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수도, 부여
전북 장수에서 시작된 금강이 굽이쳐 돌아 서해 하구로 가까워지는 지역에 부여가 있다. 백제의 제26대 왕인 성왕(523-554, 재위)은 수도를 공주(웅진)에서 이곳 부여(사비)로 옮겼다(538). 부여는 백마강으로 둘러싸여 수도 방어에 유리하였다. 게다가 강 주변에는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가 있었고 또, 강 하류로 배를 타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서해를 통해 중국과의 해상 교역을 할 수 있는 요지여서 경제활동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부여에서 123년간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던 백제는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말았다.
부여읍을 거쳐 지나는 약 16km 길이의 금강은 특별히 백마강으로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마강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를 공격하던 당나라 소정방이 금강의 용이 일으키는 비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래서 백마로 미끼를 만들어 용을 낚으니 날이 개어 군사가 강을 건넜다. 이후 강 이름은 백마강, 소정방이 용(龍)을 낚은(釣 낚을 조) 바위는 조룡대(釣龍臺)가 되었다고 한다.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로 어지러웠던 고려 말
삼국시대의 백제 역사를 뒤로하고 부여읍에서 떨어진 홍산면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곳에는 고려말, 왜구들을 물리친 홍산대첩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이 홍산대첩을 지켜보았을 마애불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전북 장수에서 시작된 금강이 굽이쳐 돌아 서해 하구로 가까워지는 지역에 부여가 있다. 백제의 제26대 왕인 성왕(523-554, 재위)은 수도를 공주(웅진)에서 이곳 부여(사비)로 옮겼다(538). 부여는 백마강으로 둘러싸여 수도 방어에 유리하였다. 게다가 강 주변에는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가 있었고 또, 강 하류로 배를 타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서해를 통해 중국과의 해상 교역을 할 수 있는 요지여서 경제활동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부여에서 123년간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던 백제는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말았다.
부여읍을 거쳐 지나는 약 16km 길이의 금강은 특별히 백마강으로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마강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를 공격하던 당나라 소정방이 금강의 용이 일으키는 비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래서 백마로 미끼를 만들어 용을 낚으니 날이 개어 군사가 강을 건넜다. 이후 강 이름은 백마강, 소정방이 용(龍)을 낚은(釣 낚을 조) 바위는 조룡대(釣龍臺)가 되었다고 한다.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로 어지러웠던 고려 말
삼국시대의 백제 역사를 뒤로하고 부여읍에서 떨어진 홍산면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곳에는 고려말, 왜구들을 물리친 홍산대첩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이 홍산대첩을 지켜보았을 마애불이 있어 눈길을 끈다.
- 태봉산 정상의 홍산대첩비.
요동 지방으로 진출했던 이들 홍건적 중 일부가 두 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여 나라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특히, 2차 침입 때(공민왕 10년 1361)는 원나라 정벌군에 쫓긴 홍건적 2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개경을 점령한 홍건적이 방화와 약탈, 살인을 일삼을 때 왕은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경북 안동까지 피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심했던 것은 왜구들이었다. 그들은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내륙까지 들어와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왜구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규슈 지방의 정규 부대 출신이었다. 이들은 남북조 시대(1336-1392)의 내전에서 궁지에 몰리자 군량과 전쟁물자의 확보를 위해 가까운 고려에 침략하여 돈이 될만한 쌀과 문화재, 그리고 사람까지도 약탈하여 가져갔다. 고려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토벌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