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는 부모를 섬길줄 아는 유일한새 (★)
까마귀는 부모를 섬길줄 아는 유일한새
▲ 흉조 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할 까마귀의 모습
우리나라에서는 까치를
길조(吉鳥)로 여기고
까마귀를 흉조(凶鳥)로 여겨 왔다.
그래서 그런지 까마귀를 보면
괜히 뭔가 안 좋은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까마귀는 원래 흉조가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행운의 새라
여겨지고 있으며,
우리 한민족에게는 국조(國鳥)로
친근한 새에 속했었다.
역사드라마 <주몽>,
<태왕사신기>, <대조영> 등
고구려 사극을 보면
고구려의 국조로
'삼족오(三足烏)'가 등장한다.
이는 세발 달린 까마귀로
태양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천.지.인(天地人)의 삼신 사상을
나타내고 환인.환웅.
단군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삼족오 문양을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은 까마귀를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사자로 여겼으며,
견우.직녀와 관련된 칠월칠석
설화에서도 까마귀는
까치와 함께 오작교를 만들어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까마귀의 위상은 나쁘지 않으며,
서양에서는 지금도 까마귀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Crow라는
이름을 붙여 사용하고 있다.
그랬던 까마귀가
한국에서 흉조로 오인되어
전해지게 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 때문이었다.
과거 고구려를 두려워했던
한족들이 고구려의 상징이었던
삼족오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렸고,
일본제국주의가
까마귀는 흉조라는
엉터리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새 중 유일하게
늙은 부모를 섬기는
효심 깊은 새이다.
자식이 성장한 뒤
어버이께서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한다는 효심(孝心)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인
반포지효(反哺之孝)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사냥할 힘이 없어진 늙은 부모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인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만큼 까마귀는 효성이
지극한 새이고,
무리 안에서 많은 경험이 많은
나이 든 까마귀를 섬기는
습성을 갖고 있는 새이다.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새들 중에서 IQ가 가장 높은 것도
'까마귀'이다.
영장류에 속하는 침팬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조류인 까마귀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놀라운
지능 수준을 갖추고 있다.
보통 머리 나쁜 사람들을 두고
‘새 대가리’라는 농담을
하곤 하는데,
지능이 높은 까마귀는
대체로 머리 나쁜 조류와는 달리
아주 똑똑한 새이다.
서양 학자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는 수메르는
환국 이래로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로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교류했었다고 적혀있다.
그들 사이에선
원래 비둘기가 아닌 까마귀가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히브리인들이 까마귀가
육식을 한다는 이유로
비둘기로 대체했다고 한다.
육식을 하긴 하지만
주로 인간에게 해로운 해충을
주식으로 삼고 있어
까마귀는 인간에게 유익한 새이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새인 것이다.
국조 삼족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까마귀는 원래
진귀한 존재였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단군 조선이나 북부여에서도
신성한 의미를 가진 존재로
숭상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서양의 고대 문명권에서
인식되어진 것처럼
우리 한민족 사이에서도
까마귀에 대한 주된 이미지는
흉조(凶鳥)가 아닌
길조(吉鳥)였다.
머리 좋고, 효심이 지극하고,
신성과 평화와 상징이었던
까마귀가 오늘날에 와서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불운을 안겨다 주는
흉측한 존재로 알려지게 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울님들~~!
연일 추워지는 날씨에
감기조심하시고
또 겨울은 겨울데로
아름다운 추억
많이 간직하시길 바라며
오늘도 내일도
내내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潤 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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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띠해 색깔의 유래는 (★)
甲午年 새해가 밝았옵니다.
올해는 靑馬의 해입니다.
여기있는 駿馬(준마)와 같이
힘찬 한해되시길 懇切(간절)이 바랍니다.
말띠해 색깔의 유래는...
60갑자는 ‘갑, 을, 병, 정, ’으로
나가는 10간과
‘자, 축, 인, 묘, …’로 헤아리는
12지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10간은 각각 청·적·황·백·흑의
고유 색깔을 나타내기 때문에
청말띠, 백말띠, 적말띠 식의
구분이 가능한 것이다.
금년이 갑오년이기에 갑은
청색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민속엔 '백말띠' '청말띠'를
따지며 금기시 했다는 어떤 흔적도
없다고 한다.
다른 것을 볼 필요도 없이
조선시대 왕비 중에 말띠 여성이
적잖았다.
성종의 후비 정현왕후
(임오생 1462년 흑말띠),
인조비 인열왕후
(갑오생 1594년 청말띠),
효종비 인선왕후
(무오생 1618년 황말띠),
현종비 명성왕후
(임오생 1642년 흑말띠)가
모두 말띠였다.
만약 조선시대에 말띠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속설이 존재했다면,
조선 왕실이 '말띠 왕비'를 간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띠여성 기피는 일본이
진원지로 추정된다.
후쿠오카 대학 다나카 교수 연구진은
적말띠 저주의 기원이 1682년
에도(江戶) 시대 방화 혐의로 처형된 소녀
야오야 오시치(八百屋お七)
이야기'라는 설을 제시했다.
후일 가부키로도 만들어진
이 이야기 속에서 열여섯 살 오시치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다.
한 동자승을 연모한 나머지
'집에 불이 나면 그가 나를 구하러 올 것'
이라는 미망에 빠진 것이다.
불은 이웃으로 옮겨붙더니 급기야
에도(지금의 도쿄·東京) 전체를
삼키고 10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오시치는 결국 화형당했다.
그 오시치가 병오년(1666년)
적말띠였다고 한다.
한낱 옛날 이야기였던 오시치
이야기가 현실의 속설이 된 것은
1930년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연인에게
집착하다 그를 살해하고 파멸한
한 여성의 사건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 여성이 바로
1906년 병오년생이었다.
그때부터 병오년에 태어난 말띠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이 일본 사회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그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말띠해에는 어김없이 여아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남아 출산율이
높아지는것은 근거없는
속설때문이다..
우리님들~~!
친구들 만나 여유롭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 潤 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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