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31
8월28일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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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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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WgdCZSkVTw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6346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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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인간이 하느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겸손>
잔치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참 못 볼꼴을 보셨습니다. 초대받는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가 겸손과 낮춤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런 모습을 견디기가 정말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인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모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이 바로 겸손입니다.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 또한 겸손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영성생활을 해나가셨던 신앙의 모델들, 모든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덕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열등감에 의해,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잘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갖출 것 다 갖췄으며, 내가 상대방보다 다방면에 우월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양의 덕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욱 요구됩니다.
크신 하느님, 관대하신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나였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티끌 같은 존재, 먼지 같은 존재, 한 마디로 무(無)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생명으로 나를 초대해 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봉헌생활자로 초대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는 한 나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의 첫걸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필연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유한한 우리들입니다. 채무자이신 하느님 앞에 채권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죄한 하느님 앞에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피고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순수한 존재 앞에 선 불순자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태도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지만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맨 끝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늘 기뻐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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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겸손이 생략된 신앙, 겸손이 사라진 기도, 겸손이 결여된 권력처럼 위험한 것은 다시 또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이 이웃사랑의 실천과 봉사를 위한 자리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이, 뭐라도 되는 양,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거들먹거리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대놓고 무시하며, 자기 잘난 맛에 푹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봐주기 힘든 꼴불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자꾸만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올려놓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위태위태한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오기 힘들고, 떨어질 때 충격이 엄청날 텐데...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와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 총애를 받으리라.”(집회서 3장 18절)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1절)
요즘 저는 이제야 좀 철이 드는지,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메시지를 아주 쪼금 이해하며, 어떻게 하면 끝자리, 낮은 자리에 앉아볼까 늘 고민하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넉넉해지는지 모릅니다.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으니 가끔씩 넘어져도 상처나 충격이 훨씬 덜합니다. 낮은 자리가 주는 축복과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최고봉이자 기초입니다. 다른 덕들은 겸손의 덕이란 기초 위에 건설됩니다. 겸손이 생략된 신앙, 겸손이 사라진 기도, 겸손이 결여된 권력처럼 위험한 것은 다시 또 없습니다. 겸손은 천국 문을 열수 있는 열쇠입니다.
탁월한 인품을 갖춘 분으로서 학자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존경하는 교수님께 한 제자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답니다.
“스승님,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느끼신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그 겸손하고 훌륭한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이런 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해주신다는 깨달음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나야 나! 나 정도 되면 괜찮은 거 아니야? 나 말고 누가 있겠어? 그거 내가 다 했어!” 이렇게 겸손이 사라진 우리에게서 하느님께서도 떠나가십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 내가 가장 큰 죄인입니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펼쳐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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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U4zkAea5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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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니 겸손하다 하더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식사를 초대받았는데 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며 겸손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낮추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교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해지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늙은 마귀가 자기 조카 젊은 마귀에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편지로 쓴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겸손과 교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곧 교만의 유혹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번 네 보고를 받고 제일 걱정되는 건, 환자가 처음 회심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결심들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듣자 하니 앞으로는 계속 선한 일만 하겠다는 약속도 펑펑 하지 않았더구나. 심지어 한 번 받은 은혜가 평생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매시간 닥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에 해당되는 은혜만 바란다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네 환자는 겸손해졌다.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험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어라.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원하는 많은 단계들로 나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써먹지는 마라. 혹시라도 환자의 유머감각과 균형감각이 깨어날 시에는, 너를 간단히 비웃고 잠자리에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고.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꼭꼭 박아주거라.
실제로도 인간의 재능은 저들의 생각만큼 가치 있는 게 못 되지만, 그것은 중요한 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이 방법을 통해 수천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겸손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스스로 못난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며, 명석한 남자가 스스로 멍청이라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단다.>
겸손은 낮은 위치에서 나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KBS에서 2000년 9월 5일에 방영된 ‘내 남편은 두 살 – 정신연령 2세 남편과 결혼하여 살게 된 김영숙 씨 사랑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김영숙 씨(42)는 30대 중반의 요셉이라는 남편과 함께 반지하 월세방에서 삽니다. 그런데 남편의 정신연령이 2세 수준이기에 텔레토비 인형을 좋아하고 밥을 제일 좋아합니다. 한 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씨는 몸은 성인이지만 말 그대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김영숙 씨는 공부 잘하는 오빠만 챙기는 집안 분위기에서 항상 소외되고 매 맞는 아이였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오셔서 아랫목을 차지해 윗목 추운 곳에서 쭈그리고 잠을 자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입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아이들은 괴롭힘 감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영숙 씨는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합니다. 아버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중풍이 왔습니다. 몸 한쪽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허락해 주어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녀님을 보고 얼굴이 이상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영숙 씨는 수녀원을 나와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소외되고 매 맞아 항상 얼굴에 상처가 있는 요셉에게 관심을 둡니다. 자기 처지와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때리는 원장 때문에 김영숙 씨는 그냥 요셉 씨를 데리고 나와버립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습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두 살 어른을 데리고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배고프다며 발작을 일으켰고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에 요셉은 사라졌습니다. 김영숙 씨는 사방팔방으로 요셉을 찾아다녔고 한 시설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되돌아 나오는데 요셉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매달립니다. 마음이 약해진 김영숙 씨는 요셉 씨를 데리고 다시 나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혼인신고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또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김영숙 씨는 굳건히 요셉 씨와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요셉 씨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고 이젠 장인어른을 업고 병원에 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김영숙 씨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잊게 되어 겸손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두 살 지능밖에 안 되는 사람과 혼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주위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합시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도 인간을 당신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생각을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담가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질 때,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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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계란이 보통 계란보다 조금 커서 열어 보니 쌍란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10개의 계란이 모두 쌍란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쌍란을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8월 14일 지면에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희망에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 바로 열망입니다. 희망과 열망은 다르지만 늘 함께 다닙니다. 열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열망은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오릅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아침기도를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이러한 수많은 열망은 하나둘 무너집니다. 이것도 저것도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바라고 또 바라지만 결국 현실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분노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열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라진 열망으로 인해 마음 속 작은 틈 사이에서 실망과 좌절, 분노의 기운이 올라옵니다.
열망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내 능력과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갈망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고요함이 무너지고 불안해 집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열망은 온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잘 안되면 내 탓이라는 자책과 네 탓이라는 원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다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박해의 칼날이 서슬 퍼런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수천, 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수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헤쳐 나갔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누군가의 도움을 신뢰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터널에서도 희망은 유효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희망의 너머에는 늘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평온 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열망이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입니다. 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 반면에 희망이 없는 열망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망이 있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희망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자동차의 기름은 열망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는 좌와 우의 날개를 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과 열망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삶은 많은 결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높아질수록 더 욱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 사랑을 받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더불어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나누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들은 되갚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겸손, 희망, 열망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동차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열망은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겸손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기다리며 겸손, 희망, 열망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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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7-14: 하느님 앞에 겸손하라.
오늘 복음의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 잔치라는 소재를 통해 더 깊고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잔치는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의 표현이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잔치에 참여해야 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에 그 삶 자체가 항상 잔치이다. 그 잔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오늘 독서는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하신다. 이 비유는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는 사람을 하늘나라에서 제외하신다.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당하다고 하며 자비를 구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범은 겸손이다. 겸손을 통해서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 하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앞자리로(10절) 불러올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다. 내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손에 우리를 모두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모델이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립 2,9).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대성이란 겸손과 봉사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그들 가운데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가장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기주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잔치를 베풀 때 똑같이 되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를 것이 아니라, 되받지 못할 사람들을 불러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 하느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다리라(12-14절 참조)고 하신다. 여기서는 첫째로 무상성을 가르치신다. 오직 진실하고 단순하며, 티 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부차적인 계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파괴된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14절) 주님께서 주실 것이다. 이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때의 행위가 겸손을 통해 위대하게 된다.
둘째로는 이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간과해오고 있지 않았나 한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이들은 바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오늘날에는 노인, 지체장애인, 기형아,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을 것이다.
집회서의 지혜의 가르침도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20) 이제 하느님 앞에 자신을 스스로 낮출 수 있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될 것이며, 겸손한 자세로 더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으로 대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풍성한 갚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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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교만과 겸손>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이 말씀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겸손한 사람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자비이고 은총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잘난 체 하거나, 자기를 위해서 그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못 들어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교만에 포함됩니다.) 그런 교만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거짓 겸손’이라는 위선도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 세상의 잔치에서 ‘윗자리’와 ‘끝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윗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겸손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끝자리’에 가서 앉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까? 그 사람보다 더 윗자리에 앉을 수가 없으니, 미리 준비한 자리들은 모두 공석이 되고, 그 잔치는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실제 예를 든다면, 본당의 잔치에 교구장이 참석했을 때, 교구장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 놓은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에 교구장 말고 누가 앉을 수 있을까?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려면, 처음부터 윗자리와 끝자리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나 아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도 어떻든 사람마다 앉아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는 상황이라면,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알아서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겸손입니다. 혼란과 무질서가 생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겸손을 과시하려고 끝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이고,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초대한 이가 앞자리로 올라앉으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일부러 끝자리에 앉는 경우입니다. 그것도 역시 거짓 겸손이고, 위선입니다. 속마음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다른 것은 모두 거짓 겸손이고,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끝자리’에 앉으셨으니 우리도 ‘끝자리’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는 그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으니, 예수님의 옆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예수님보다 밑으로 가야 하나? 우리가 예수님보다 낮은 자리로 간다면, ‘끝자리’보다 더 낮은 자리가 있나?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 자리보다 높은 자리는 모두 비워두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자리보다 더 낮은 자리에 앉게 되면,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앉으신 곳이 가장 높은 자리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끝자리’에 앉으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을 실천하신 것처럼 서로 ‘섬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루카 22,26-27)
<‘실제 끝자리’로 해석하고, 자기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끝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들에게 윗자리에 앉으라고 권한다면,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참석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전부 다 끝자리에만 앉으려고 하면? 실제 상황에서 모든 자리가 끝자리가 되면 사실상 끝자리는 없게 됩니다. 모든 자리가 다 똑같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낮춤’과 ‘섬김’ 없이 끝자리에 앉기만 하는 것은 거짓 겸손이고,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 공동체는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서로 발을 씻어 주는 상황에서는 윗자리도 없고, 끝자리도 없습니다. 윗자리도 없고 끝자리도 없어야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어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윗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윗자리가 따로 없으니 끝자리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겸손이 시작됩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경력, 학력, 지위, 신분, 서열 같은 것은,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 앞에서 내세울 수 없는, 또 내세우면 안 되는,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낮춘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하는 행동이 겸손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나는 겸손을 실천하고 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라는 말은 교만한 위선자가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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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기원후 2세기 무렵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계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천동설입니다. 그리고 약 1400년 뒤에 또 다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을 뒤집습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지동설입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념을 뒤집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신 삶의 중심이 누구인가? 당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는 ‘당신은 다른 이들을 다스리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당신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에 살고 싶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따르는 이들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자신은 선하고 자신의 판단은 올바르다고 여기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합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따르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중심’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식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의 자리는 끝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살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초대”라는 단어입니다.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됩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첫자리가 아니라 끝자리로 부르셨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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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님]
<낮추기만 하면, 그건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진정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처음부터 스스로를 뷰내며 윗자리에 덜컥 앉았다가 더 높은 이가 참석하여 자리를 비켜달라 하면 우리는 봅시 어색하고 무안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알아서 남들이 나를 높은 자리로 안내해 준다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실천하며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작은 운동화나 티셔츠 하나를 사도 남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고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은근히 칭찬과 인정을 받길 바라기에. 나 자신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겸손을 떠올리면. 단순히 자신을 낮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시는 낮은 자리를 택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나를 감추고 부정하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5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이 "저는 언어에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섯 나라 말밖에는 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을 가장했을 뿐 오히려 교만에 가깝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겸손. 나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무턱대고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하느님 앞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애써 비교하며 내 자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서 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이렇게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좋은 것들을 주셨는지를 깊이 느끼는 것이 진정한 검손입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이 내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다 이룬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즉시 교만이 됩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 영광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낮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좋은 것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기에 언제든지 하느님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마음으로 열려 있게 됩니다. 저는 똑똑합니다.'가 아니라 '하느님은 저에게 똑똑함을 주셨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저는 부자입니다.'라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부유함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하며 하느님 앞에서 낮은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진짜 검손한 사람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지 정말로 팍 찬 수레는 방정을 떨기나 오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란. 바로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나에게 주신 총은 것을 이 세상에 기쁘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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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하선호 스테파노 신부님]
<겸손과 낮음을 통한 영광의 자리>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본인보다 먼저 자녀들을 챙기시곤 하셨습니다. 당신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먹고 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늘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맛있는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에 자녀들에게 양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음식보다 자녀들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며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초대받은 다른 이들이 두리번거리며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를 찾으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요즘 관심을 두고 읽고 있는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 한국 사회를 진단하면서 ‘스노비즘’(속물주의)의 시대, 혹은 ‘스노보크라시’(snobocracy, 속물 지배) 사회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스놉’(속물)이란 ‘배우지 못했거나 가난한’이라는 뜻 보다는, 잘 살기 위해 자신의 존엄성을 내버린 사람들을 뜻하고, 속물 지배 사회란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윤리, 도덕, 양심, 체면, 상식 등을 무시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이러한 속물의 삶이 정당화되고 그 삶을 쫓아가는 사회가 지금의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고 이야기합니다.(김홍중, 「스노비즘과 윤리」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경제적 부, 성공, 권력,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분투하면서 남들보다 높이 올라서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이들에게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성찰은 없고 성공을 위한 방편인 도구적 성찰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 끝자리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았을 때 오히려 영광스럽게 높여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속물적 근성이 아닌 겸손함의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자칫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높은 자리에 대한 양보는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행위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인간적 한계를 한 단계 뛰어넘어 받아들일 때 실행이 가능합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호의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초대하고, 기꺼이 낮은 자리로 향하는 자기 비움을 통해 영광스럽게 높여지는 것은 보이는 세상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광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음식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녀에게 양보하는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눈앞에 보이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갚아 주실 겸손의 낮은 자리로 기꺼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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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준한 토마스 신부님]
<겸손과 신앙>
‘어떻게 저토록 뻔뻔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를 후안무치, 적반하장, 인면수심, 파렴치라 합니다. 아쉬울 때는 좋은 일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더니, 목적을 이루고 나면 전혀 딴 모습이 되는 사람을 볼 때 드는 생각입니다.
사전에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말의 뿌리는 아무 귀할 것도 없는, 가장 낮은 자리를 메우고 있는 ‘흙’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당신 입김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흙’과 ‘하느님의 입김’이 인간 존재의 두 뿌리입니다. ‘흙’은 인간의 ‘비천함’을, ‘하느님의 입김’은 인간의 ‘고귀함’을 뜻합니다. 이 둘이 합해져 조화를 이루어야만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성경에서 겸손이란, 인간의 존재의 한 뿌리가‘흙’, 비천함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흙의 속성인 낮음으로 귀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겸손은 인간의 다른 뿌리인 ‘하느님’, 고귀함을 더 돋보이게 합니다.
반대로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비천함을 부정하고, 하느님 높으심을 넘보는 탐욕으로, 결국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교만한 모습도 불쾌하게 여기시지만, 초대한 이에게도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하십니다.
잔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와 이웃하며 친구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나보다 낮은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나보다 덜 가진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가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본당 신부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신부님은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시는지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내면에 소외된 모습을 성실하게 만나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어떤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주로 만나는가가 어떤 신앙인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가난한 서민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외된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참 신앙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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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윤병권 요셉 신부님]
<겸손–천당, 교만–지옥>
신학교에 입학하자 본당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이 “학사님!”이라고 부르며 대접했습니다. 갑자기 바뀐 태도에 당황하고 면구스러웠지만 그런 대접은 저의 평생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신자들은 어떤 모임에서든 사제를 윗자리에 모시려고들 합니다. 사양해 보아도 소용이 없죠.
문제는 신자들이야 사제를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대접한다는 신앙적 명분이 있지만 아예 타성에 젖어 덥석 받아들이는 제가 문제이지요. 한 마디로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윗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끝자리에 앉으라고 권고하시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리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겸손’과 ‘교만’의 문제이기에 중요합니다.
제1독서 집회서의 말씀처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다.”(집회서 3.18, 3.28)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교만은 정반대의 개념으로 우리의 구원을 좌우합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마태오 20.25-27) 개신교인들의 말처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실천적으로 ‘겸손(가난)천당, 교만 지옥!’인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세상을 순례하고 있는 교우 여러분! 그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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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자리>
루카 14,1.7-14 (끝자리에 앉아라,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과 자리>
사람이 있습니다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자리입니다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의 자리가 있으니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있으면
사람의 자리가 늘 있습니다
사람의 자리가 있다고
사람이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가 만드는 사람은
그 자리만큼 사람입니다
자리를 만드는 사람은
모든 자리에서 사람입니다
자리가 빛내는 사람은
자리에 따라 빛이 납니다
자리를 빛내는 사람은
모든 자리에서 빛이 납니다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은
자리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자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자리가 섬기는 사람입니다
자리를 섬기는 사람은
사람의 자리를 만납니다
자리가 섬기는 사람은
자리의 사람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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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돈과 사치품, 외모, 권력 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이룬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또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하나같이 소소한 일상을 언급합니다.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산책, 음악감상, 맛있는 음식 먹기, 독서 등등…. 이때의 놀라운 점은 남과 전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행복할까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묻는 말이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대단한 곳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겸손함에서 행복 찾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셨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가장 겸손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따라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활에서 식사 예절은 상당 엄격했습니다. 잔치가 크면 클수록 예절은 더 엄격해져서 식탁에 앉는 순서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과시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되면 최대한 윗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통해 순간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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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유형>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시간 겸손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처음 군중 앞에 서실 때에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단에 서기를 거부하시고 “나는 여기 아래에 서겠습니다.” 하셨습니다. 그 후 추기경단이 머무는 숙소로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의 추기경단은 새 교황을 맞이하려고 도열해 있었습니다. 그때 버스에서 교황이 내린 것입니다. 교황님은 전용 리무진 기사에게 “추기경들이 타고 가는 버스에 함께 타고 가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본인이 묵었던 숙소에서 직접 숙박비를 계산하였고 숙소에서 교황청으로 가실 때에도 전용차를 타지 않으시고 일반 버스를 이용하셨습니다.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전화를 걸 때도 직접 교환원에게 총장 신부를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황님의 몸에 밴 겸손한 생활의 부분입니다. 지금도 여행객들이 머무는 작은 숙소를 이용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신문기자로 40년간 생활을 한 필립 얀시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8천여 명의 유명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깨달은 바를 자기 회고록에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여정에 있어서 사람의 유형은 스타형(Star)과 섬김형(Servant)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타형에 속하는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기자가 볼 때는 잘난 것도 없고 빈껍데기뿐인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매달린답니다.
여러분 스타가 뭔지 아세요? 스스로 타락한 사람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 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하고 자화자찬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입을 조심하는 이는 제 목숨을 보존 하지만 입술을 열어젖히는 자에게는 파멸이 온다.”(13,3)고 말합니다. 그러니 결국 스타형은 파멸을 자초하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마십시오. 칭찬은 남이 해 주는 것이지 제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자랑해 주십시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섬김형에 속하는 사람은 그들은 언제나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이롭게 하며 기회가 있으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랍니다. 그야말로 콩 한 쪽도 나눠 먹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사람은 대체로 소득이 적고,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고 드러나는 박수갈채도 없지만, 존경을 받는답니다.
바로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데 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인정받지 못하느냐? 부자로 살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했으면 그만큼 잘되어야 하는데…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것을 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상 것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에 눈멀지 말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두기를 바라십니다.
요즘시대를 피알시대라고 하나요?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피알시대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 알리는’ 것입니다. 천상 것, 영원한 생명에 들지 않으면 피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얼마나 신이 낫겠습니까? 능력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19-20). 고 하셨습니다.
지금 인정을 받고 칭찬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욥기1장 13절 이하를 보면 욥의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소와 나귀, 양, 머슴들,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음에 이르는 환난이 왔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깍았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1,21)
이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겸손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섬김형의 삶을 말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겸손의 상급은 결국 여러분의 이름을 하늘에 영원히 기록 하게 될 것입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을 “나는 하느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몽당연필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를 가져다가 좋으실 대로 쓰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고 맡겨 드리는 그 겸손의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 켐피스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대개는 덕이 있고 결점이 없으며, 가난하고 욕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선전의 수단으로 눈에 보이게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열심한 유다교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유다민족에 있어서는 헬레니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한 독립투사들이었으며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존경심을 그들이 스스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타형이었습니다. 존경심은 누군가에게 강요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세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밥맛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낮아지지 못하였기에 부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1베드5,5-6)
그러나 겸손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좋은 결심을 해도 인간적인 마음이 금방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꾸준한 기도와 하느님 말씀을 듣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젖어 들지 않고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또 익혀서 부디 여러분은 스타형으로 살지 말고 섬김형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섬기십시오. 겸손하게 섬기면 다 잘 될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버림받은 자의 표시이고, 겸손은 선택된 사람의 표시입니다.”(성 그레고리오)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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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한 골목에 맛좋기로 소문난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상호도 간판도 없었지만 미각과 식도락에 예민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골목에 새로 음식점이 생겼는데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음식점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집” 이라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마도 후발 주자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터줏대감격인 식당에서는 뒤늦게 시작해 놓고서는 자기 자랑만 내세우는 식당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이 골목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원조’, ‘진짜원조’, 심지어 ‘태조’, ‘시조’라는 말을 붙여서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려는 곳이 많습니다. 식당은 맛으로 승부를 내야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빛이 되어야지 천주교 신자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말고 삶의 향기를 통해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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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 위하여 감춰 두신
그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오니까
당신께 의탁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이제 처서處暑(8.23)도 지나니 서늘 하기가 완연한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희미하게 보이던 별들도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어제 8월27일은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고백이 나올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고 그대로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저는 참 주님의 섭리 은총으로 같은 수도명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 지도를 마쳤습니다.
피정 참가자들 18명중 14명이 선교수도사제이며 4명도 언젠가는 사제가 될분들입니다. 한국13명, 잠비아5명, 인도2명 으로 구성된 모두가 순수와 열정이 넘친 다국적 수도회라 할 정도로 참 다채로웠습니다. 호칭은 모두가 “형제”였습니다. 8월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시작하여 어제 8월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로 끝난 일정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늘 8월28일은 아쉽게도 연중 제22주일이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 미사를 못 드리지만, 두 모자母子 성인을 생각할 때 늘 애틋한 마음이 들며 동시에 저와 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생각할 때는 늘 다음 고백이 떠오릅니다.
“늦게서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여기 근거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비록 오늘 부르지는 못하지만 참 아름답고 깊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셨나이다.”
피정지도를 마친 후 귀원하자 총원장 형제의 단아端雅한 감사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안으로 성베네딕도 밖으로 성프란치스코라는 말씀이 기도와 활동안에서 수도여정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이에게 주님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탁마琢磨하며 그 길을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겸심, 거룩한 결심에 진심으로 찬사와 격려와 더불어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레오 형제님!”
참고로 피정지도 주제는 “선교에 앞서, 선교와 더불어, 수도공동체에서의 기본적 수행들”이었습니다. 내 그리던 사랑, 수도원에 귀원했을 때 “난 수도승이다” 라는 자각과 더불어 흡사 야전사령부의 제자리에 온 듯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여 내 뼈를 묻을 곳”이란 순간의 결심도 새로웠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제 침방에서 목격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이 또한 깊이 보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사전에 사랑하는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메시지들 전 과정을 공개합니다.
“수사님, 침방 여기저기 바닥에 세워져 있는 앨범, 액자등을 벽의 적당한 곳에 붙여 드릴까요”
“적당한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질서의 질서’,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제 취향인가 봅니다.”
“지금 마르코 수사님이 수사님 침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계십니다. 와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정말 피정 끝낸후 침방에 들어서는 순간 놀랐고 오늘 한 밤중에 일어났을 때 또 두 번 놀랐습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즉시 강론 제목을 택하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발송했던 메시지입니다.
“침방의 조화와 균형의 배치가 기막히게 절묘하고 아름답기가 가히 혁명적입니다. 형제애兄弟愛에 감동합니다. 놀라운 아이디어의 기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일기쓰듯 강론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수도원의 환경은, 수도자의 방은 참 깊고 중요합니다. 수도자의 방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아름다운 대목을 강의록에서 인용합니다.
“수도자의 방은 숱한 투쟁, 패배, 승리, 기쁨, 눈물로 점철된 장이 될 수 있다. 방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 수도자는 더 성숙되고 세련洗練된 자아로 태어나 그날의 도전에 다시 잘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아플 때도 방은 병실이 될 수 있고 죽을 때는 부활의 생명이 나오는 무덤이 될 수 있다. 방안에서 항구함은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수도자의 방뿐 아니라, 이상적인 수도원 역시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같은 편안한 쉼터이자 지상에서의 천국인 수도원이라 어머님이 계신 고향을 찾듯이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이 찾는 영혼의 고향, 하느님 집인 수도원입니다.
오늘 수도원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두개의 독서와 하나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은 덕행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겸손하기로 작정을 하면 등신等神이 되기 십상입니다. 본인은 절대 모르고 남만이 아는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아름답고 교만할 때 추합니다. 누가 인품이 아름답다 느껴지면 그는 분명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을 연습하다보면 속없는 사람이 되기 일쑤입니다.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주님을 닮아 겸손해 집니다. 우리 수사님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의 어원은 흙이고 흙에 어원을 둔 인간입니다. 흙humus같이 겸손humilitas해서 사람homo임을 깨닫습니다. 흙을 닮은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겸손에 대한 설명이 참 아름답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이지만 하느님을 떠나 날리 멀리할수록 거만倨慢입니다. 겸손은 아름답지만 거만은 참 추합니다. 집회서의 말씀이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겸손한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둘째, 환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초대”로 무려 아홉 번 나옵니다.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으로 불린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초대의 마음, 초대의 사랑은 그대로 환대의 마음, 환대의 사랑과 통합니다. 초대와 환대의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입니다.
초대의 자리, 환대의 자리에 갔을 때는 겸손히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하십니다. 사실 겸손한 이들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며 감춰지기를 바라고 끝자리를 좋아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거만으로 높아지면 낮아지고 겸손으로 낮아지면 올라가는 것이 역설적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의 진수, 환대의 진수를 보여 주십니다. 참으로 겸손한 환대의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게 진짜, 초대의 축복, 환대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불우한 이들을 형제애로 초대하고 환대할 때 마지막 날, 주님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장애인들입니다. 아니 이런 환대의 사랑 자체가 보답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
셋째, 천국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사랑, 환대의 사랑을 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 천국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에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시나이 산으로 대변되는 옛계약과 시온산으로 대변되는 새계약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은 새계약의 사람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삽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미리 맛보는 다음 새계약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감사하십시오.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미사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새계약의 천상 세계의 아름다운 현실을, 하늘 나라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 의인義人이 되어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의인들아 기뻐하며 춤을 추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그분 앞에서 기뻐 춤추라.”(시편68.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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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겸손의 덕!>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힘든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초대 받은 이들의 자세와 초대하는 이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초대하는 이는 부유한 이들을 초대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도 다른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고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는 그래서 되받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고 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너를 위해 죽으라고 하십니다.
연중 제22주일인 오늘은 모니카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새롭게 다시 태어나신 성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미덕은 겸손이고, 둘째 미덕도 겸손이고, 셋째 미덕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겸손의 덕이 모든 덕의 으뜸이라는 것이고, 아무리 나를 통해 모든 덕이 드러났어도 그 위에 겸손의 덕을 입지 않으면 헛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겸손의 덕은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을 간직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 너무 아름답고 천사와 같습니다.
먼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위에 겸손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더 들어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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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Q_VbrICBo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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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 13)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시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리를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들의 겸손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은 언제나
자리해야 할 곳에
저마다
자리하고 있다.
계곡물도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사랑을 위해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사랑의 가치는
낮아짐의 가치이다.
낮아짐의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행복이다.
우리자신을
돌아보고
낮추면
모든 것은
행복이 된다.
윗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행복이 아닌
거꾸로
끝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참된 행복이다.
끝자리의 행복
끝자리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함께하기에
행복하고
다르지 않기에
기쁜 것이다.
삶이란
낮아지는 행복을
깨닫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겸손의
자리이며
사랑의 자리이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낮아지기에
가까이 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길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랑의 기쁨이다.
하느님께서
위로해주시고
하느님께서
충만하게 하신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먼저
낮아지시는
행복의 잔치로
우리를 살게 하신다.
낮아짐이
거품을 빼는
사람의 참된
길이기 때문이다.
낮아지는 삶이
새로워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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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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