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든
민정기 비서관을 기억하실겁니다.
조갑제닷컴에 전재된 민 비서관의 "대한언론 기고문"을 보냅니다.
다시 한번 운명적인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전두환 前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관 閔正基의 운명
’내세가 있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생을 얻어 태어나신다면 이 땅에는 오지 마십시오‘-가슴 속에서 이 한 마디만 토해낼 수 있었다.
閔正基(대한언론 기고문) 2023-09-17
(조갑제닷컴에서 전재)
대한언론/〈살며 생각하며〉
‘운명’ :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전두환 대통령 옆에 육사 출신, TK는 다 어디 갔냐. 12.12, 5.18이나 정치자금 문제 같은 것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네가 왜 수비수 노릇하고 있느냐고...”
60여 년을 아무 말이나 터놓고 지내는 중학 시절부터의 친구 서너 명이 어느날 점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옆자리 친구가 끼어들었다.
”힘든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출세했잖아. 5공 때 높은 벼슬, 좋은 자리 차지했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우리 기억 속에 뚜렷이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시절 사람들 이름을 들어도 누군지 모를 걸. 그런데 ’민정기‘ 하면 사람들이 다 알잖아. 그게 출세지 뭐야.“
”출세한 건지 고생길을 찾아들어간 건지 모르지만 어쨌건 그것도 다 제 팔자겠지 뭐. 네 사주가 그런 거 아냐.“
그 얘기는 그렇게 ’사주팔자‘로 짤막하게 결론을 맺고 끝났다.
◇...1988년 6월2일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해서 둘이 만났다. 그 시점은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한 후 100일쯤 지난 때였고, 나는 후임 노태우 대통령의 비서실에 남아 있었지만 이미 떠날 의사를 밝혀 놓은 상태였다. 全 전 대통령은 이른바 ’5공비리‘ 기사가 모든 언론매체를 도배질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방문길에 나섰지만 동생 전경환씨가 구속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한 직후였다. 안 전 경호실장은 전 전 대통령의 뜻을 전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직 대통령은 예우에 관한 법에 따라 1급 비서관을 둘 수 있는데 지금 비어 있다. 그 자리를 맡을 생각이 있는지 생각해 봐달라.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오라고 권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의사를 묻는 거다. 全 대통령은 가족회의를 갖고 의견을 들어본 뒤 결정해야 하고 특히 부인의 의견이 중요하니 반드시 상의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잠시의 짬도 두지 않고 바로 말씀드렸다.
”내가 비서관으로서 대통령으로 모시던 분이 다시 날 찾으시는데 생각해보고 뭐고 할 일이 있겠습니까. 가족회의는 또 뭐고...ㅡ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찾으신다는 건 그만큼 나를 믿으신다는 뜻이니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틀 후 안 전 실장은 ’보고를 드렸드니 기뻐하셨다‘고 전화했고, 연희동 사무실에서 연락이 와 다음날인 6월5일(토) 전 청와대 출입기자한테 길을 물어 연희동을 찾아갔다. 그러니까 이번 6월5일은 그날로부터 꼭 35년이 되는 날이다. 그 35년간 평균 1주일에 한 번 연희동을 방문했다고 해도 2000번은 갔던 것 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연희동‘과 관련된 언론보도 뒤엔 으레 ’민정기‘란 이름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연희동에는 내가 앉을 책상 의자가 있어본 적이 없다. 나에게 그곳은 ’방문지‘였지 ’집‘도 아니고 ’사무실‘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건 ’민정기‘는 ’전두환’ ‘연희동‘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만나자고 할 때 나는 용건이 무엇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동안 1급 비서관 자리엔 청와대에서 全 전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몇몇의 후보가 있었지만 모두가 사양(?)하는 바람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제의가 오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답변 내용이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날 安 전 실장이 전해준 全 전 대통령의 말씀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고
”...반드시 가족회의를 열어 그 의견에 따르라“는 말씀, 거기다 ’차관급의 비서실장으로 오라고 하고 싶지만, 법에 1급으로 못박고 있어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장래가 보다 확실히 보장되는 더 좋은 자리를 제시하며 나에게 선택하라고 했어도 나의 결정은 같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全 대통령의 말씀 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곳을 피해나간다는 것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
◇... 全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연희동으로 달려간 2021년 11월23일 아침 그 어른의 영전에 섰을 때 나는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눈물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세가 있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생을 얻어 태어나신다면 이 땅에는 오지 마십시오‘-가슴 속에서 이 한 마디만 토해낼 수 있었다. 그 어른의 1주기 때 이순자 여사에게 그 일을 말씀드렸더니 이순자 여사는 한 마디로 ’다시 오실 거예요.‘ 하셨다. 그렇다. 청마 유치환은 ’너에게‘라는 시에서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고 읊었다. 10.26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통령이 된 후 선진국 도약의 토대를 쌓기 위해 불철주야 걸어온 길, 그리고 그로 인해 퇴임 후 30여 년간 겪어야 했던 그 집요한 공격과 박해, 모멸조차도 그 어른은 ’진실로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해서는 안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全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은 역사가 불러내 사역한 하나의 도구였는지도 모른다고 술회했다. 최규하 대통령도 언론 인터뷰에서 10.26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면서 ”...역사 속에서 개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하기 싫어도, 버티어도 안할 수 없는 ...모든 게 숙명..“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관‘ - 친구들은 ’사주팔자‘를 말했는데, 나로서는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