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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영정(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대원군으로 봉해진 사람은 모두 4명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4명의 대원군 중에서 흥성대원군 만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진 유일한 대원군이다.
조선시대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였던.,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한성 종로방 안국동(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남연군은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 6대손 이병원의 차남.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남연군 작위를 받았다.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 군부인 여흥 민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17세 때에는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었고 일찌기 고아가 되었다.
13세에 외가의 먼 일족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결혼하였다.
딸 1명과 장남 흥완흥군 이재면, 차남 재황(고종)이 태어난다.
소실 계성월에게서는
이재선과 서녀로 우봉 이씨
이윤용에게 출가한 딸 1명을 더 얻는다.
그밖에 그를 오래 시중든 기녀 추선(1885년 사망)
평민 출신으로 서씨 성을 가진 양인 첩이 더 있었다.
1841년 (헌종 7년)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었다가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헌종 9년) 흥선군.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
1847년 종친부를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할 수 있도록 추진.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
심의면 등으로부터 흥선군을 "궁도령"이라고 조롱을 받기도 했다.
안동김씨지만 대원군 집정 후 불이익을 면하게 되었다.
1853년(철종 4년) 궁궐에는 무상으로 출입을 삼가했다.
왕족들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한 탓.
청년기의 이하응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려, 무뢰한들과 난행을 일삼았다.
투전에 가담도 했고 세도가문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
흥선대원군의 겉모습은 술에 취해 사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대장부로서의 기개가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식은 전조각에다가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닦아 크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까지도 감수했다고 한다.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파락호가 되어 찌그러진 갓을 쓰고,
시장터나 돌아다니며 살지는 않았다.
단지 인간관계가 넓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원군은 이호준과도 교분을 쌓게 되었다.
정실부인 아들이 없어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
흥선군은 이들 형제를 신임해
서녀를 이윤용에게 시집보냈다.
그 빌미를 흥선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흥선군은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와 그의 사촌동생 조영하와도 접촉
조성하와 조영하는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승감을 찾지 못하던
조대비에게 그를 소개하고, 흥선군은 종친 명분으로 조대비에게 접근.
비록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그는 왕족에게 주는 관직을 계속 맡았다.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 1843년 흥선군(興宣君).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 이후
종친부 유사당상·사복시제조·오위도총부도총관 등 한직을 지낸다.
'안동김씨 세도정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며
철종 유고시에 대비해 조대비와 가까이 지냈다.
왕족이 맡는 관직 중에서 유일하게 실무가 있는
관청이 왕족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종친부>였는데,
대원군은 1847년부터 계속 종친부 유사당상을 지냈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궁중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정보 입수
조대비에게 아들을 양자로 주겠다고 약속
조대비와 동맹을 형성했고
사돈인 이호준을 통해 알게 된
흥선군은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다.
안동 김씨 문중에서 흥선군과 줄이 닿은 김병학, 김병국.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밀약을 맺었다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자 후사 논의가 진행
그 중에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파락호 행실과 나이 등 조건에 걸려 묵살을 당했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자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해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정치적 측근으로 삼았다.
흥선군은 왕실 족보 상 왕위 계승에 근접한 인물은 아니라
왕위를 계승하려면 사전에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와
밀계대로 차남 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즉위시킨 뒤
1863년 12월 그는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1863년 12월 조대비 수렴청정,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보필
형식 상으로 수렴청정을 행하니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이 집권
안동 김씨 일문을 축출하고 문벌과 사색당파를 배제한 인사등용.
영의정 조두순, 좌의정 김병학, 훈련대장 겸 포도대장 이경하
1864년 판서와 좌찬성을 역임한 김병기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된다.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 명문 양반가를 일부 포섭하면서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김병국 등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
그러나 김좌근과 김병기는 그가 집정(執政)하는데 반대했다.
조대비는 김좌근 등 반발을 무릎쓰고 흥선군 정치 참여를 공식화
명목상은 조대비가 수렴청정, 실제로는 흥선군이 권력의 일선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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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 대원군으로 진봉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어 10년간 집권을 통해 왕권을 강화.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
그의 개혁 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 모순을 완화시켰으나
근본적으로 외세 침략을 저지하는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심화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헌의(獻懿).
이름 : 이하응(李昰應). 자 : 시백(時伯), 호 : 석파(石坡).
흥선대원군은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아들이 조선 26대 고종.
1863년 12월 후사가 없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즉위.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을 총괄.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김병기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며 세도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을 집중 발탁해 등용.
조선 500년 금기를 깨고 종친들을 요직에 등용
서얼의 관직 확대, 노론의 일당 독재도 깨트리고,
소외되어 있던 다른 당파를 이전보다 고르게 등용.
총명한 중인을 선발해 각 조(曹) 집리(執吏)로 배치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八道都執吏)를 배속시켰다.
제도면에서 권력체제 골간 중앙정치기구 개편에 착수.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이었던 비변사를 축소하여
중외(中外)의 군국사무(軍國事務)만을 관장하게 했다.
그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 같이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수습할만한 인물과
홍순목(洪淳穆)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備局)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고
1868년 비변사 대신 삼군부(三軍府) 복설(復設).
또한 훈련도감을 정비해 실질적인 군영으로 재건했으며,
'국왕 친위병' 용호영(龍虎營)도 정비해 병조판서가 통할했고.
대전회통(大典會通), 양전편고(兩銓便攷), 육전조례(六典條例) 편찬.
한편, 유교질서 재확립을 위해 이단사상을 탄압하고,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천주교도를 박해.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비용 충당을 위해 전국 각지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지방세력 기반인 서원을 정리
1864년 8월 서원 보유토지 면세 축소, 이듬해 3월 만동묘 철폐
1868년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게 하고, 수령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1871년 3월에는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전국의 서원을 모두 없앴다.
서원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해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이 된다.
사회경제정책
1862년(철종 13) 임술농민항쟁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
대원군은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군정(軍政)에서는 전주민 균일한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 시행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평등의식도 고취.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 도성 문세(門稅)를 징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 소요비용 조달을 위해., 당백전 주조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향촌사회 안정을 위해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
궁방전(宮房田)도 세금을 내게 했고
도장 (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금지
신설 궁방 토지지급 폐지 억제정책도 시행.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해유문기(解由文記) 작성도 철저히 했다.
또한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
병인양요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伽洞)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이 발생.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 빌미로 침공한 미국 함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종로를 비롯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철수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합류할 기회를 놓쳤다.
청나라 복장을 한 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해 대원군 축출을 추진.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섭정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
11월 고종 친정선포 후,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고 계획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서 사태수습 전권을 위임받자,
대원군은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려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
반개화정책을 폈으나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군에 의해
대원군은 톈진으로 납치되었고, 바오딩부[保定府] 유폐생활
이노우에 가오루, 이홍장(李鴻章) 밀의에 의해 1885년 8월 귀환.
대원군은 서울로 돌아와 운현궁에 반감금상태로 있었다.
1894년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을 무너뜨린 후, 그를 앞세우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했으나 자기 주장을 편다.
그가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자 이노우에가 정계 은퇴를 강요
그후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고종을 만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이 궁성을 빠져나가
아관파천 사건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로 은거.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석파정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서는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문제점에 대한 해결은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 침략도 심화되어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
1907년 대원왕(大院王) 추봉, 시호는 헌의(獻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