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과학적인 새로운 기술이 의학 분야에 도입되는 과정에는 오랜 시간과 여러 번의 관찰 결과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조건과 더불어 사회적, 경제적 및 정책적인 조건까지 과학적 사실의 인정과 새로운 방법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세포병리학의 발달사도 예외 없이 이러한 조건들에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세포병리학은 신체의 여러 부위에서 얻은 세포를 검사하여 병의 원인이나 성상을 밝혀내는 진단적인 분야를 말합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세포학적인 방법은 연구자들이 소변, 객담, 삼출물에서 비정상적인 세포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말 경에 이르러 세포학적 검사물의 채취, 표본의 고정 및 염색 기술 등의 발달과 더불어 암의 세포학적 진단은 많은 병리의사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직 박절기의 발명으로 세포의 발전이 약간 주춤했다가 George N. Papanicolaou의 획기적인 기여로 탈락 세포학의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탈락세포학이 암 진단의 한 방법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Papanicolaou 의 연구 결과가 결정적이었습니다.
1921년부터 1943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자궁경부 탈락 세포를 연구 하였습니다.
1942년에는 훌륭한 염색법을 접목 하였습니다.
1943년에 "Diagnosis of Uterine Cancer by the Vaginal Smear" 란 단행본을 출판함으로써 탈락세포학의 새 장을 열었습니다.
세포병리학의 다른 한 분야인 세침 흡인 세포학은 유럽과 미국에서 1930년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Martin 과 Ellis 등이 뉴욕의 Memorial Sloan Keterring 병원에서 시작하여 연구 업적을 발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업적은 약 30년 동안 의학계로부터 큰 관심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Patrick과 Dudgeon 등에 의해 시작된 이 기법은 1960년 유럽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중심으로 혈액학 전공을 한 의사들을 통해 현격한 발전을 이루어 스웨덴의 Karolinska 병원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세포검사는 조직검사와 더불어 병리검사의 한 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 대 후반부터 복수와 자궁경부 도말 검체의 세포학적 검사에 대한 발표를 시작으로 1960년 대 국립의료원에서 덴마크 의사에 의해 요 세포 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WHO 의 후원으로 국립의료원에서 세포병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병리의사들의 모임인 대한병리학회의 자학회인 대한세포병리학회가 1983년부터 병리의사에 대한 세포병리교육을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자궁암세포검사의 일차 검경을 맡은 세포병리사의 경우 1981년부터 세포병리사를 양성하였습니다.
특히 2002년도부터는 국립암센터내에 세포병리 상설 교육장을 마련하였습니다. 국립암센터와 대한세포병리학회가 공동주관으로 세포병리사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여 세포병리교육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대한세포병리학회 주관으로 병리의사와 세포병리사를 대상으로 한 연속적인 교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