한 분기점 즉 광야와 가나안이 나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지난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로 하는 일은
'다시 할례'를 행하는 것이며(수 5:2)
더이상 광야의 양식인 '만나'가 아닌
그 '땅의 소산'을 먹는 일이다(수 5:11-12).
그러므로 모세의 시대가 끝나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오면
더이상 광야에서 가나안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가나안을 정복하는 싸움의 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표현대로 침노와 침탈이며 천국은 이렇게 싸워서
빼앗는 자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은 그저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나안 정복이며,
이 정복을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이제까지의 과정 즉 애굽을 떠나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넘어온 것은 모두다
가나안 정복을 위한 예비과정일 뿐이다.
애굽에서 왕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홍해 해변에서 해수욕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우리가 가나안을 정복하여
거기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애굽의 모든 잔재를 쓸어 버렸고
(물론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셨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섰으며
'다시 할례'도 행하고 그 땅 소산까지 먹는 등
정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여리고 성 앞에 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백성 앞에 드러난
여리고 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는 없더라" (수 6:1)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딴다고 싸움이 있어야
이기든 지든 할 터인데 여리고 성은 굳게 닫혔고
싸울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양식이야 이동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여리고 성이
풍족할 것이고…. 여리고 성은 그저 성문 꽉꽉 닫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도 그랬지만 가나안 정복도 원래부터
하나님의 고안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움직일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출애굽과 다른 점은 출애굽은 우리(이스라엘 백성)가
싫어하건 좋아하건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지만
가나안 정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요단강을 건너는 모습이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나안 정복은 없다.
즉 '마음'은 백성에게, 그리고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인데 이 둘이 하나가 되어야 정복이 이루어진다.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 저들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과 저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말한다.
이 둘이 화합하지 않으면 가나안 정복은 꿈일 뿐이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 4:2)
그러나 여리고 성의 정복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저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해진다.
여리고 성이 얼마나 견고한 성이냐 혹은 거기 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센 사람들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리고 성을 정복할 '마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아니, 세상에, 거기까지 가서 여리고 성을
정복할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할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가나안에 입성했는데
거기 있는 성들을 정복할 마음이 없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는 하나님의 능력에 하나되는 마음으로
성들을 정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여리고 성의 정복은 하나님의 능력에 하나된
삶의 본보기였다. 그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리고성을 7일 동안 돌았다는 데 있다.
그들이 7일 동안 땅을 밟고 다녔기 때문에
땅이 흔들려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지만
그들이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데 여호수아 이후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이들이 가나안 정복에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