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75주년에 부쳐 (3)>
- 한미동맹의 강력한 핏줄
찰스 B. 랭글을 잃다
- 국회의 찰스 랭글 하원의원을 기리는 추모 결의를 보며
하원 세입위원회의 첫 흑인 의장이자, 의회 내에서 한미동맹의 핏줄 역할을 해왔던 찰스 B. 랭글 전 하원의원(뉴욕)이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브루클린 할렘가에서 태어나 성장한 랭글 의원은 23선이라는 놀라운 당선 기록을 보유한 성공적인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2016년에 은퇴하기까지, 미국 역사상 9번째로 오랫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이 은퇴하자(필자와 만난 적이 있음), 힐러리 클린턴(필자와는 상원의원실에서 만난 적이 있음)을 설득해 뉴욕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도록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의 그 어떤 뉴요커보다도 더 오랜 기간 하원에서 일했다. 그는 미국 뉴욕의 할렘가에서 성장한 흑인이었지만, 백인 정치인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저는 흑인 이상으로 성공한 정치인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랭글 의원을 존경하고,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6·25 전쟁의 참전용사였고, 전쟁 속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6·25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미동맹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랭글 의원은 6·25 개전 초, 미2보병사단 503연대 소속으로 참전해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그가 6·25 전쟁에 참전했을 때, 부대원들이 중공군의 포탄 파편에 맞아 쓰러지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상태임에도, 그는 그 부대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내 구했다. 그는 이 같은 용맹과 참전 공로로 퍼플하트와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우리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그는 전쟁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를 따라온 43명의 사병들보다 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나는 이등병이었고, 나중에는 하사로 군복무를 마치고 떠났다”고 말했다.
그날의 경험은 그의 자서전 제목에 영감을 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
랭글 의원은 “나는 북한에서 중국의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그 결과 그 이후로 나쁜 하루를 보내지 않았다고 책을 썼다”고 말할 정도로 6·25 전쟁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26일 우리 국회는
“6·25 전쟁 참전용사로 한미동맹 강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고(故) 찰스 랭글 미국 하원의원을 기리는 추모 결의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국회는 26일 오전 본회의를 열어 결의안을 의결했고, 재석 251명 중 찬성 248명,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은 랭글 의원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데 깊은 경의를 표하며, 미 의회에서 한미동맹 발전과 한반도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리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한미동맹의 가치와 정신을 기억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결의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국회에서의 랭글 의원에 대한 결의안은 6·25 전쟁 75주년을 기억하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참전했던 용사들의 정신을 기리며,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시키는 매우 뜻깊고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랭글 의원을 잊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또 있다.
그는 1977년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한반도 평화·통일 공동 결의안’, ‘이산가족 상봉 촉구 결의안’, ‘한국전쟁 종전 결의안’ 등을 꾸준히 발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지한파 의원 모임인 코리아 코커스(Korea Caucus) 창설을 주도해 초대 의장을 지낸, 미 의회 내에서 한국의 핏줄과 같은 역할자였다.
우리는 찰스 랭글 의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주고, 한미동맹의 핏줄이었던 그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 드린다.
대한민국은 랭글 의원을 그리워할 것이다. 고이 잠드소서.
<6.25 전쟁 75주년에 부쳐(2)>
- 6.25 전쟁의 잿더미속에 건져낸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한미동맹
6.25 전쟁(1950. 6. 25. 발발)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세계사적 맥락에서도 매우 크다.
6.25 전쟁은
첫째, 미·소 냉전의 본격적인 군사 충돌이었다는 점에서 국내전임과 동시에 국제전이었다.
6.25 전쟁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 양극 체제가 이념적 대립을 넘어 직접적으로 충돌한 첫 대리전이었다.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형성된 냉전체제의 첫 번째 실전 시험대였으며, 이로 인해 냉전이 단순한 정치적 긴장이 아닌 전면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구조임을 보여주었다. 전쟁 발발 7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전쟁 구조는 해체되지 않고 있다. 6.25 전쟁은 세계 최초의 냉전 무력 충돌이었다.
둘째, 동서 진영의 대리전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 구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 그리고 중공군(인민지원군)의 참전은 6.25 전쟁에 국제전의 성격을 강하게 부여하였다.
셋째, 6.25 전쟁의 결과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통일 가능성(군사적이든 평화적이든)이 남아 있었으나, 전쟁 이후 군사분계선(38선 → 휴전선)이 더욱 고착화되며 분단이 구조화되었고, 통일의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졌다. 특히 북한의 핵무기 보유로 통일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남북한 체제 분단이 심화되고, 이후 수십 년간 적대적 공존 체제가 형성되면서 일방의 통일 주도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통일의 변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넷째, 6.25 전쟁은 대한민국을 생존의 기로에서 성공적으로 지켜낸 방어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거의 전 국토가 점령되었지만,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을 통해 대한민국은 체제의 존속을 보장받게 되었다. 만약 6.25 전쟁에서 패했다면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6.25 전쟁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생존과 방어라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전쟁이다.
다섯째, 6.25 전쟁은 UN 집단안보체제를 최초로 실전에 적용한 모델이었다.
6.25 전쟁은 유엔이 안보리 결의를 통해 다국적군을 조직하고 파병한 첫 사례로, 이후 국제 집단안보의 모델로 간주되었다. 국제사회가 침략행위를 방관하지 않고 대응한 전례를 남긴 전쟁으로서, 세계 전쟁 억제에 상당한 기여를 한 측면이 있다.
여섯째, 6.25 전쟁은 한미상호방위조약(1953)을 체결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한미동맹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미동맹 이후 한국의 군사적·경제적·정치적 대미 의존도는 높아졌고, 미국은 한국을 동북아 전략의 핵심 거점지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일곱째, 6.25 전쟁은 한국 현대화와 산업화의 배경 형성에 결정적 기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국토와 산업 기반이 초토화되었지만, 이후 전후 복구 과정과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역으로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발판 삼아 추동되었다.
여덟째, 6.25 전쟁은 중국의 부상과 동북아 정세 재편의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6.25 참전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 정치 데뷔전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후 대만문제, 미·중 갈등, 동북아 세력 균형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6.25 전쟁 특수로 일본은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홉째, 전쟁의 상흔과 민족적 비극은 1,000만 이산가족이라는 아픔을 남겼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이산가족, 민간인 학살 등은 한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6.25 전쟁은 전쟁기억과 민족적 분단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 한국 사회와 정체성 형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한반도를 분단구조화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6.25 전쟁은 ‘한반도의 체제 경쟁이 냉전 세계질서 한복판에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생존과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동북아 및 국제질서가 재편되었으며, 동시에 민족적 고통이 깊어진 분단과 상흔의 시초가 되었다. 6.25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전쟁이었고, 이 비극적 전쟁의 결과 끝에 한미동맹이라는 군사안보조약을 탄생시킨 것은 오늘의 자유, 평화, 번영을 이끈 결정적 기여였다.
분단구조 하에서 생존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초당적인 차원에서 자유, 평화, 번영의 가치를 지켜내야 할 것이며,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이를 지켜낸 힘이 바로 한미동맹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한미동맹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의 진통 속에서 건져낸 자유, 평화, 번영의 희망이었다.
6.25 전쟁이라는 운명의 문 앞에서 탄생한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의 위대한 신화 같은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의 그날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새로운 시작과 진화, 그리고 그 끝은 바로 6.25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는 것이며,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탄생시킨 한미동맹을 더욱 강력한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런 역사관을 갖고 대통령특사로 한국전에 참전한 국가들을 방문할 때마다 가장 먼저 그 나라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탑을 찾아 헌화했고, 그분들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계신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뵙고, 국가와 국민을 대신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런 이후에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을 설명했다.)
2023.2.그리스 방문 시 한국전쟁 기념비에 방문하여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군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며 헌화하였으며, 그리스 참전 용사들을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023.2.앙카라 한국공원 한국전쟁 기념비를 방문하여 한국전쟁 당시 튀르키예 군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며 헌화하였으며, 튀르키예 참전용사들을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022.10.수리남 참전용사와
<6.25 전쟁 75주년에 부쳐(1)>
오늘 6·25전쟁 75주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전쟁 당시 청년이었던 용사들은 어느덧 80 노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나이와 달리, 나라를 지켜냈던 그들의 정신력만큼은 여전히 청년이었습니다.
당시 6·25 전쟁은 이 땅의 모든 청년들의 꿈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80 노병들에겐 새로운 꿈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국 통일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투혼은 잿더미로부터 자유와 번영을 지키고 일으킨 것을 넘어, 이제는 새로운 통일한국, 대한강국으로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75주년에 노병의 꿈을 확인한 것은 큰 희망의 발견이었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의 “노병은 죽지 않는다. 결코 사라질 뿐이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선 노병의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꿈인 조국 통일이 실현될 때까지는.
전쟁의 희생 속에 오늘의 조국이 있고, 우리가 있게 된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의 국군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 16개국 용사들의 피눈물의 대가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6·25 전쟁 희생자분들과 그 가족분들께 깊이 머리 숙입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장성민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