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기행 - 유배지에서 완성된 예술혼, 추사 김정희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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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기행 - 유배지에서 완성된 예술혼, 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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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9. 15:54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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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노년 : 제주도 9년 유배, 북청 1년 유배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고 이후 10여 년간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1839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이듬해 1840년(55세) 당쟁에 휘말려 안동 김씨 세력들로 부터 파직당하고 결국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離安置,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되었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특히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배 기간 동안 화가이자 제자인 소치 허유(1809~1893)가 세 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유명한데 소치는 충심으로 스승인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유배 기간 중인 1842년 11월 13일, 유배생활 내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서울 용산 한강 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녔던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걸작품,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