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숨을 버리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 예수님의 십자가 혁명과 ‘자아(自我)’라는 우상
이사 1,10-17; 마태 10,34-11,1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24.7.15.
예언자로서 이사야가 제기한 문제는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에 관한 근본 문제였습니다. 남 유다에서 아모쓰의 아들로 태어나(이사 1,1) 남유다 왕족이었던 그가 자신의 조국 남 유다왕국의 백성과 유다교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쓴 소리를 외쳤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이사 1,10)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타락과 부패의 소굴로 알려진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될 만큼 비판적으로 지칭되는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은, 이사야가 활약하던 당시에 하느님께 번제물을 살라 바쳐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종교적 제의를 다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런 우상 숭배적 종교 관행에 대해서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1.1316)
이렇게 이사야는 인간 관계의 행실들과 사회 질서의 개혁이 없이 형식적으로 바치는 제사는 집어치우라고 일갈했습니다. 인간 관계의 선행을 실천하고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며 고아와 과부 등 소외된 이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 질서의 개혁이야말로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의 제물이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일, 특히 그 중에서도 힘 없는 작은 이들이 존중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정통 노선을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 전통적인 종교로 알려져온 유다교의 종교적 제의를 근본적으로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이상 하느님의 뜻대로 인간 관계와 사회 질서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사인 것이고, 이를 위한 희생으로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사에 바쳐져야 하는 희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땅을 굽어보시는 하늘에 계시지만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하늘에 계신 이유는 어느 특정한 땅의 편을 들지 않기 위해서이고, 모든 땅에서 당신의 뜻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땅에 내려왔다는 뜻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땅 위에서 하늘을 실현하는 행위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공간으로서나 사람들의 관념 속 하늘에 갇혀 있던 하느님을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땅 위에로 모셔들이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변혁이었습니다. 그 일에 희생이 요구된다면 그 희생을 십자가로 받아들여 기꺼이 짊어지라는 것이 예수님의 요구였습니다.
이렇듯 종교의 인간화, 하늘의 지상화 작업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형 사건입니다. 사회 전체의 질서가 공정해지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선행을 베풀며, 그 중에서도 힘이 없어서 억압을 받거나 소외당하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보살피는 선행은 하느님의 으뜸가는 관심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관심사를 행하라고 신앙인들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십니다. 이 영이 이끄시는 데로 따라가는 신앙인들은 그 선행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늘을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제사를 바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 있는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와 종교적 영향력을 독차지하려 한다면, 그러한 세상의 거짓 평화에 대해서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4.38-39)
그러니까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거짓 평화를 깨뜨리는 칼은 거짓 평화에 안주하고 있는 이들과 기꺼이 맞서는 일이요, 그들이 설사 집안 식구라고 하더라도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결연히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정작 행해야 할 참된 제사와 희생은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께 향함으로써 작은 이들을 위한 선행을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분부의 결론으로서 철저한 복음적 가난을 전제로 한 가르침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스승이 실천했던 이 복음적 가난을 제자로서도 올곧게 따르라고 요청하셨음을 감안하면, 버려야 할 것들은 이 복음적 가난을 살기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적 가난의 진리를 무시하며 세상에서 우상으로 행세하는 것들은 권력이나 재물, 지식이나 명예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 놓고 섬기는 자아마저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버리라고 단호하게 분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악령은 이 거짓 자아를 참된 자아라고 유혹하면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인생의 현실을 알려주는 진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현장에 파견하시면서 대적해야 했던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악령이었습니다. 권세가든 재력가든, 지식인이든 사회적 명사든 또는 평범한 일반 백성이든 참된 자아를 회복하여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의 우상들을 좇아가던 거짓 자아를 참된 자아로 착각시키고 있던 악령이었습니다. 이 악령은 각종 우상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유혹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본이든, 권력이든, 사회적 영향력 또는 기복신앙으로 얻으려는 현세적 축복이든지 간에 악령은 온갖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우상을 내세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려는 제자들도 악령과 맞설 수 있도록 작전의 개요를 알려주셔야 했고, 전투의 승리 비결은 악령이 미끼로 쓰는 힘에 굴복 당할 수도 있는 육신 생명을 두려워하지 말 것과, 오직 하느님께서만 개입하실 수 있는 영혼 생명에 대한 통제 요령을 알려주셔야 했으므로 그런 말씀으로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이 파견 수칙을 충실히 따랐던 제자들은 아직 사도로서 충분히 양성되지 못한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악령을 쫓아낼 수 있었다고 귀환 보고를 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사실 예수님께서는 과거 이집트 노예살이 시절에 모세가 동족 히브리 노예들과 더불어 감행했던 탈출과 해방의 과업을 이제 민족적 차원을 넘어서서 온 인류의 해방을 향하여 시작하시던 참이었습니다. 이는 모세의 파스카 과업이나 이사야 예언자의 파스카 과업과는 차원과 범주를 달리하는 파스카 과업이었습니다. 모세와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태양신이나 스핑크스 같은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사실 그들이 맞서야 했던 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이런 우상들을 앞세워 통치하던 파라오였습니다. 파라오야말로 신격화된 인간 우상이었습니다.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가나안에로 해방된 이스라엘은 또 다른 우상을 만났습니다. 주변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이었는데, 파스카 과업에 대한 의식이 흐려지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마저 흐려져 가던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헛되이 경신례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당시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의 도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당시의 유다 왕국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렸기 때문에 이사야는 그 이름을 소환해 가면서,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일깨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그 신앙의 최고선에서 나오는 공동선에 따라서, 공정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었고 억압받는 이들을 보살펴줄 수 있을 것이었으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도 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로 사도 바오로도 에페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0-12)
요컨대, 우리가 복음적 가난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대적해야 할 상대는 근본적으로는 악령들이며, 직접적으로는 이 악령들이 자신의 민낯을 가리려고 내세운 우상들입니다. 이 우상들은 온갖 힘으로 나타나는데, 그 가면이란 경제적인 힘으로서 돈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힘으로서 권력이기도 하며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힘으로서 사회적 영향력이나 인기이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 대신에 자기자신의 뜻을 앞세우려는 원죄적 성향이 발동하면 자아가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자신의 돈이나 권력, 위신과 자존심이 하느님의 뜻을 가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상에 대한 성찰에서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은총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이룩하시고자 하는 참된 평화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온갖 우상을 배격하고 작은 이들을 섬기는 희생을 하느님께 바치는 십자가의 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