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찬밥' 먹다 젊은 영혼이 여윈다
집을 나와 자취하는 20대들은 주로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운다. 도시락 등 음식값이 여느 식당보다 더 싸기 때문이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라는 경구 앞에서 20대는 할 말이 없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는 20대가 워낙 드물어서다. 이 연령대 특유의 불규칙한 생활 습관 탓만은 아니다. 폭등하는 등록금ㆍ집세를 감당하려면 그중 만만한 식비부터 줄일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사회 분위기도 끼니를 챙기기 쉽지 않게 만든다. 최근 물가 인상으로 인해 식당 밥값이며 식재료 값이 오르면서 먹는 게 갈수록 부실해지고 있다는 이들 20대를 만나보았다. 이들의 일주일치 식단도 들여다보았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에 내리니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유혹의 '델리만쥬'다. 헤드셋을 낀 젊은이는 그 옆 행상에서 양념이 잘 밴 1000원짜리 닭꼬치를 고르고 있었다. 김애란의 소설 <자오선을 지날 때>가 생각났다. 소설 속 20대 주인공도 '학원강사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기 위해 저녁을 굶기 일쑤였고, 지하철역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에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델리만쥬'는 시작이다. 역 앞 육교를 건너면 각종 음식 냄새가 한데 뒤섞여 발길을 붙든다. 늘어선 포장마차 10여 대에서 파는 메뉴가 다양하다. 주먹밥, 떡볶이, 심지어 닭갈비밥도 있다. 가격은 1000~2000원대. 이곳을 애용하는 이들은 주로 20대 고시 준비생이다. 이들에게 포장마차 음식은 간식이 아니라 끼니다.
3월9일 오전. 1300원 참치김치밥부터 시작하는 주먹밥 포장마차가 특히 바글바글했다. 줄을 선 한 공무원 시험 준비생은 "수업 전에 빨리 때우려고 들렀다. 그나마 밥이고 가격도 싼 편이다"라고 말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고시생들 덕분에 비교적 먹을거리가 싼 노량진이지만 물가고를 못 이겨 제육덮밥 가격을 500원씩 올린 식당도 더러 있다.
20대 3중고 '등식주(등록금ㆍ식비ㆍ주거비)' 시리즈의 세 번째는 식비이다. 주거비에 이어 생활비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식비, 그리고 식생활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시사IN>은 20대의 식생활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20대 10명의 일주일치 식단을 받았다. 이들의 엥겔계수를 파악하려 했지만 지출 항목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쉽지 않았다. 다만 집세와 공과금을 빼고는 '거의 먹을 것에 지출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식단표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빵, 라면, 카레 등 단품 식사가 많아 분류할 게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한 안효상씨(가명ㆍ24)의 아침은 주로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이다. 최근 물가가 오르면서 700원하던 것이 800원으로 오른 게 불만이다. 안씨는 "밥다운 밥은 아니지만 그저 위장을 채운다는 느낌으로 끼니를 때운다"라고 말했다. 평일에는 이렇게라도 먹지만 주말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늦잠을 잔다. 아침을 건너뛰려는 요량이다. 밤늦게 배가 주릴까봐 일찍 잠들기도 한다. 식비 부담에 '아침형 인간'이 되기도 쉽지 않다.
주거비를 제외한 안씨의 한 달 생활비는 44만원. 이 중 휴대전화 요금, 단말기 가격 등을 제하면 30만원이 남는다. 이 돈은 거의 식비로 지출한다. 할인된 가격으로 학생식당 식권 30장(6만원)을 구입해 낮에는 주로 식판에 담긴 밥을 먹는다. 책도 안 사고, 버스도 타지 말아야 나머지 돈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 데이트할 때도 여자친구만 커피를, 자신은 물을 마신다.
주말 이틀 동안 라면으로 때워
푸짐하게 먹는 경우는 주로 '얻어먹을 때'이다. 그가 자취를 하는 서울 중구 필동 동국대 앞은 장충동 족발로 유명하다. 구제역 파동 이후 소(小)자 메뉴가 2만5000원에서 3만원으로 5000원 올랐다. 소문난 맛집이 집에서 가깝지만 호사를 누릴 기회는 많지 않다. 지난 2월24일, 그는 간만에 포식을 했다. 점심은 지인에게 족발과 부침개를 얻어먹었고 저녁 땐 은사가 과메기와 회를 사주었다. 그는 "자취하면서 얻어먹는 노하우가 생겼다. 더치페이하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그렇게 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라고 말했다. 20대들의 식습관이 부실한 것은 일차적으로 먹는 데 쓸 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주머니가 가볍기 마련인 청춘이어서만은 아니다. 점점 오르는 등록금ㆍ집세 등 부담이 이들의 식단을 더 쪼그라들게 만든다. 쓸 수 있는 돈이 한정돼 있으니 가장 '만만한' 식비부터 줄이게 되는 것이다.
자취만 7년째인 김세희씨(가명ㆍ26)의 집세는 월 34만원. 지금은 졸업했지만 지난해까지 등록금으로 매 학기 340여 만원이 나갔다. 동생도 자취 생활을 하기에 더는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가 없어서 과외 아르바이트 2개를 하면서 등록금에 보탰다. 생활은 점점 쪼들렸다. 한 달을 10만원으로 나야 했던 시기,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 약속이 있다며 빠져나와 자취방에서 라면을 먹거나 그냥 굶은 경험도 여러 번이다. 주말에는 이틀에 세 끼를 라면으로 때우기도 했다. 자장맛 라면, 그냥 라면, 계란 띄운 라면이었다. '헝그리 정신'이 절로 생겼다고 한다. 등록금과 주거비, 생활비까지 하면 아껴도 6개월간 800만원 가까이 들었다. 그래서 김씨는 포항 고향집에 내려가면 며칠이고 과일과 채소 음식만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야겠다는 강박감에서다.
김씨는 집 앞 편의점의 기획상품을 꿰고 있다. 행사 기간에 삼각김밥을 사면 음료를 100원에 끼워준다. 2500원짜리 도시락이나 레토르트 식품(완전 조리한 상태로 밀봉ㆍ살균한 식품), 한입거리인 핫바 등을 애용한다. 편의점 'GS25'의 2월 조사에 따르면 전국 매장 100곳의 도시락 매출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3.1%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이 싼 '찬밥'으로 대신하는 사람이 늘어난 결과다. 가난한 자취생은 그중에서도 주요 고객이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1인 가구에 불친절한 사회 환경도 빈곤한 식단을 부채질한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자취를 하는 성서호씨(26)의 식단만 들여다보면 '웬 남자가 이렇게 입이 짧을까' 싶을 정도다. 아침은 항상 거르고, 커피나 김밥 한 줄 정도로 낮 시간을 보낸 뒤 저녁 술자리에서 한꺼번에 먹을 때가 잦았다. <시사IN>의 부탁으로 식단을 작성하면서 '이렇게 먹고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 2월23일,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찌개용 돼지고기 4110원, 두부가 1200원. 나머지 재료는 집에 있는 걸로 충당했다. 그래서 든 돈이 5310원. 인근 식당의 김치찌개 값 4000원보다 비쌌다.
식단을 작성한 열 명 중 가끔이라도 직접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은 4명이었다. 기껏 장을 봐서 요리를 하려고 해도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 썩혀 버리기 일쑤다. 신촌에서 자취를 하는 김송씨(가명ㆍ26)도 자취 생활 초기 많은 음식을 내다버렸다. 이제는 아예 요리를 하지 않는다. 고기를 구우면 기름 냄새가 며칠간 방에서 가시지 않아 고기는 먹지 않는다. 과일을 먹는 일도 거의 없어서 모임이 있을 때면 1차는 고깃집, 2차는 과일 안주를 고집했다. 그렇게라도 과일을 섭취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다. 대형마트는 끼워팔기 위주의 전략이라 1인용 가구를 배려하는 상품은 적다. 김종남씨(고려대 4학년)는 시간이 아까워서 요리를 기피한다. "장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하다보면 2시간이 훌쩍 간다." 바쁜 대학생에겐 어쩌다 가끔 누리는 호사다.
자취생들의 식습관은 주거 환경과도 연관이 있었다. 비정규직 학원강사인 채린아씨(가명ㆍ26)는 직장 근처에서 주로 분식류로 끼니를 때운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어도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발코니에 있다보니 피하게 된다. 겨울철이면 발코니가 너무 추워 그곳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국을 끓여두어도 금세 꽁꽁 언다. 그녀도 나트륨이 많이 든 바깥 음식이 몸에 안 좋은 줄은 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가끔은 크림과 설탕이 들어간 커피믹스로 허기를 달랠 때도 있다고 채씨는 말했다.
'찌거나 빠지거나.' 영양 불균형 상태의 자취생들이 자주 겪는 몸의 변화를 요약한 말이다. 흑석동에서 자취 생활 3년째인 양효비씨(가명ㆍ22)는 그간 10㎏이 빠졌다. 처음에는 다이어트되는 것 같아 좋았지만 나중엔 제대로 먹어도 계속 살이 빠져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경북 고향 집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은 크게 걱정을 하신다. 그의 하루 식단에서는 빵이나 과자류가 빠지지 않았다. 반대로 찐 경우도 있다. 5개월 정도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을 뿐인데 김명아씨(27)는 4㎏이 쪘다. "채소를 거의 못 챙겨먹고 음식을 짜게 먹으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게다가 방에서 혼자 먹을 때 노트북으로 드라마 같은 걸 보면서 먹다보면 포만감을 느끼기 힘들어 음식에 자꾸 손이 간다고 했다.
만성 장염 시달리며 우울증 걸리기도
이지혜씨(26)는 좀 더 심한 경우다. 4년 전 학창 시절, 신촌에서 자취를 하면서 장염을 심하게 앓았다. "그전에는 장이 예민한 걸 잘 몰랐는데 바깥 음식을 많이 먹다보니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증세가 너무 심해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니 만성 장염이라 했다. 이씨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자취하는 친구들이 위나 장 쪽에 한 가지씩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식습관은 신체 변화만 동반하는 게 아니다. 2월 방학 기간 중 식단표를 작성한 양효비씨는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일주일 스물한 끼 중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은 건 겨우 네 차례였다. 혼자 골방에서 밥을 먹다보면 우울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고시원에서 산 경험이 있는 송정인씨(27)는 "처음엔 혼자 밥 먹는 게 편하고 좋았지만 갈수록 외롭고 우울해졌다. 밖에서 혼자 먹는 것과는 다르다"라며 사흘간 밖에 안 나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시사IN>에 식단을 제공한 10명 중 유일하게 '끼니다운 끼니'를 챙기는 사람은 조은정씨(22)였다. 아침은 식빵 토스트 1조각, 달걀 프라이 1개, 사과 4분의 1개, 점심은 소고기파프리카볶음과 오이, 저녁은 잡곡밥ㆍ된장찌개ㆍ불고기ㆍ김치로, 신경 써서 먹었다. 그가 혼자 살기 시작한 건 2년6개월 전. 기숙사에서 산 지 1년째 되던 해, '해먹는 밥'이 그리워 퇴소했다고 한다. 기숙사 특성상 모든 걸 외식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인스턴트를 먹으면 속이 더부룩한 게 소화가 잘 안 되었다. 건강에 자신이 없어진 것이 잘 챙겨먹는 계기가 됐다.
식비는 어떨까. 그는 "가끔 해먹으면 굉장히 비싸서 그냥 사먹는 게 낫다. 그런데 한번 해먹기 시작하면 남은 재료가 다시 쓰이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된다"라고 말한다. 조씨는 음식에 양념을 적게 넣는다. 소화가 훨씬 잘 된다. "대형마트에서 많이 사면 얹어줘서 싼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좀 비싼 것 같아도 적정량을 사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일주일간 자신의 식단을 작성해본 20대의 반응은 다양했다. 초콜릿이나 빵 따위로 식사를 대신할 때가 많은 송준영씨(26)는 "식습관이 생활습관의 큰 부분이라는 걸 알았다. 생활이 불규칙하니까 식생활도 엉망이다. 지금 들이는 비용으로도 지금보다 더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채린아씨는 식단일기를 돌아보며 비타민제라도 챙겨먹기로 결심했다.
가뜩이나 열악한 20대의 식생활은 최근의 물가고로 더 위협을 받고 있다.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대학가 학생식당마저 가격을 인상하는 추세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여기 덧붙여 민병문씨(24)는 대학가 주변의 상권 변화에도 불만을 토로했다. "3000원짜리 백반집이 있던 자리를 파스타집 등 체인점이 채우고 있다. 싼 밥집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안효상씨는 '오늘 굶은 아침을 내일 먹을 수 없다'라는 한 구호단체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등록금 부담이 학창 시절은 물론 졸업 후 삶의 질로까지 연결되듯 부실한 식생활 또한 부실한 삶의 질과 직결된다는 사실이 씁쓸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음식혁명>이란 책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는 것도 삶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김세희씨는 이렇게 반문했다. "내가 과연 먹을거리를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왔나? 그냥 골방에서 살아남기 위해 뭔가를 욱여넣는 느낌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 출처 시사인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