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貴人(귀인)”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귀족(貴族)’은 존재할 수 없지는 귀족과 귀인은 다른 개념입니다. 귀족은 ‘혈통, 문벌, 공적 등에 의해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가지게 된 사람’인데, 현대 대한민국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귀족을 인정하지 않지만 귀인은 사회적으로 묵인하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통령 부인인 ‘영부인’정도일 것 같습니다.
원래 ‘영부인(令夫人)’이란 다른 사람, 특히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3인칭으로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즉,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부인을 품위 있게 높여 일컫는 말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말인데 통념적으로 ‘대통령의 부인’을 호칭할 때만 주로 쓰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인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인 공덕귀 여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 순이고, 그 뒤로 이순자, 김옥숙, 손명순, 이희호, 권양숙, 김정숙, 김건희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남편이 대통령의 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치적인 언행을 일삼은 분들도 있고, 대통령의 재임시절에도 전혀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女史(여사)’는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 부인이나 현직 대통령 부인에게 써도 무례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대한민국의 전, 현직 대통령 부인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그 중의 한 분에 대한 따뜻한 미담이 있어서 같이 봅니다.
<1968년 7월 3일 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굴까?” 그는 교사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 아냐?”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생 많으세요”라고 인사한 뒤 가져온 구호 물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해 호남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현장을 찾은 육 여사는 논두렁길로 걸어갔다.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가 있었다. 올라서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뒤덮인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를 냈다. 그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다가갔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들을 어떡하지….”
육 여사는 소리 소문 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67년 말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정부·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모두 아무 말을 못 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는 전국 87개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그는 한센인들을 찾아가 손을 덥석 잡고,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육 여사는 검소했다. 이애주 전 의원의 증언. 육 여사가 흉탄에 스러진 74년 8월 15일 서울대병원 간호사였다. “서거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
청와대에는 그 흔한 꽃꽂이도 못 하게 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서거 후 이렇게 회고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다들 가난하게 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사치 행각을 벌였다. 명품 구두만 3000켤레가 넘었다. 육 여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의 부인이었지만.
그는 사려 깊고 겸손했다. 가수 이미자씨 레코드판 한 장을 산 것이 알려진 후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사주세요”하고 물건을 내놓았다. 육 여사가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겠네요”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김두영 전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의 증언. “육 여사는 권력을 즐기는 행세로 국민의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늘 조심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을 정도였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민원 처리는 자기 일이라고 여겼다. 매일 50여 통의 민원 편지를 뜯어보고 답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절대 손대지 마라”고 하고, 민원을 직접 챙겼다. 도봉동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소년의 편지를 읽고는 주소도 모르는 그곳 일대를 직접 뒤졌다. 기어이 소년을 만나고는 아이스크림 장사에 필요한 장사 밑천을 대준 일도 있었다.
잡음이 나지 않도록 주변을 늘 단속했다. 청와대 내 야당을 자처해 대통령이 알아야 할 일은 직접 전달했다. 한 번은 박 대통령 친척이 운전하다 사망사고를 냈다. 다들 쉬쉬하고 덮으려고 했는데, 육 여사가 그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바람에 그 친척은 구속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록에 “국민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린 분”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에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육 여사의 인품에는 고개를 숙였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육 여사 영결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김 추기경은 훗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국모(國母)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분”이라고 썼다. 서슬 퍼런 독재 시절, 박 대통령의 철권(鐵拳) 이미지를 육 여사가 절묘하게 보완한 셈이다. 서거한 74년을 기점으로 박정희 정권이 서서히 무너진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뒤 대통령 부인이 여럿 나왔다. 이희호 여사처럼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훌륭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육 여사만큼 온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품격 있게 대통령 부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육 여사가 생각나는 2024년 새해 아침이다.>중앙일보. 고현곤 편집인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
프란체스카 여사, 공덕귀 여사, 육영수 여사, 홍기 여사는 제가 어렸을 때거나 젊은 시절에 보았던 분들이고, 그 뒤에 분들은 제가 성인이 돼서 본 분들입니다.
제 기억에 대통령의 부인으로 가장 귀감이 되었던 분은 단연 고(故) 육영수 여사이셨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대통령 부인도 구설수에 자주 오르지만 바로 직전 대통령 부인도 그보다 더 많은 구설수에 올랐던 걸로 생생히 기억합니다.
귀인은 단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자기 자리에 맞게 격에 맞는 언행을 해야 귀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힘들면 현명한 재상을 생각하고 집안 살림이 어려우면 현명한 아내를 생각한다는(國難)思賢相, 家貧)思賢妻) 말이 요즘 우리 국민들 마음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