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눅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배(worship)란 과연 무슨 뜻일까요? 단어의 뜻대로라면 누군가를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기대하십시오! 엄청 멋진 뜻입니다. 두둥둥~~~
.
.
.
바로 "입맞춤"입니다.
(원어 사전 링크 https://www.blbclassic.org/lang/lexicon/Lexicon.cfm?Strongs=G4352&t=KJV )
'경외함의 뜻으로 누군가의 손에 입맞추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 뜻이며 예배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함축하여 담고 있습니다. (이유는 아래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교회에서 하는 순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미국에서 '워쉽'이라고 하면 보통 찬양을 말합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는 그것을 "경배와 찬양"으로 바꾸셔서 조금 더 원뜻에 가깝게 가려고 하셨는데 아무튼, 예배의 원어의 뜻은 입맞춤입니다.
보통 유럽에서 신사들이 숙녀의 손에 입을 맞추는, 그런 입맞춤인데 여기 이 마리아는 예배의 헬라어 원뜻을 공부했는지 향유를 붓기 전에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눅 7:38). 또 이후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입맞춤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이 여자, 마리아... 생각할수록 참 멋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귀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친밀하게 아는 '영생'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한 지식에서 이러한 예배의 행위가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저 제자들이 반응입니다. 마리아가 자기 돈으로 산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건데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간섭하고 책망까지 하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별로 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반응을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을 통해 느낀 죄책감과 정죄감을 저런 식으로 처리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돈의 "요상함"에 대해 한번 얘기를 해 볼까요? 우리가 뭔가 값을 치를 때, 보통은 이미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값(소비자 가격)에 동의를 하면 그 돈을 내고 구입을 하는 것이고 동의를 안 하면 구입을 하지 않습니다. 가격은 상대방이 정해 놓았지만 구입의 여부는 내가 정하기 때문에 그 가격에 동의함을 통해 실제로는 구입하는 사람이 (수동적일지라도) 그 가격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헌금(giving, 모든 종류의 주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도 하나의 예배입니다. 헌금은 상대방이 액수를 정해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 마음이 드러나는 영역입니다. 아예 안 할 수도 있고, 엄청 적게 할 수도 있고, 누가 생각하면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giving은 처음부터 내가 값을 정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님들 중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헌금의 영원한 가치를 몰라서 헌금 생활을 잘 안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땅에서 하는 헌금이지만 천국에 보물을 쌓아 놓는 것이라는 영적인 현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헌금이란 것이 다만 이 땅에서 하는 행위며 이 땅에서 끝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헌금은 예배의 한 형태로써 영원한 영향력을 미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헌금통에다 향유를 붓지는 않습니다. 돈을 내죠. 그렇게 볼 때, 마리아가 부은 저 향유는 오늘날 우리의 헌금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 제자들이 향유를 보고 바로 돈 얘기를 한 것입니다!
이렇듯 헌금(이 경우 예배)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내가 그 가치를 정합니다. 오늘 내 예배의 가치를 내가 정하고 내 감사의 가치를 내가 정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가 그것을 남용할 수 있는 위험부담이 있기도 하지만 오직 본질을 원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가 그 자유의지로 제대로 된 값을 정하길 바라십니다. 그분은 본질 중의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주님은 정말 생각할수록 너무나 멋지고 본질적인 분이십니다. 자유의지를 받으면 예수님께 아무런 가치를 드리지 않을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 그러한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주님... 얼마나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예수님을 가치 있게 여기길 바라셨으면 그려셨을까요! 저는 이런 예수님이 좋습니다. 한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얻으실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는 생각도 들고, 또 진심이 빠진 것은 어떤 것도 원치 않으시는 모습이 멋있기도 합니다.
이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맙시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제 마음 아시죠?' 이런 말은 의미 없습니다. 누가 내 생일파티에 빈손으로 와서 ‘내 마음은 알지?’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돈은 정직합니다. 물론 예수님께 마음껏 헌금하고 싶지만, 그 교회나 그 선교단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하여서 물어봅시다. 그러면 교회의 어떤 형제자매가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사람을 금전으로 도와주는 것도 예배의 한 형태입니다. 돈이 없다면 음식을 해다 줄 수도 있고, 노동력을 제공해 일을 도와 줄 수도, 애를 봐 줄 수도 있고, 말동무가 되어 줄 수도 있고... 우리의 헌금(이 경우 헌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서 커피 한잔 사 먹는 것은 쉬운 일인데 어디다 후원하고 헌금하는 것은 좀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커피값인 5천원을 헌금하기는 멋쩍다고 생각들 하시니까요. 저는 이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헌금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헌금 할 때 얼마를 할지, 어디다 할지를 항상 하나님께 물으면 헌금하는 행위를 통해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까 저 향유 값, 3백 데나리온이면 주 6일 일하는 사람의 경우 일 년 연봉입니다. 주 5일 일하는 사람의 경우는 1년 연봉도 넘구요. 최저 임금으로 해도 2천5백이 넘는 거지요. 그걸 그 자리에서 전부 부어버린 거에요! 물론 마리아가 그냥 즉흥적으로 저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곧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주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꼭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저런 마리아의 헌신을 생각하면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저는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입니다. 다들 "언젠가 해야지" 하지만, 지금 안 하면 나중에도 안 합니다. 제가 여러 가지 예배의 형태를 말씀드렸으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정해서 실천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