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서 만나고 왔다
진서 만나고 왔다. 강남구청서 운영하는 행복요양원. 세곡동에 있는 거기 그는 1년 전에 들어갔다.
지난주엔 전화했더니 대답 없더니 이번 주엔 전화 받는다. 면회는 소위 비대면 면회다. 가족이나 지인이 유리창 밖에서 서로 얼굴만 보며 전화로 대화한다.
사진 뒤에 보이는 것처럼 면회 장소 유리창에 메모지가 많이 붙어있다. '건강하세요. 힘내세요' 등 환자 격려 문구들이다. 우리 세 사람도 각자 거기 격려 메모 달아주었다. 365일 병원 안에 갑갑한 진서가 간혹 여기 와서 우리 격려 메모 보라는 뜻이다.
이윽고 간병인 아줌마와 함께 진서가 내려왔다.
'저 이쁜 아줌마는 누고?'
거사가 묻자,
'내 애인 이다. 이쁘재?'
진서가 대답한다. 전에도 그랬다. 법원에서 딸애인가 결혼시킬 때, 그는 종규와 나에게 부인을 인사시킨 후,
'우리 마누라 이쁘재?'
느닷없이 이런 유머를 던졌다. 그가 병상에서도 유머 잊지 않아 고마웠다. 축 늘어진 초췌한 모습이었으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얼굴도 밝고 음성도 예전 그대로이다.
'아줌마 이 환자 전에 밖에서 바람잽이로 소문난 위험인물이요, 그러니까 너무 가까이 붙어있지 말고 멀찍이서 간병하시오'
분위기 밝게 하려고 거사가 간병인한테 이런 농담 던지자 여인이 미소로 대답한다.
'진서형! 건강체조 열심히 하소. 그라모 곧 나와서 당구 큐 잡을 수 있을 거 같소'
현근이가 격려의 말 던졌다.
'아줌마 마침 세곡마을 이 동네 장날인데, 우리 신선한 딸기 좀 사서 맡겨놓을 테니 친구하고 둘이서 잘 잡수시오'
증이가 이렇게 말하고 우린 헤어졌다. 딸기와 생초 출신 진서가 좋아할 감 한 줄, 망고 두 알 사서 맡겼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왜 헤어지는 것일까?
옛 일이 떠올랐다. 그가 자기 가족 문집 만들었다기에 내가 서문 써준 적 있다.
三笑선생 문집 서
친구의 문집 발간에 즈음하여
公은 이름이 진서, 號는 三笑선생이며. 성은 朴氏이다. 公의 본관은 반남이요, 충장공파이다.
三神山 중의 하나인 지리산(方丈山) 자락 山紫水明한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덕망이 높은 할아버지 ‘은’字 ‘양’字께서 당대에 천석꾼을 이루시어,
부친 ‘승’字 ‘록’字 어른을 서울로 유학 보내셨으니, 부친은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 법학부를 마치고, 학병으로 관동군에 배속되었으나, 민족의식으로 탈출하여
김구 선생의 독립군에 합류하셨다.
해방이 되자 독립군 소령으로 귀국하여 김구선생의 측근에서 보필하다가
약관 26세에 경위로 임관하셨고, 6,25 때는 함안 군북 전투에서 死生을 넘나드는 부상을 당하시고,
2003년 향년 83세로 卒하시니, 국립현충원 경찰간부 묘역에 묻히셨다.
어머니 백 씨는 사천 축동 가문이니, 진주 일신여고를 졸업하시어, 젊은 시절에는
산청군 부녀회장으로 여성 복지에 공헌하시고 도지사 표창과 대통령 포장을 받으셨다.
公의 從兄 태서는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일컫는 삼성의 비서실장과 그룹 사장을 역임하시고
전주제지 부회장을 하셨으며, 친동생 항서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고 현재
경남 시민구단 감독으로 있다.
예부터 가문을 보면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하였거니와 公 역시 삼성병원 강북제일병원
행정부원장으로 계시다가 布衣로 돌아와 기업을 일으켰으니, 公을 잘 아는 사람들은 公이
사리에 밝고 성품이 활달하고 성품이 봄바람처럼 온화하여 항상 주변에 모였다.
이번에 공이 후손을 위하여, 집안 대대 이야기와 남몰래 다듬어온 자신의 詩文과 글을 모아
문집을 발간하니, 참으로 사람이 흰구름처럼 사라지는 浮生이면서 모두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놓지도 못함에 비해, 公은 홀로 생각의 깊이가 남달라 문집을 남기어 고매한 자취를 남기니,
참으로 百代의 過客으로 하여금 뜻있는 일로 칭송하고 존경할만하다 하겠다.
나는 진작부터 公이 성격이 겸손하고 온후하며 먼저 베풀기를 즐기고,
항상 부귀 빈천을 떠나서 사람의 인품을 흠모하는 時流를 넘어선 분이었으나,
公의 인품을 대롱 구멍으로 표범 무늬 하나를 본 것처럼 백분의 일도
다 헤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얻기 어려운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던 차, 본 문집 발간에 즈음하여,
(항상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주는 公을 ‘三笑’라 號하며)
기쁜 마음에, 僭妄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몇 자 적는 바이다.
2006년 중추 金炫거사 合掌
같이 인사동 갔던 적 있다.
2008년 인사동 나들이
진서하고 약속한 시간이 일러 잠시 조계사 들러, 큰 어른 한 분을 뵙고 경내를 휘익 둘러보니,
법당 옆 백송은 그대로고, 뜰에는 합장한 보살님들 오가고, 연등 매달린 나무 밑에 어떤 분은
부처님처럼 경건히 결가부좌하여 앉아 참선한다. 사바의 아픔을 기도로 씻은 보살님들이
선녀처럼 이쁘다는 생각을 하며, 경내 서점에 들러 책 한 권 샀다.
김달진 옹 해설의 <寒山詩>라는 책이다.
‘깊은 산 바위 그윽한 곳에 사는 곳을 정했나니, 사람은 오지 않고 흰구름 자욱하여 새들만
날아다닌다. 여기 깃들인 지 무릇 몇 핸고, 공허 하디 공허한 부귀공명 아귀다툼은 정히
무익한 것이로다.’
시가 처음부터 맘에 든다. 당나라 때 천태산 寒岩의 깊은 굴에 살았던 寒山스님 시다.
좀 있다 경택이와 진서를 절 앞에서 만났다.
‘어이 진서야 조계사 들러 잠시 한 분 인사나 하고 갈래?’
‘누군데?’
‘비로자나불이라고.’
‘비로자나불이 누군데?’
경택이가 묻는다.
‘내가 소싯적에 조계종 총무원 강당에서 비로자나불(法身) 부처님 앞에서 결혼식 올렸으니 그분이 내
주례님 아이가?’
‘그냥 가자. 내가 인사동 멋있는 집 안다.’
둘이 진서 따라 음식점 가보니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어이 상문아! 어디고?’
해쌓더니 진서가 TV진품명품 도자기 분야 이상문 전문위원을 불러냈다. 진서와 철도고 동창이란다. 그 분 단골집에 따라가서 점심 얻어먹고, 도자기 경매장엘 들렀다.
우리가 맨날 천날 고려청자 이조백자가 어떻고 해 싸 봐야 말짱 헛일이다. 경매장에 가서 그 자기의 내력을 듣고 값 매기는 현장을 봐야 감이 온다. 그런 후에 집에 청자나 백자 하나 경매에서 사서 놔둬야 그기 제대로 가치 있다.
경매에 나온 사람들 보니, 점잖게 생긴 부잣집 부부도 있고, 전문 장사꾼도 있다. 물건을 보니 5만 원짜리부터 천만 원 자리까지 있다. 이위원이 대한민국 최고 감정가라 여기 나온 도자기는 전부 믿을 수 있다.
우선 구경부터 하였다. 가장 비싼 것이 <청철재 백자 금강산 연적>이다.철화와 청화백자가 어울린 금강산 모형의 높이 10센티쯤 되는 연적이 천백만 원이다.금강산처럼 생긴 작은 연적 위에 정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쓰던 목단 무늬 단지는 2백5십만 원, 이름하여 <청화백자 운현궁 명목 단문호>다.
진서는 조선시대 백자 단지 두 개 40만 원에 나온 것을 45만 원에 콜하여 낙찰 받았다. 하얀 백자 단지가 은은하고 앞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 물건이고 값이 오를 것이라니, 역시 돈 놓고 돈 먹기, 그 참 돈 벌기 쉽다.
거사는 <광구병>이란 주둥이가 넓적한 고려 때 술병을 5만원에 나온 것을 7만 원으로 콜 했으나,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이 10만 원 불러 가져가 버렸다.
한 700년 전 고려 때 문인이 술 담았던 그 술병은, 술을 사랑하는 거사가 낙찰해와서 술 담아놓고, 조태현이 박홍식이 정중식이 같은 애주가들과 함 어울려야 하는데, 겁도 없는 장사꾼이 새치기해버렸다.
경매 구경하고 우래옥 가서 냉면에 소주 한잔 걸치고 전철로 돌아오니, 그걸 11만 원이라도 불러 샀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팍 든다.
5월 경매에는 마누라님과 가서 좋은 골동품 술병 꼭 하나 사야지. 어허 아깝다. ggg.(08년 4월)
하준규
2008.04.07(09:32:55)
좋은 경험 했다... 거사가 꼭 살 거 같으니까 전문 꾼이 얼른 올려 버렸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눈이 같다는 거만 해도 큰 거 건진 셈이다...
박진서
2008.04.07(11:32:06)
북한에서 온 물건인데 거사 때문에 아까운 도자기 하나 놓쳤다. 다음번에는 꼭- 사 도.
귀갓길에 경택이 친구하고 청담동 당구장에서 둘이 맞짱 떴는데 3전 전패로 6월까지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경택이 형님 앞으로 잘 봐 주소!
한때 진서와 탁구에 열 올린 적 있다. 진서는 영숙이한테 배워 탁구 폼이 좋았다. 그래 거사, 종규, 순타기, 두진이가 그를 싸부로 모신적 있다. 그런데 진서는 싸부라고 불러주자, 건방끼가 하늘을 찔렀다. 자기 빳다는 몇 십만 원 짜리라고 자랑하는가 하면, 코치한답시고 지적과 잔소리가 하도 많길래, 거사가 제안 하나 했다.
'싸부님 나하고 시합 한 판 붙어보자'
거사가 빳다에 히네루 잇바이 넣고 얄라궂은 꼴짝 서브 넣으니 진서가 받질 못한다. 그래 거사한테 지고 종규 순탁이한테도 졌다. 이렇게 줄 창피당한 진서는 그 후 탁구를 끊고 나타나질 않았다.
2007년 거사가 수필가로 등단했을 때 친구 중 가장 반겨준 친구가 진서다. 일부러 종로 3가 떡집에 가서 떡 사오고, 축하 플래카드 만들어 와서 족구팀과 즐긴 적 있다.
세곡동 개천엔 봄버들 파릇파릇 물이 오르고, 눈 녹은 물은 거울처럼 맑다. 아! 누구보다 유머 많고 다정하던 친구 진서. 이 봄에 버들처럼 다시 싱싱하게 물이 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