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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수도회] 악마의 이중주와 사랑의 죽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54,7-10
† 제2독서 필리 2,6-11
† 복음 마르 14,1─15,47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나뭇가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축복한 나뭇가지, 곧 성지(聖枝)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곳임을 아십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은 머지않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성주간을
시작합시다.
★ 이사야서에 실린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는 주님의 뜻에 따라 매질과
모욕에 자신을 내맡기는 종이 소개된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종의 노래가 실현됨을 알아본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이 되시고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순종하셨음을 칭송한다(제2독서).
★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기로,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으로 사람들
손에 넘겨지게 되시는 때를 출발점으로 하여,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의
신문과 빌라도의 신문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의 내용을 전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파스카 어린양으로 바쳐지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3.14) 이 외침이 이천 년 전 유다인들의
외침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열렬히 환영하던 이들이 불과 며칠 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면, 우리 또한 무의식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고함을
지르는 무리에 가담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들은 두 복음,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복음과 예수님의
수난기는 더할 수 없는 대조를 이룹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 모든 일이
한 주간 사이에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이 한 주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복음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사람이 온전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군중이 빌라도에게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도 수석 사제들이 그들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고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군중의 부추김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줍니다.
군중이, 그리고 빌라도가 자유롭고 소신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리와 정의 앞에서 어느 만큼 자유롭습니까? 윗사람이나 지도자들이
우리를 선동해도 정의를 지킬 수 있습니까? 군중이 나의 위치를 위협해도
진리를 옹호할 수 있습니까? “주님, 저도 정의에 눈을 감아 버리고 소신과
줏대를 접어 둔 채, 체면이나 군중 심리에 휘둘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악마의 이중주와 사랑의 죽음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수난 성지주일 마르 14,1─15,47
“아빠!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악마의 이중주와 사랑의 죽음
전례는 부활을 향한 사순절의 순례 여정을 하루에 그리고 이 한 주간에
요약 압축하고 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마르 11,10) 하고 환성을 올리던 그들이,
이제 악의 무리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 15,13-14)라고
외치며 ‘악마의 이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이중성과 가면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 영원한 죽음을 향해 돌진하였고, 사랑이 말라버린 황야로 치닫고
있다. 이제 유다인들과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조소와 증오와 멸시로 가득한
인간 법정으로 넘겼다. 환호하며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는 듯 보였던
그들은 예수님의 사형, 예수님 처형의 방조범, 이기적인 관람객으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십자가를 원했지 인간의 눈으로 힘없어 보이고 볼품없어 보이는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인간의 뿌리 깊은 죄가 폭로되고 사랑은
외출해버린다. 빌라도는 조작된 민의에 우유부단하게 말려들어 사형을
언도하고, 위선의 탈을 쓰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인의 피흘림에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손을 씻었다. 한편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멸시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체포되자 모두 버리고
달아났으며, 더구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도 참 회개를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가 목매달아 죽었다.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돈에 눈이 멀어, 비겁함
때문에, 정치적 출세를 위해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모든 악의와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면서도 사랑하는 벗을 취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생명을
내놓는 사랑 밖에는 죽음을 이길 수 없으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 어떻게 가슴 뜨거운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할까?
먼저 가면을 벗어야 한다. 입으로는 주님을 찬미한다고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나 직접 땀을 흘려야 하는 일에는 뒷짐지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주님처럼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만 인정받고 튀고
싶어 하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의 태도는 청산해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고통스러우면 변덕을 부리거나 신분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영원한 생명, 구원의 길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는 곳에 있다.
다음으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어둠의 세상을 뚫고
빛과 말씀 자체로 오셨다.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기쁨과 희망을
설파하시고 온 몸으로 증거하셨던 예수님이시다. 예루살렘에는 반대와
증오와 멸시와 배척과 무시, 그리고 서슬 퍼런 죽음의 칼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반생명의 기운을 뚫고 골고타를 향해 오르셨다.
그분의 삶의 종착점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야 할 참 생명의 길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삶을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외딴 섬처럼 홀로
머무는 ‘나’가 아니며, ‘너’가 아니며 ‘그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한
형제자매이다. 우리 서로 어렵고 고달프고 외로운 사람들이지 않는가!
헌데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께 기대기만 하면 절로 솟아나오고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랑마저 없다면 얼마나 비참할지!
세 번째로, 우리 모두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도록 하자.
십자가 곧 일상의 고통과 시련은 회피할 수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우리 삶의 조건이기에 침묵 중에 그 고통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꼭꼭 씹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도 쓰디쓴 도라지를 계속 씹으면
단맛이 우러나듯이 말이다. 죽음도 고통도 실패도 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마심으로써’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 길은 나다워지고
하느님다워지는 길이다.
끝으로, 용서와 포용으로 무관심과 냉정, 죽음의 문화를 사랑으로
살려내자. 우리는 살인, 학대, 자살, 폭행, 사기, 각종 사고, 빈부격차의
심화 등 죽음의 문화와 사회 병리적 현상이 일상화하고 힘을 떨치는
세상에서 동료 인간의 아픔과 시련, 죽음에 무감각해져 간다. 이제 자신을
배반하고, 경멸하며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마저 용서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이러한 냉담, 무관심을 따뜻이 데워 죽음의 문화를 생명으로
바꿔가야 하겠다. 우리 모두 악마의 이중주를 연주했던 유다인들, 빌라도,
로마병사들, 바라빠 등과 달리, 진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영원한
도시 예루살렘에 모셔들이자. 사랑의 도시를 향하여 십자가 바라보며
함께 올라가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수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4,1─15,47
<또는 15,1-39>
어떤 시를 읽다가 시인이 삶을 장대높이뛰기에 비유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이 시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우선 장대높이뛰기는 일정한 거리를 전속력으로 장대를 들고 달려서
적절한 시점에 장대를 바닥에 박고 높이 뛰어서 가로대를 넘는
육상경기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갱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그 가로대를 간신히 넘습니다. 시인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나 시련, 그리고 세상의 유혹 등 모두가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간신히 넘는 것이라고 표현하더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로대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장대를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대를 놓지 않으면 절대로 가로대를
넘을 수가 없지요. 이처럼 삶에서도 내가 꽉 움켜잡으려는 욕심을 확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예전에 지하철에서 봤던 한 장면이 떠올려집니다.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사람들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면서
시끌벅적한 것입니다. 저는 싸움이 났나 싶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 보았지요. 그리고 조금 당황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에스컬레이터의 시작 부분에 있는 고정된 손잡이를 꽉
잡고 계시고, 다리는 저절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얹어져 있어서
몸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할머니를 잡고
“할머니, 잡고 있으니까 얼른 손을 놔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지요.
그냥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얹기만 하면 될 것을, 불안한 마음에 첫 시작
부분에 고정된 손잡이를 꽉 잡고 탔으니 몸을 저절로 위로 올려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 삶에서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만큼은 놓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장대를 놓아야
원하는 가로대를 넘을 수 있고, 고정된 손잡이를 놓아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놓아야 하는 것들을 놓지 못해서 더 어렵고 힘들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수난의 길을
시작하시지요.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까지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완성을 위해 놓을 수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야구에서 타율이 3할만 넘어도 훌륭한 타자라 합니다. 열 번 중 세 번을
치고 일곱 번 아웃 당하는 것이지만 훌륭하다고 평가 받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세 번의 성공을 위해 일곱 번의 실패를 감수하세요(서동식).
장대를 놓아야 원하는 가로대를 넘을 수 있습니다.
행복해 지는 길
우리는 자신의 삶 안에서 실패와 좌절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좌절뿐인 나의 삶일까요? 아닙니다. 그 실패와 좌절이 크게만 느껴질 뿐,
분명히 작은 것이라도 괜찮고 좋은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서 충분히 실패와 좌절 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비판해도 나 스스로 내 자신을 다독일 수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 잘했어, 힘내.”
작은 일상 안에서 스스로를 격려할 줄 아는 사람은 내면의 행복을
끄집어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 안에 있는 그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自身)을 격려하면 자신(自信)이 생긴다.’
스스로를 격려해보십시오. 분명히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동창신부 어머니의 칠순. 건강하세요~~~
◈ [수도회] 2015.03.2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아니겠지요?”> (마르 14,19)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지옥 갈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암에 걸릴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가족 중 누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게 될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대신하여 수많은 고초를 겪을 것이다.
"저 아닌가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대신하여 엄청난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저 아닌가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기에
상상치도 못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저 아닌가요?"
예. 여러분이 바로 그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이라 고백하며 호산나를 외치지만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군중들 사이에서 외치고 있는
바로 그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중인격자가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의 힘든 여정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과 거룩한 성주간을 함께 하십시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달면 삼키고 쓰면 밷는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마르코 15,-39)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수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4,1─15,47
<또는 15,1-39>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항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 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 비쭉 입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11,1-10). 정말 군중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마르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러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15,14) 하고 외쳤습니다.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는 말만하고 있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습니다(요한15,15). 소신 있게 판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정치였습니다.
이제 수석사제들도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15,31-32)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이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을 하게 됩니다. 방귀 꾼 놈이 성을
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라고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지금은 사랑할 때이고 기도할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으련만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 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셨다”(마르15,38).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신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이번 한 주간은 성주간입니다.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성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던 세족례를 행하고
성찬례를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낮에는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금요일에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오후3시경에
십자가 길을 하고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예절을 합니다. 깊은 침묵 속에
주님 부활을 기다립니다.
성토요일 부활을 준비하는 날 입니다.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에 토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에 걸쳐 빛의 예식과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한 주간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기쁨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희생, 봉헌이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길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침묵 -여기 사람 하나 있었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마르11,1-10 이사50,4-7 필리2,6-11 마르14,1-15,47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수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4,1─15,47
<또는 15,1-39>
하느님의 침묵 -여기 사람 하나 있었네-
요지경(瑤池鏡, Peep show) 세상입니다.
어제 하루의 내 체험이 그렇고 오늘 수난복음이 그러합니다.
봄은 봄입니다. 생명의 봄입니다.
나이에 관계 없이 봄이 되면 마음은 누구나 봄이 됩니다.
이런저런 많은 예화의 묵상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늘만/보아주면 된다.
이른 봄/때되자 피어난
낮은 자리/세송이 노란 수선화꽃
무사(無私)/무아(無我)의 아름다움이다.-
어제 써놓고 즐긴 짧은 시입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전혀 눈길가지 않는
초라한 문가에 자리한 수선화꽃 작은 세송이를 발견하고 쓴 시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이런 자부심으로 살아야
훌륭한 삶에, '여기 사람 하나 있었네'라는 하느님의 찬탄을 받습니다.
-여생(餘生)이 얼마 안 남았으니 도(道)를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세-
뚜렷한 종교는 없지만 도를 닦는 종교심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나에게 끊임없이 좋은 자료를 카톡으로 나누는
56명 사촌중에 하나인 70대에 진입한 해철형님의 조언입니다.
-"불을 먹고도 칼은 차갑다"(칼의 노래)고 생각하는 그의 시쓰기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더 냉철하게 들여다보고 차가워지기 위하여 '불'을 늘 가슴에
가지고 다닌다.-
여기 요셉수도원에 얼마동안 살다가 환속한 강태승 시인이 보낸 시집의
해설중 한 대목입니다. 여기 또 사람 하나 있음을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고파하여 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제 읽은 평화신문(2015.3.29)의 기사도 요지경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여기 사람 하나 있음을 깨닫습니다.
-"신부님, 성금요일에 제가 복사 서는 거 맞죠?“
수원교구 안산 원곡 본당 복사단장이었던 준형이는 여행을 떠나기전
주임신부에게 "여행 다녀와서 꼭 복사를 서겠다"고 기쁜 마음으로 약속했다.
준형이는 가장 중요한 분향을 맡기로 했다. 그토록 복사를 서고 싶어 했던
17살 소년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준형이는 보름 만에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신문 1면 '그 봄이 가고 새 봄이 왔지만' 노란 리본 그림 배경의 기사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하느님은 어디에?'라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기도입니다. 이어 신문 25면도 교회의 요지경 현실을 보여줍니다.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가야금 명인 황병기(79), 소설가 한말숙(84) 부부가
각각 '프란치스코'와 '헬레나'라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
는 기사 하단에는 '프란치스코 영성강좌'를 시작한 예수회 한국 관구장
정제천 신부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섬김의 리더십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제하의 인터뷰기사가 실려 있었고, 우편에는 사제수품 50주년을 맞는
14분의 노령 사제들이 소개되고 있었으며 그 하단에는 향년 66세에
선종한 전주교구 김윤섭 신부, 향년 52세에 선종한 의정부교구 조진섭
신부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희망과 절망이, 젊음과 늙음이,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세상의 축소판 같은 느낌의 신문기사입니다.-
작년 11월 29일 세계 남자수도회장상연합회 제82차 정기총회에 참석한
프란치스코 교황(2014.11.21.-2015.11.21까지 봉헌생활의 날로 정해주심)
은 수도회에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장상단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당부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회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를 보살피며 현실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중심에만 머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소외 계층과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건강하지 못한 이상주의나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니 소외 계층에게 다가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해선 안된다.“-
오늘날의 예언자, 하느님의 침묵을 알아 듣고 그 마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여기 또 한 분 참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어제 '병철' 아우 아들 '주혁'의 결혼식에서 주례사 중 첫머리 부분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잘 들여다보니 신혼부부의 얼굴이 서로 닮았습니다.
사랑하나 봅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습니다. 평생 잘 살 것입니다.
첫째,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고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평화로운
가정입니다.-
라는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순간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에게도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얼굴을
닮아간다는 진리가 놀랍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하느님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수난기 역시 요지경
세상현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선악(善惡), 명암(明暗), 미추(美醜)등
양면성의 약함과 한계가 극명하게 들어납니다. '호산나' 환호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던 사람들은 기대했던 메시아상이 무너지자 좌절감에 "십자가에
못박으라"외치는 폭도로 변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피땀흘리며 기도하던 예수님 곁에 있던 제자들은 잠에 빠졌으며
십자가 처형 현장에선 모두 출행랑을 칩니다.
그런가 하면 끝까지 예수님 십자가 곁에 머문 사랑스런 여인들이 있었고
시신을 내달라고 청하여 곱게 안장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있었습니다.
역시 '여기 사람 하나 있었네'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과연 예수님 수난의 자리에 내 있다면 어느 곳이겠는지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대로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 예수님이심이 환히 계시되는
수난복음입니다. 철저한 하느님의 침묵중에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던,
그러나 하느님께 열렬히, 처절히,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마침내 백인대장의 고백이 수난복음의 절정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아, 바로 마침내 '여기 사람 하나 있었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하여 우리는 감격에 벅차 예수님을 '하느님이자 사람'이라 고백합니다.
성염 교수는 강연 때에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 앞에 보이는 '인류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앞에 보이는
인간의 원형인 참 사람, 인류의 자존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필립비서 찬가가 예수님의 수난의 신비를, 의미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성주간의 시작입니다. 부활 대축일까지 하느님의 침묵은 계속될
것입니다. 겨울의 침묵을 통과한 봄의 화사한 봄꽃들처럼 하느님의 침묵은
성주간의 수난후 주님 '부활의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수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4,1─15,47
<또는 15,1-39>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셨고, 부당한 재판을 받았으며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맹세까지 했던 제자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고, 호산나라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와 율법학자들은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외로웠던 예수님께서는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절망
중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를 만든 교주의 삶을 이토록
비참하게 이야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용비어천가’를 이야기
합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고, 세상을 떠날 때도 많은 사람들이 애도
하였으며, 참으로 위대한 분이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도 허물을 들추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난 잘못은
모두 덮어두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위로와 희망을 준 것들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가톨릭교회는 매년 가장 긴 시간을 정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의 배반을 고백하는 것일까요? 군중들의
무관심을 들추어내는 것일까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 죽음은 2000년 전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 진형형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역만 바뀌었을 뿐, 예수님의 수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들의 타락과 위선을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손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을 묻히지
않으려 합니다. 신학을 이야기하지만 신앙은 없는 건조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재물에는 눈이 밝아지면서 오랜 교회의 전통인
영성에는 메마른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외면하기도
합니다. 오래된 원전은 다수결로 가동되고 있으며, 차가운 바다 속에
침몰한 세월호는 1년이 지나도록 경비가 많이 든다고 인양하지 않으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현장에는 무서워 도망을 간 제자들처럼 종교의
지도자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해야 할 배우자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었던 친구의 등 뒤에서 비수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리당략을
위해서 국민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냄새나는 돈을 받아먹고
국가의 안전을 지켜내는 무기들을 엉터리로 사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서 사람들을 기소하고, 소중한 인권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유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을 멈출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위로와 희망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시몬,
부산의 시몬, 제주의 시몬이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이런 시몬들이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마리아, 데레사, 루시아가 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외로운 이들의 손을
잡아 주는 분들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부터 성주간 피정을 합니다. 좋은 피정이 되도록 기도부탁
드립니다. 부활 대축일 이후에 묵상 글을 올리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제물과 나귀와 겉옷과 혼인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
복음: 마르 11,1-10
< 제물과 나귀와 겉옷과 혼인 >
실화를 바탕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입니다. 미국과 영국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행합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많은 군인이
죽었습니다. 이 때 군입대한 라이언 4형제 중 3형제가 전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결국 오늘이면 아들 셋의 전사 통보를 받을 어머니를 위해
막내아들 라이언을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전투 베테랑인 밀러대위는 상부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라이언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경험 많은 동료들과 라이언이란 군인을 찾아
나서고, 그 찾기까지도 계속 매복해 있는 독일군들에게 형제와 같은
동료를 잃어갑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라이언을 만납니다. 그러나 전투 끝에 밀러대위와
함께 왔던 모든 사람이 죽고 결국 밀러대위도 다리를 폭파하려다 총탄을
맞고 죽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 때문에 함께 왔다가 죽어간
전우들의 처참한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라이언에게 이 한 마디를 합니다.
“라이언 잘 살아야 돼!”
밀러대위는 다가오는 탱크를 막기 위해 권총을 꺼내 힘없이 쏩니다.
예닐곱 발 째 쏘는데 탱크가 터집니다. 아군비행기의 P-51의
폭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아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군의 지원 병력이
온 것입니다. 독일군은 후퇴하고, 라이언은 살게 됩니다.
수십 년 후 백발노인이 된 라이언 그는 가족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왔습니다. 그는 밀러대위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살고 있지?”
“그럼요.”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사람들이 깔아주는 겉옷을 밟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을
구원하라고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나귀는 결국 죽음으로 새
생명을 구하게 될 희생제물을 나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귀가 의미 있게 등장하는 첫 구절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모리야 산이란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의미하고 나 중에 그 위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때 희생제물과
나무를 운반하는 역할을 나귀가 합니다. 오늘 예루살렘 입성과 같은
장면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악 대신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하여
희생제물이 바쳐지게 됩니다. 나귀는 겸손의 상징이고 겸손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분은 당신의 피로 먼저 우리 성전을 정화시켜 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나귀는 겸손 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임을 당할 하느님의
어린양을 나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에 탄 그 제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판관기에 나옵니다. 한 레위인에 베들레헴 여자와 혼인하였다가 그
여자를 데리고 베냐민 지파가 속한 기브아를 지날 때였습니다. 하룻밤을
그 동네에서 묵었는데 불량배들이 그 베들레헴 여자를 능욕하여 결국
죽고 맙니다. 그 죽은 여인을 나귀에 태우고 돌아와서는 열두 조각으로
시신을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내어 결국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만하고 있던 베냐민 지파는 나머지 지파들에게
거의 멸살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아벨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더 이상 그 피를 흘리게 했던 카인의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처럼 나귀에 얹힌 제물은 결국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기 위해 하느님께서 일부러 내어놓으신 희생양인 것입니다. 그
희생양의 피가 우리 땅에 뿌려지게 되면 우리 땅에서 죄가 사라지게
됩니다. 나귀는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싣고 우리
땅으로 들어와 그 피를 뿌려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게 만드는 도구인
것입니다.
사울이 이미 폐위될 운명에 처해졌을 때 기름부음 받은 다윗이 사울에게
보내졌습니다. 사울은 이제 사라져야 할 또 다른 왕인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의 아버지는 나귀에 ‘빵과 포도주’를
실어 다윗 편에 사울에게 보냅니다.(1사무 16,20) 사울이 다윗을
맞아들이고는 악령이 물러갔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결국 악령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한 사울은 멸망하고 그 땅에 빵과 포도주의 제물인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귀가 나르는 것은 악을 없애는 하느님의 희생제물,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오늘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오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그렇다면 바로 그런 신비가 이루어지는 도구,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루어지게 하겠고
그 희생의 제물로 우리 땅에 죄를 없애시고 당신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나귀로서 그리스도를 등에 메고 우리 각자의 성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셔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겉옷’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이들이 ‘겉옷’을 나귀 위에 얹고 그 겉옷을 깔았다는 것을 되새겨야합니다.
성경에서 ‘겉옷’은 자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전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모든 능력을 부여해 줄 때 그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줍니다.(1열왕 19,19)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치자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1열왕 2장) 마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듯이, 계약의
궤로 요르단강 물을 갈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듯이, ‘겉옷’은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을 상징하는데 그 능력으로 주님이 들어오실 문을
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물과 물을 가르셨고 그 안에 동물들과 아담이 살게
하셨습니다. 물과 물을 나눈다는 것은 아담이 살 공간을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신랑이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루살렘은 신부이고
하와입니다. 마치 성모님께서 당신 안에 가득하신 은총으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당신 마음의 성문을
열어 신랑인 그리스도를 당신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을 새로운 왕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예부터 왕을 맞이할 때는 자신들의 겉옷을 까는 풍습이 있었는데
(2열왕 9,13) 팔마가지를 흔드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 왕이 오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분의 길 앞에 까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버리는 완전한 순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나귀 위에 탔다는 것 자체가 당신 전부를
희생한다는 의미이고, 그분을 맞는 신부도 자신의 전부인 겉옷을 깔아야만
그것을 밟고 들어오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혼인 의복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의복으로 신랑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의복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장면이 바로 성전입성입니다. 그분이 우리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려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전부 내어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혼인이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이 혼인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지어지게
태초부터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귀에 탄 희생제물로서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모신 성령의 힘으로 내 자신을 내려쳐서 그분의 뜻이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순결한 신부의 모습을 갖추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겉옷을 깔지 않으면 신랑은 돌아가 버립니다.(아가 5 참조) 그리고 그
겉옷은 파수병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내 겉옷을 깔 용기를 내야합니다.
그러면 신랑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늘 힘님 뜻 따르면 영복의 삶을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수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4,1─15,47
<또는 15,1-39>
하늘 힘님 뜻 따르면 영복의 삶을
전 국민의 안녕과 개인만의 안녕 둘 중 어느 것이 중요한지 다들 알지요.
공익과 개인적인 이익도 그래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다반사 들어나네요.
눈 딱 감고 꿀꺽해도 체하지 않고 지났다면 하늘의 힘님이 가만 둘까요?
하늘 힘님은 전 국민이나 공익의 편이란 걸 알고 믿고 살아야 되지요.
세상먼지로 오염된 내 뜻 말고 강하고 맑고 곧은 하늘 뜻 따라 말입니다.
흙덩어리 육체가 낸 기분 말고 하늘 힘님 뜻 따르면 영복의 삶 얻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코 14,36)”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성지주일
2015년 나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수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4,1─15,47
<또는 15,1-39>
성지 주일 (2015년 03월 29일)
오늘부터 위대한 한 주간, 거룩한 주간,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일주일에
걸쳐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최후만찬을 하시고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의 첫걸음을 주님은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성
예식에서 들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사는
본거지입니다. 죽음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도성을 향해
길을 떠나 오늘 드디어 이 도성 안으로,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중심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큰 소리로 외치며 주님을
환영합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기쁨과 승리를
표현하는 외침입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다윗의 나라’는 유대인이
염원하던 나라였습니다. 민족적인 열망이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이러한 꿈을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위험 인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실 때 이미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비롯한 적대자들이 염탐하러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생활
초기부터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적대 세력의 본격지로 등장합니다.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그토록 열렬히 환호하던 군중들도 점차 태도를 바꿉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한패가 되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살인 동조자로 돌변합니다.
환호에서 분노로 바뀝니다. 힘없이 체포되어 죄수로 자신들 앞에 선
예수님을 보자, 자신들의 꿈이 틀어졌다고 죽이려고 합니다. 먹이를 눈
앞에 둔 짐승처럼 이를 갈면서 악랄하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소외되어 죽음의 십자가를 향해 홀로 걸어가십니다.
우리 마음에도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주님을 거부하는
도성이 분명 있습니다. 예수님께 우리 희망을 두고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고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수도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틀어지면 주님을 배반하지는 않습니까?
이기적인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버리지는 않습니까?
양철 냄비가 금방 식어버리는 것처럼 주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이 퇴색되고
점차 식어가지는 않습니까? 주님 아닌 다른 것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은 우리 마음의 예루살렘에서 다시 한번
더 철저히 고립되고 다시 한번 더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적대자인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버려도 그분은 절대 우리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그 열정은 더 뜨거워지지 결코 식지않습니다. 결코
주님은 당신의 적대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용서하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예루살렘 한 가운데 십자가가 세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의 예루살렘은 생명의 새 예루살렘, 미움의 예루살렘은 사랑의 새
예루살렘, 거부의 예루살렘은 받아들임의 새 예루살렘으로 변모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새 예루살렘의 시민들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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