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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30:] |
“백범은 7~8개 종교 넘나든 汎종교인” 네이버
서울신문 생활/문화 | 2005.02.03 (목) 오전 9:21
<독자칼럼> 안중근의사 의거 둘러싼 천주교의 두 얼굴 / 쥐뿔 | 2007/05/02/ |
[가톨릭] 천주교에 관한 질문입니다. 200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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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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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종교 아우른 김구선생의 종교편력 |
[2004.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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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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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
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 모든 종교 아우른 김구선생의 종교편력 | |||||
김삼웅 <언론인·성균관대 겸임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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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백범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전집이 출간되는 등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렇지만 백범의 종교문제에 관해서는 백지상태로 남겨두고 있다. 백범이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질곡과 고난을 겪으며 독립운동을 펴 온 것은 불굴의 애국심이지만 그 애국심의 바탕에는 종교와 신앙심이 깔려 있었다. 백범은 어린시절 당시대의 다른 아이들처럼 유학을 공부하며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유학을 통해 과거를 보아 관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부패한 과거제에 실망하여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풍수와 관상학을 공부하고 동학에 입도하여 소년 접주가 되어 유교세력과 싸웠다. 일본군에 의해 동학혁명이 좌절되고 국권이 농락되면서 백범은 일본 밀정을 살해하고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한때 불문에 귀의해 승려생활을 했다. 환속하여 105인 사건 등 항일운동으로 다시 구속되고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운명할 때까지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았다 백범은 무속-유교-풍수-관상학-동학-불교-기독교인으로 한국의 거의 모든 종교를 ‘섭렵’하고, 사후에는 가톨릭의 성세(聖洗)를 받았다. 백범의 생애가 파란만장한 역정이었듯이 그의 종교편력 역시 파란곡절이 따랐다. 구한말에서 해방 때까지 격동하는 한국의 정치정세와 운명을 함께 해온 대표적인 민족지도자 백범의 정신사는 당시대 우리 종교사의 변천과정이기도 하다. 백범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백범의 어머니는 푸른 가시가 삐죽삐죽 돋친 아람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톨을 얻어 그것을 잘 간수한 꿈을 꾼 후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산일이 되어 진통이 시작된지 6∼7일이 지나도 해산하지 못하고 산모는 거의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모의 생명을 걱정한 집안 어른들과 마을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효험은 나타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어른들은 예부터 내려오는 무속의 풍습대로 산모가 아기를 쉽게 낳지 못할 때는 그 남편이 소의 길마를 등에 지고 지붕위에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내면 해산을 하게 된다는 속설에 따라 백범의 아버지가 소 울음소리를 내고 비로소 해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무속신앙을 한 형태로 하여 출생한 셈이다. 조그마한 한촌, 가난한 상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백범은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다. 9세 때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겨우 익히다 아버지가 동네 상놈 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열고 훈장을 초빙하여 겨우 한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서당이 폐지되면서 그나마 글 공부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서당에 인척의 소개로 훈료(訓料)없이 다시 배울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학〉〈통감〉〈한당시〉〈대고풍〉 등을 배우면서 전통적인 유학에 접할수 있었다. 과거에 응시하는 과목이 대부분이었다. 입신출세의 길이 과거에 급제하는 길밖에 없었기에 백범도 과거 준비를 하고 열심히 유학을 공부했지만 부패한 과거제도는 이미 합격자를 결정해 놓고 치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여 낙방한다. 실망한 백범에게 아버지는 상놈의 처지에 글공부를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풍수나 관상공부를 해볼 것을 권하고 〈마의상서(麻衣相書)〉 〈지가서(地家書)〉 등 관상, 풍수학 서적을 구해다 주었다. 백범은 이책들을 열심히 읽고 익혔다. 18세 때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동학에 참여하여 사회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고 이때 〈동경대전〉 〈입편가사(入編歌詞)〉 〈궁을가(弓乙歌)〉 등 동학에 관한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동학에 입도한 백범은 소년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천거되고 부패한 관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운다. 그러나 동학군은 외세 개입으로 패배하고, 백범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을 만나 그의 집 청계동에서 정통유학을 공부하게 된다. 안태훈은 당대에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백범의 생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 선생을 만나게 된 것도 안태훈의 집에서였다. 고능선은 해서지방에서는 손꼽히는 학자이며 의기가 강하기로 이름높은 대선비였다. 백범은 후일 고능선의 사망소식을 듣고 “오늘날까지 30여년에 나의 용심(用心)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이 심혈로 쏟아서 구전심수하신 교훈의 힘이다”고 고 선생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실토하며 애도하였다. ◆불자가 되어 사찰에 은거=백범은 나라가 위기로 치닫고 외래사조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격변의 시기에 언제까지나 구래의 유학사상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일제침략의 마수가 국정 깊숙이 파고 들었다. 백범은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살해한다. 체포되어 인천 감리서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법부에서 교수형을 건의했지만 고종황제의 판결보류 지시로 미결수로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감옥에서 〈세계역사〉 〈세계지지(世界地誌)〉 〈태서신사(泰書新史)〉 등 개화서적을 읽고 개화에 눈을 뜨면서 기독교에 접하게 된다. 1898년 3월 23세 때 인천감리서를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유랑하며 도피생활을 한다. 그리고 그 해 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삼남지방에서 피신생활을 하면서 하동 쌍계사와 칠불암에서 불법을 공부한다. 계룡산 갑사(甲寺)를 거쳐 마곡사로 들어가 용담화상(龍潭和尙)으로 부터 계(戒)를 받고 스님이 되었으며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었다. 1899년 늦가을 승려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느끼면서 상투를 올리고 환속하여 불교와는 인연을 마무리한다. ◆기독교 입교한후 애국계몽운동=백범은 1903년 28세 때 기독교에 입교한다. 그가 기독교를 신앙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알려지지 않는다.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백범은 독실한 예수교 신자인 오순형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아동교육과 교육전도사업에 전념한다. 더 이상 낡은 유학이나 불교로서는 서양문명과 일본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인식에서 였다. 그해 여름 평양에서 예수교 주최로 사범 강습회가 열렸을 때 백범도 여기에 참가한다. 이때 신천 사평동 예수교회의 영수 양성칙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와 결혼을 하라고 권유하였다. 최준례의 어머니는 청춘과부가 되어 두 딸을 키우며 예수교를 믿고 있었다. 1904년 최준례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미국인 선교사들은 최준례가 조건이 좋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것을 주장했다. 두 사람이 뜻을 굽히지 않게 되자 백범과 최준례는 교회에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교회의 책벌을 받았다. 두 사람이 책벌에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 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여 미국인 선교사는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면서 이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갈 때 백범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에버트 청년회 총무자격으로 전덕기가 목사로 있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가한다. 이 대회에는 이준, 이동녕, 전덕기, 최재학, 옥관빈, 조성환, 기산도 등 쟁쟁한 명사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을 폐기할 것을 결의한 상소문을 고종황제에게 제출하는 등 항일투쟁을 주도한다. 백범은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인천감옥에서 4년여 옥고를 치르다 석방되어 신교육운동, 기독교 전교운동,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19년 3월 상해로 망명, 9월에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다. 27년 동안의 고달픈 망명기, 항상 일제의 추적과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는 동안 교회를 다니는 등 신앙생활은 불가능했다. 이 기간에 어디에도 백범의 신앙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 어렵다. 다만 임시정부가 마지막 머물게 된 중경시절에는 임시정부의 가족들을 위해 토교에 ‘한교(韓僑) 기독교청년회관’을 짓고 주일이면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장준하 등 학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의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때 임시정부는 이들의 숙소로 기독교청년회관을 마련해주었다는 기록을 장준하의 〈돌베개〉에서 전한다. 1945년 8.15 해방 3개월이 지난 11월 조국의 품에 돌아와서 25일 첫 일요일에는 정동예배당을 찾아 귀국기도를 드렸다. 이날 설교는 40대의 정일형 박사가 맡았다. 그리고 사후에는 가톨릭의 성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의 피습소식을 들은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수녀와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달려가 교회예식대로 대세(代洗)를 주었다. 백범은 환국후 몇차례 성모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고 그때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으며, 며느리 안미생이 신자여서 그의 권고도 있어 생전에는 “죽기전에 입교 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암살당할 때 까지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통일국가건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백범은 무속신앙-유학-풍수-동학-불교-기독교-천주교라는 종교의 모든 공간을 유영하면서 애국심을 키웠다. 그가 여러 종교에 몸을 담았지만 변함없는 신념은 애국-조국독립-통일정부수립의 꿈이고 신앙이었다. |
( 2004/06/30 14: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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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의거 둘러싼 천주교의 두 얼굴
오는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94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의사는 그로부터 5개월뒤인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안의사의 10.26의거를 둘러싸고 한국가톨릭교단은 안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파문에 가까운 신자자격을 박탈하였다.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뮈텔주교는 안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안의사의 시체를 가족들에게조차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하였다.
뮈텔은 안의사가 순교직전 자신이 18세 때 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운 빌렘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할 때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를 행한 빌렘신부에게 무거운 징벌을 내렸다. 심지어 뮈텔은 의거 이틀후인 10월 28일 일본의 요코하마 천주교회로부터 전보로 “일본의 유력 신문이 이토의 암살자를 가톨릭신자라고 하는데 그 진위를 즉시 회답해 달라”는 전보를 받고 “그는 절대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고 회답하였다.
뮈텔은 안의사를 의거 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안응칠(안중근)을 알지 못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리고 빌렘신부에게 (안의사에게) 일체의 성사를 집행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안의사는 19세 때인 1896년 7월 부모 형제 친척과 함께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공소에서 빌렘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토마스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안의사는 이때 교리공부와 프랑스어를 배우며 천주교 선교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을 전개하면서 총대(성당 사무장직)로 추대되어 교회 내외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했다.
안의사는 을사조약에 이어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는 참담한 조국을 지켜보면서 국외에 의병부대를 창설하고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의병부대를 이끌고 두만강 최하단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여러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전과를 올렸다. 또 홍범도 부대와 공동작전을 펴 함경북도 신아산 부근까지 진공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10여명의 일본군과 상인을 체포하였다.
의병투쟁에 나섰던 안의사는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3년내 조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무능과 조국의 죄인됨을 속죄하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토를 처단하여 중국의 실력자 원세개로 하여금 “5억 중화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청년이 해냈다”는 찬탄을 하게 하였다.
의거에 성공한 안의사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신자로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세를 맡아주고 10여년간 흠모하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함께 걱정하며 의논해주던 프랑스인 신부 빌렘신부로부터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하였다.
빌렘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파리 동방전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재능이 뛰어나고 박학하며 예술ㆍ문화 방면에도 재주가 있었다. 영어ㆍ독일어에도 능통하며 1890년경 한국에 와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안의사의 요청으로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8일 재판을 받고 있던 뤼순에 도착하여 안의사의 아우 정근(시릴로)ㆍ공근(요한) 두 형제와 함께 이튿날 뤼순감옥에서 안의사를 면회하였다. 전옥 구리하라의 사택 응접실에서 이루어진 면회에서 빌렘신부는 고해성사를 맡았고 미사대례를 거행한데 이어 성체 성사로 천주의 지극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뮈텔주교의 반기독교행동=빌렘신부가 뤼순에 가서 안의사의 성체성사를 하기까지에는 곡절이 많았고 나중에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뒤따랐다. 조선천주교의 최고책임자 뮈텔주교의 방해 때문이었다.
뮈텔은 11월 4일 서울의 일본 헌병본부에서 진행된 이토의 추도식에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나타나 신도(神道)의 예식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천주교회’라고 쓴 대형 화환을 식장에 진열하는 등 안의사의 의거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정을 표시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편들었다.
안의사는 2월 14일 제6회 공판에서 일본 형법에 적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자리에서 안의사는 서울의 뮈텔주교에게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았음을 알리면서 종부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신부님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고, 빌렘신부에게는 별도로 직접 찾아와 뵈올수 있기를 청하였다.
안의사의 청을 받은 뮈텔은 “빌렘신부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안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야고비)이 직접 뮈텔을 찾아가 빌렘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빌렘신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뮈텔에게 편지를 써서 부치고 뤼순으로 떠났다. 뮈텔은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빌렘신부에게 2개월간 미사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조처를 내렸다. 이에대해 빌렘신부는 주교의 처사에 항의하면서 자신이 뤼순에 가서 안의사에게 성사를 집행한 행위의 정당성을 밝혔다.
〈제가 어느 사형수에게 목자로서 의무를 이행하러 갔다고 해서 주교님께서는 제게 그런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제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봄으로써만이 얻을수 있는 평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주교님께 항의를 표시해왔지요. 그런데 저는 이 자리를 빌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 항의를 정식으로 다시 한번 제기합니다. 한 사형수에게 성사를 거절하신 것에 대하여, 그리고 저의 사랑의 행위가 저에게 가져다 준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에 대하여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그 사형수에게 하신 잔혹하고 파렴치하며 교회법규에 반하는 그 엄청난 성사 거절에 관련해서 그 어떤 변명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불행한 사형수는 탄원을 했지요. 그러자 외교인 재판관은 주교님께 그를 위해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저를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교구가 그 어떤 희생도 치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제되어진 정책상의 신중함이라는 이유는 사실 무근한 것입니다. 저의 여행이 그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었습니다. 제가 만난 일본인들은 누구나 그리고 그들 나라의 언론들도 저의 행동방식이 사제의 본분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라며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 죄인이 가톨릭신자라는 것을 부정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습니다.(중략)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성사거절과 제가 받은 고통에 공식적으로 항의합니다. 또 주교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에도 항의합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성무집행 정지령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통보해주지도 않으셨고, 제게 해명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홧김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갑작스레 성무집행 정지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불행입니다.(중략) 주교님께서는 저의 교우들 한 가운데서 한창 성주간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 그런 형벌을 느닷없이 내리셨습니다. 저의 그 불행한 속죄자의 처형이 집행되기도 전인데 말씀입니다. 그런 식으로 타격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셨겠지만, 마치 주교님께서는 일본의 재판관보다 더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황해도천주교회사’에서)
◇뮈텔주교에 쫒겨난 빌렘신부=빌렘신부는 이 사건으로 뮈텔주교와 불화가 쌓이게 되어 1914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속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로마교황청 재판소에 자기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항소를 제기하자, 교황청 포교성성은 빌렘의 특수한 상황에서 성무집행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안의사는 사형당하기 전 (2월15일) 빌렘신부에게 한통의 서한을 남겼다.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성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에도 불구하고 특히 오셔서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 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다시 바라옵건데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혼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교께도 상서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저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한국천주교는 1993년 84년 만에 안의사를 천주교신자로 복권시키면서, 안의사의 의거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천주교신자의 행동으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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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의거 둘러싼 천주교의 두 얼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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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의 10.26의거를 둘러싸고 한국가톨릭교단은 안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파문에 가까운 신자자격을 박탈하였다.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뮈텔주교는 안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안의사의 시체를 가족들에게조차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하였다. 뮈텔은 안의사가 순교직전 자신이 18세 때 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운 빌렘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할 때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를 행한 빌렘신부에게 무거운 징벌을 내렸다. 심지어 뮈텔은 의거 이틀후인 10월 28일 일본의 요코하마 천주교회로부터 전보로 “일본의 유력 신문이 이토의 암살자를 가톨릭신자라고 하는데 그 진위를 즉시 회답해 달라”는 전보를 받고 “그는 절대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고 회답하였다. 뮈텔은 안의사를 의거 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안응칠(안중근)을 알지 못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리고 빌렘신부에게 (안의사에게) 일체의 성사를 집행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안의사는 19세 때인 1896년 7월 부모 형제 친척과 함께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공소에서 빌렘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토마스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안의사는 이때 교리공부와 프랑스어를 배우며 천주교 선교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을 전개하면서 총대(성당 사무장직)로 추대되어 교회 내외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했다. 안의사는 을사조약에 이어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는 참담한 조국을 지켜보면서 국외에 의병부대를 창설하고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의병부대를 이끌고 두만강 최하단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여러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전과를 올렸다. 또 홍범도 부대와 공동작전을 펴 함경북도 신아산 부근까지 진공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10여명의 일본군과 상인을 체포하였다. 의병투쟁에 나섰던 안의사는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3년내 조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무능과 조국의 죄인됨을 속죄하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토를 처단하여 중국의 실력자 원세개로 하여금 “5억 중화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청년이 해냈다”는 찬탄을 하게 하였다. 의거에 성공한 안의사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신자로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세를 맡아주고 10여년간 흠모하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함께 걱정하며 의논해주던 프랑스인 신부 빌렘신부로부터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하였다. 빌렘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파리 동방전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재능이 뛰어나고 박학하며 예술ㆍ문화 방면에도 재주가 있었다. 영어ㆍ독일어에도 능통하며 1890년경 한국에 와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안의사의 요청으로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8일 재판을 받고 있던 뤼순에 도착하여 안의사의 아우 정근(시릴로)ㆍ공근(요한) 두 형제와 함께 이튿날 뤼순감옥에서 안의사를 면회하였다. 전옥 구리하라의 사택 응접실에서 이루어진 면회에서 빌렘신부는 고해성사를 맡았고 미사대례를 거행한데 이어 성체 성사로 천주의 지극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뮈텔주교의 반기독교행동=빌렘신부가 뤼순에 가서 안의사의 성체성사를 하기까지에는 곡절이 많았고 나중에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뒤따랐다. 조선천주교의 최고책임자 뮈텔주교의 방해 때문이었다. 뮈텔은 11월 4일 서울의 일본 헌병본부에서 진행된 이토의 추도식에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나타나 신도(神道)의 예식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천주교회’라고 쓴 대형 화환을 식장에 진열하는 등 안의사의 의거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정을 표시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편들었다. 안의사는 2월 14일 제6회 공판에서 일본 형법에 적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자리에서 안의사는 서울의 뮈텔주교에게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았음을 알리면서 종부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신부님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고, 빌렘신부에게는 별도로 직접 찾아와 뵈올수 있기를 청하였다. 안의사의 청을 받은 뮈텔은 “빌렘신부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안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야고비)이 직접 뮈텔을 찾아가 빌렘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빌렘신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뮈텔에게 편지를 써서 부치고 뤼순으로 떠났다. 뮈텔은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빌렘신부에게 2개월간 미사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조처를 내렸다. 이에대해 빌렘신부는 주교의 처사에 항의하면서 자신이 뤼순에 가서 안의사에게 성사를 집행한 행위의 정당성을 밝혔다. 〈제가 어느 사형수에게 목자로서 의무를 이행하러 갔다고 해서 주교님께서는 제게 그런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제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봄으로써만이 얻을수 있는 평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주교님께 항의를 표시해왔지요. 그런데 저는 이 자리를 빌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 항의를 정식으로 다시 한번 제기합니다. 한 사형수에게 성사를 거절하신 것에 대하여, 그리고 저의 사랑의 행위가 저에게 가져다 준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에 대하여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그 사형수에게 하신 잔혹하고 파렴치하며 교회법규에 반하는 그 엄청난 성사 거절에 관련해서 그 어떤 변명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불행한 사형수는 탄원을 했지요. 그러자 외교인 재판관은 주교님께 그를 위해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저를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교구가 그 어떤 희생도 치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제되어진 정책상의 신중함이라는 이유는 사실 무근한 것입니다. 저의 여행이 그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었습니다. 제가 만난 일본인들은 누구나 그리고 그들 나라의 언론들도 저의 행동방식이 사제의 본분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라며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 죄인이 가톨릭신자라는 것을 부정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습니다.(중략)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성사거절과 제가 받은 고통에 공식적으로 항의합니다. 또 주교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에도 항의합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성무집행 정지령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통보해주지도 않으셨고, 제게 해명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홧김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갑작스레 성무집행 정지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불행입니다.(중략) 주교님께서는 저의 교우들 한 가운데서 한창 성주간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 그런 형벌을 느닷없이 내리셨습니다. 저의 그 불행한 속죄자의 처형이 집행되기도 전인데 말씀입니다. 그런 식으로 타격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셨겠지만, 마치 주교님께서는 일본의 재판관보다 더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황해도천주교회사’에서) ◇뮈텔주교에 쫒겨난 빌렘신부=빌렘신부는 이 사건으로 뮈텔주교와 불화가 쌓이게 되어 1914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속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로마교황청 재판소에 자기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항소를 제기하자, 교황청 포교성성은 빌렘의 특수한 상황에서 성무집행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안의사는 사형당하기 전 (2월15일) 빌렘신부에게 한통의 서한을 남겼다.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성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에도 불구하고 특히 오셔서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 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다시 바라옵건데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혼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교께도 상서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저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한국천주교는 1993년 84년 만에 안의사를 천주교신자로 복권시키면서, 안의사의 의거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천주교신자의 행동으로 인정하였다.
<사진>안중근 의사를 면회하는 빌렘신부(등돌린 사람). 빌렘신부는 당시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뮈텔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옥중에서 안의사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다. 영성체 후 안의사는 빌렘신부에게 한복을 차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
( 2003/10/15 13: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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