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월, 박정희 소장은 신설된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박 사령관이 처음으로 한 일은 자유당 실세 국害의원의 친척이 저지른 군내 부정사건 처벌이었다. 자유당 의원이 청탁을 위해 찾아왔지만 박 사령관은 부대 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는 매형 한정봉이 군납을 해보겠다고 연락했을 때도 칼같이 거절했다. 한정봉은 여러 차례 형편이 어려운 박정희를 도와준 적이 있었지만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별한 것이다. 한정봉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서울로 올라와 이권을 기웃거린 적이 있는데, 비서관을 보내 낙향을 권했지만 거절하자 경찰에 집 주변을 감시하게 하여 청탁을 원천봉쇄했다.
1960년 4‧19의거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박정희 사령관은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이 되었다. 박 사령관은 사찰계 형사들의 학원 수색을 금지하고 야당 인사들에게 고문을 가한 형사를 구속하는 등 엄정하게 계엄법을 집행했다. 박 사령관은 4월 24일 범어사에서 열린 시위 희생자 합동추도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올리기도 했다.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바로잡지 못해 어린 학생들의 희생을 불러온 점을 통렬하게 반성하는 추도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사회가 불안해지고 물가가 폭등하자, 박 계엄소장은 헌병대를 통원하여 매점매석과 바가지 가격 등 불법적으로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을 강력하게 단속하기도 했다.
1960년 5월 6일 김종필 중령이 부산으로 내려와 정군(整軍) 운동에 관해 자문을 구해 돌아갔다. 상경한 김종필은 5월 8일 길재호‧김종필‧김형욱‧석창희‧신윤창‧오상균‧옥창호‧최준명 등 육사 제8기 출신 장교 8명의 연명으로 정군을 주장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송요찬 참모총장은 국가반란음모죄로 이들을 구속한 뒤, 자신은 5월 19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박정희 소장은 7월 28일 광주 제1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장면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청년장교들의 숙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종필 등 16명은 9월 10일 혁명을 결의했다. 매그루드 유엔군사령관은 혁명모의 정보를 입수하고 신임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에게 박정희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때 장도영 2군 사령관이 박 소장을 2군 부사령관으로 영입하면서 숙군으로 인해 발생했던 문제는 김종필 중령을 예편시키는 선에서 끝났다.
한직인 제2군 부사령관 자리는 박정희 소장이 은밀하게 혁명을 모의하기에는 최적이었다. 나이는 여섯 살 아래지만 진급이 빨라 사령관이 된 장도영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민간인 신분이 된 김종필은 자유롭게 박정희 부사령관을 만나 혁명을 모의할 수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은 영등포에 있는 제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혁명주체들이 지휘소로 정해놓은 부대였다. 제6관구 사령부에서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은 헌병들이 박정희 소장 이하 혁명주체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제30사단에서 배신자가 발생하여 육군본부에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제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은 혁명군과 헌병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훗날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도 혁명주체 중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협조를 요청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김재춘 대령으로부터 긴급연락을 받고 제6관구 사령부 대신 영등포구와 김포군의 경계지점인 염창교로 가서 김윤근 준장이 이끄는 해병 제1여단 병력과 만나 한강인도교로 향했다. 해병대가 한강인도교로 진입하자 헌병대가 가로막았다. 혁명군과 헌병대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박정희 소장은 찦차에서 내려 헌병대의 저지선을 향해 걸어갔다. 곁에서는 이석제 중령이 카빈소총을 들고 함께 걸었다. 총알이 연신 귓전을 스쳤지만 박 소장은 허리도 굽히지 않았다. 김윤근 해병 여단장이 달려와 양측의 희생을 염려하며 철수를 건의했지만, 박 소장은 단호하게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치열한 총격전 끝에 혁명군은 마침내 헌병대의 마지막 저지선마저 뚫었다. 훗날 김윤근 준장을 필두로 함께 한강인도교를 돌파한 혁명주체들은 한목소리로 박정희 소장의 과단성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증언했다.
한강인도교를 돌파한 박정희 소장은 조금 늦게 도착한 공수부대 병력과 함께 남산에 있는 중앙방송국(KBS)으로 향했다. 한웅진 준장이 먼저 방송국을 장악하여 엔지니어와 아나운서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박정희 소장이 김종필과 함께 방송국으로 들어섰다. 박 소장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박종세 아나운서를 향해 차분하게 사태를 설명했다.
“지금 나라가 너무 어지럽소. 국회에서는 매일 싸움질이나 하고, 학생들은 판문점으로 달려가 북한 학생들을 만나 자신들이 통일회담을 열겠다고 합니다. 나라가 어디로 굴러갈지 위험하기 짝이 없어 우리 군부가 나선 것이오. 오전 5시 정각에 이것을 낭독하시오.”
박 소장은 김종필이 작성하여 인쇄해온 <혁명공약>을 내밀었다. 시간이 되자 박종세 아나운서는 그새 안정을 회복한 목소리로 <혁명공약>을 낭독했다.
<혁명공약>
하나,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넷,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한다.
다섯,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첫댓글 5,16비사 잘 읽어보고 새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 나타나 보이고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분을 묘소를 쇠말뚝이라니 죽일놈들
61년도 우린 문중 새니기 였었지~
아무것도 모른 천진난만 무구쟁이!^^
그해 여름은 무지 더웠는데,....난 그여름 방학전 부터 토껴,....8월말쯤 학교에 복귀하였지러....
그때 서울 가서리...삼엄한 군인들 모습을 일일히 다보고 겪고,....
시청앞에 탱크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고나
그때 나서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
우리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