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노(激怒)
감사실에서 회삿돈을 횡령한 직원을 징계했다. 그 직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과장도 함께 징계했다. 평소 말본새가 거친 사장이 격노하며 보고서류를 바닥에 팽개친다. 총애하는 과장을 왜 징계했냐며 삿대질과 함께 언성을 높인다. 아니 숫제 고함이다.
감사실장이 사장의 격노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주눅든 표정이 불안과 공포로 빠르게 얼룩진다. 오금이 저리고 숨이 막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혈압이 오른다. 그냥 털썩 주저앉고 싶다.
사장이 격한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죄 없는 책상을 발로 꽝꽝 차기도 한다. 규정대로 처리했는데 왜 이리 노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의 거친 입에서 쌍소리가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악마가 그의 그악스러운 쌍소리를 들었더라면 두 손 들고 도망쳤을 것이다.
고개 숙인 감사실장이 살짝 흔들린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엄습한다. 동시에 콩팥 위 부신(副腎)에서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 호르몬이 분출한다. 면역력이 삭제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놀란 혈액이 근육으로 집중되어선지 손과 발이 얼음장 같다. 마음도 냉동실이다. 이러다가 무더운 여름에 동사할 것만 같다.
이 새끼야! 횡령 직원만 징계하면 되지, 내가 총애하는 과장까지 왜 징계했어!?
사장이 진저리나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악을 쓴다. 격노 게이지는 여전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오를 정도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과장이었던가. 그런데 잘못한 과장을 사장이 총애한다는 이유만으로 징계하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 격노하면 전두엽의 활동이 감소하여 판단력이 저하된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다.
규정대로 한 겁니다.
실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토한다. 순간 사장이 책상 위의 사장 명패로 책상 위를 꽝 내리친다. 책상 위 유리판이 작살난다. 감사실장이 움찔한다. 건강을 갉아먹는 아드레날린이 또 솟구친다. 반복적인 격노에 노출되면 세포가 빨리 노화된다는데, 이러다가 금방 할아버지가 되고 빨리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다.
뭐, 규정!? 이 개새끼야, 내가 대장이고 내 말이 규정이야! 과장은 징계에서 빼!
사장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입가에 허연 거품이 묻어 나온다. 바람직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장이 스스로 규정을 어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장의 폭언에 자꾸 놀란 세포가 순식간에 부식되는 듯하다. 조금 있으면 영업부장처럼 속절없이 쓰러져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여섯 달 전의 일이다. 영업부장이 거래처와의 계약 실패를 사장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사장이 격노했다. 실패한 계약서를 찢어 부장의 얼굴에 던지며 폭언을 마구 퍼부었다. 장시간의 격노를 극복하지 못한 부장이 끝내 쓰러졌다. 병원에 실려 갔는데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위 식물인간이 되었다. 권력자의 격노는 일종의 타살 행위라는데 그게 사실로 증명된 셈이다. 사장은 지금까지 그 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남기지 않고 있다.
감사실장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어느 책에서 본 거 같다. 상대방의 격노와 맞닥뜨렸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속으로 웃어넘기는 것이라고. 웃으면 엔도르핀 호르몬이 분비되어 격노 스트레스를 녹여준다고 했다.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활성화되고 세포의 노화를 막아준다고도 했다.
과장을 징계에서 뺄 수 없습니다. 그게 규정이니까요!
감사실장이 단호하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책에서의 지침과 달리 속으로 웃어넘기지 않고 일부러 입가에 흘렸다. 그러니까 고의로 드러낸 웃음. 내가 살기 위한 웃음이기도 하다.
이게 웃어!?
사장의 격노가 폭발한다. 거의 충동적 발작 수준이다. 사장이 책상 위의 명패를 집어 던진다. 감사실장이 살짝 보기 좋게 피한다. 사장 명패가 실장 뒤의 벽에 부딪치며 요란하게 파열한다.
이 새끼가 피해!?
사장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떤다. 그때 감사실장이 바닥에 떨어진 명패를 짓밟으며 희미한 웃음을 날린다. 누가 보더라도 비웃음으로 비칠 그런 웃음. 사장이 실장의 발아래 깔린 자신의 명패와 그의 비웃음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길길이 날뛴다. 이제 눈은 벌겋다 못해 차라리 새빨갛다. 격노의 폭풍과 쓰나미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입에서는 사전에 나오는 온갖 욕설이 흘러나온다. 그의 양복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추악한 본성이 거침없이 폭로되고 있다.
태산 같은 격노로 무장한 사장이 문득 골프채를 가지고 실장에게 달려든다. 실장의 몸통을 향해 골프채를 휘두른다. 실장이 날렵하게 피한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흘리는 실장. 이번에는 좀 더 커진 조롱 조의 웃음이다.
사장이 쌕쌕거리며 실장의 머리를 향해 골프채를 거칠게 던진다. 실장이 머리를 숙이며 골프채를 가볍게 피한다. 이어서 사장의 명패를 발로 차며 하하하 큰 웃음을 뿌린다. 크게 빈정대는 웃음!
그 모습을 본 사장이 얼핏 쇼크에 휩싸인다. 갑자기 왼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며 컥컥거린다. 오른손은 가슴을 쥐어짜고 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실장을 노려보는 눈에 스르르 힘이 풀린다. 동공이 크게 열리기 시작한다. 다음 순간에 고개가 힘없이 꺾어지더니 무릎이 땅에 닿는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마치 벼락 맞은 고목처럼.
바닥에 쓰러진 사장은 미동도 없다. 마침내 실장의 전략이 완성되었다.
감사실장이 사장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장님, 모르셨나요!? 격노는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것을!”
첫댓글 맞습니다 ㆍ화는 스스로를 망칩니다ㆍ잘 읽었습니다
격노가 사라지고 미소가 흐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거침없는 문장력과 긴장의 연속이 흥미진진합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격노 없이 잘 처리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세요 선생님~
'격노' 하는 자가 있었지요.
그 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스로 격노를 다스리지 못한 그 자는 조만간 한방에 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격노 아니면 술이나 처마시는 저거 언제 목덜미 움켜쥐고 동공이 풀리려나.
오늘 지지율 발표되었네요. 역대 최저~
제가 보기에 10%도 안 될 거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조금 있으면 목덜미 움켜쥘 것 같습니다.ㅎ
감사합니다.
격노 자주하면 곧 경로당에 가지 않을까요? ㅋㅋ
격노로 인해 이미 노쇄하여 경로당을 생략하고 바로 요양원 갈 것 같습니다.ㅎ
감사합니다.
글 읽다가 제가 열받았지요
둘 다한테요ㅎㅎㅎ
전회장님 소설도 쓰시네요
그동안 글이 궁금했거든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앗! 황 시인님, 안녕하세요.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랍니다.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문향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상대방의 격노와
맞닥뜨렸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속으로 웃어넘기는 것이라고"
아이고 어쩜
감사실장이 요리조리 피해서 더 큰 불상사를 막았을 수도 있겠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