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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크게 이기고(245년) 동예도 연이어 토벌하자 위나라가 경초 연간(237~239)부터 대방군으로 건너와서 펼쳐왔던 유화통치책이 요동 공손씨와의 일전을 위한 일시적인 책략이었을 수 있다는것을 깨달은 대방군 주변 범부여계인들은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덩치를 불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됐다.
그래서 그 중 이주기간도 오래되었고 경기북부 일대를 아우를 만큼 세력도 큰 북부여(해모수의 고구려)출신의 하백→ 안학궁터의 우태(다시한번 말하지만 고조선이 아니라 졸번부여가 이동했다)→ 대방왕 구태의 계보를 잇는 고이왕을 중심으로 재빨리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도 반포하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2. 그러자 위나라는 기습적으로 고이왕의 사위인 책계왕을 살해하고 그 나라를 점령해 기리영을 설치하였다.
그후 협상이 벌어졌으나 오히려 여러 집단의 반발을 불러오고 고이왕과 후계자 분서왕때까지 그것을 동력으로 단결하여 계속해서 투쟁이 이어졌으나 분서왕 사후(292년) 뿔뿔이 흩어졌다.
3. 그중 서울지역으로 후퇴한 세개의 세력이 있었다.
분서왕 사후 이들은 책계의 아들 계왕을 중심으로 북한산 아래에 위례성을 건설하며 이주 하였으나 저간의 사정은 확실치는 않으나 소서노 집단과 분서왕집단이 함께 떨어져 나가면서 세력이 약해지자 북한강 비류왕에게 흡수 되었다.
305년 비류왕은 이들을 송파구 일대로 이주시키고 306년 그곳을 도읍삼아 307년 궁궐을 지으니 이나라가 바로 백제국이다.
그 뒤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축출할때 생긴 유민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며 더욱 세력을 키운 비류왕은 기습공격을 통해 318년 마한을 점령한다.
123을 요약하면,
사반왕 → 책계왕
고이왕 → 분서왕
이 두 집단이 조분왕의 사망후 계왕집단으로 흡수 되면서
사반왕(?) → 고이왕 (234~286) → 책계왕 → 분서왕 (286~292) → 계왕 ( 292~305)
이렇게 되었다가 우태의 적자를 자처하는 비류왕이 이들을 점령하면서
사반왕 →고이왕 (234~286) → 책계왕 → 분서왕(286~292) → 계왕 ( 292~305) → 비류왕(305~345)
로 정리된다.
우리가 보는 온조왕기는 계왕의 13년사에 비류왕 앞쪽 33년사 기록을 잘라내어 더해놓은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 13년조 흑룡출현 기록이 원래 비류왕 마지막 41년 기록이다.
지금 비류왕조에 실려있는 13년 이후의 기록들은 근초고왕의 기록 중에서 잘라내어 옮겨놓은 것이다.
4.두번째 백제 지배세력 마한
(1) 마한의 기원 진번(졸번)의 부여
한반도 충청과 전라지역은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동중국지역과 발해만 연안 그리고 서일본 지역까지 이어 지는 바닷길을 통해 인적 물적 교류가 있어 왔는데 보수적으로 본다고 해도 소위 연나라의 동정이 있은 후에는 발해만 지역에서 한반도 서남부로의 대규모의 이동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게 마한이다.
(2) 동이전의 해석에 대해
여러 동이전의 회전문 논리는 일단 부여=진국=진번=졸번 으로 이해하고 읽어야 된다.
엄밀이 따지자면 조금씩 다르지만 중국인들이 마구 혼용해 기록했으니 일단 그렇게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 대혼란은 사마천이 전국시대의 연나라가 침범하기전 요서(조선)와 요동(진번)에 걸쳐 존재하던 부여라는 정치집단의 존재를 어물쩡 말하지 않음으로 시작된것이다.
또 동이전에서 자립위왕 하지 못하는 진한의 왕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을 보면
마한은 이미 부여 이주민들이 정착한 국가였던 반면
진한은 부여계가 이제 막 왕권을 장악했으며
부여계와 기존 토착민들간의 구별이 가능했던 상황을
마한인이란 단어로 묘하게 비틀어 표현한다는것을 알 수 있다.
다분이 고의적이다.
결론적으로,
삼한은 한의 터전위에 예맥이 먼저 이주하고 또 부여인들이 여러 시대 또 여러지역에 걸쳐 큰 변혁이 있을때마다 지역으로 이주해 건설한 나라들이다.
5. 세번째 세력:계속 등장하는 말갈에 대해서
그 시작은 사기에 나오는 위만이 조선을 건국할때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여러 蠻夷들이고 나중에는 한사군에 속하게 된 이들까지 지시하는 멸칭이다.
예를 들자면
발해의 대조영 ===> 요동군 출신의 부여계 말갈인
조선상 역계상 ===> 위만조선 출신의 예계 말갈인
이렇게 표현하면 되는것이다.
6. 네번째 세력: 安邪國(남원)의 척분지(踧濆支)집단.
(1)이들은 애초 남원에서 발원하여 경상우도와 전라좌도의 산간지역에 웅거하며 동서간에 빗장을 걸고 교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세력을 불렸고
시조왕 탈해가 진한의 아시랑(함안)과 임나(고령)지역을 점령하고 계림(고려,가야,가라 다 같은말이다)을 건국하며 진한을 낙동강 동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으며
전성기에는 최하류지역을 제외한 낙동강 수계 대부분 장악하였으며 남해안에서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두고 전남지역의 왜국과 경쟁하였다.
(2)실성왕때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지역까지 점령하며 신라를 강원도 원주지역까지 몰아 넣었다가 광개토대왕에게 토벌 당했다.
(3)전쟁후 고구려 간접지배당시 신라의 6부중 감문국의 사피(斯彼),임나국의 본피(本彼) 2개부로 존재 하였다가
지증왕때 부터 신라가 고구려의 간접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점차 중앙집권화 하자 결국 멸망 하였다.
(4)본피부는 월광태자로 역사가 끝났으나 사피부는 진지왕시기에 금마저(익산)로 망명하여 임나 일본부를 세워 위덕왕,무왕,의자왕까지 외척으로 백제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5)또 의자왕의 숙청 후 많은 수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고대국가 일본의 태동을 이끌었다.
신라와 백제 일본 3국의 가장 오래된 인공 저수지의 건설자이며 정치,경제,종교,건설,토목,미술,사상등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는 감문국을 정벌한 영웅 우로의 자손으로 임나의 왕가로 우뚝섰고 중간에는 신라의 왕가였으며 나중에는 후기 백제의 귀족이였고 마지막은 여러 핏줄이 일본 천황으로까지 추존되었으니 생각해보면 정말 묘한 일이다.
(6)임나부흥을 내세우는 백제와 옛가야지역 쟁탈전이 시작되자 신라는 지방세력들의 자발적 협조가 절실하였고 이 지방의 인재들을 교육하기 위한 국정 역사서를 발행한바 신라와 대가야의 일체감 조성이 그 목적이였다.
(7) 계보조작
원래 신라는 위나라의 동예토벌로 생긴 유민을 수습한 유리왕이 강원도 원주지역 을 중심으로 건국한 나라다.
뒤를 이은 아들 파사와 손자 지마가 대다수가 반대하는 무리한 대가야 정벌에 연이어 실패하고 민심을 잃자 왕의 명령에도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병력을 잘 보존하고 있던 충주지역 임둔계유민들의 매금 세한이 왕이 되니 이이가 일성왕이다.
도식화 하면 이렇다.
혁서세 → 남해 → 유리 → 파사 → 지마 → 일성(세한 또는 성한) → 아달라(아도) → 벌휴(수류) → 미추 → 내물 → 눌지
이걸 대가야 왕의 계보
탈해 → 내해 → 조분 → 첨해 → 유례 → 기림 → 홀해 → 실성
와 엮어낸다.
방식은 이렇다.
1) 석탈해를 남해왕의 사위로 등장 시키고 이사금의 유래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3성 중 연장자 옹위라는 설을 풀어놓고 유리왕부터 이사금(원래 대가야왕의 명칭이다)의 명칭을 붙힌다.
달리 말하면 눌지마립간 이전 이사금시대의 계보는 조작이란 이야기다.
유리왕조에 기록한 이 에피소드는 일성을 신라의 실질적 건국자 유리왕의 적자로 자연스럽게 조작하는 효과도 보너스로 얻었다.
2) 일성왕의 손자인 벌휴를 탈해왕의 손자로 만들었다.
내해,조분,첨해 탈해왕 손자 3왕을 벌휴의 손자로 만들면서 유례, 기림, 홀해까지 가야 모든 왕들의 계보를 장악했다.
3) 문제는 실성왕이였다.
그냥 석씨왕으로 두자니 통치기간도 길고 너무 많은 업적과 영토확장이 있었다.
특히 경주시내까지 진출했고 국원(충주)을 장악한 기간도 길었다.
그래서 내물왕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골육상잔을 획책한 왕이며 고구려인에게 죽음을 당하는 왕으로 기록했다.
눌지와 제상의 처, 두딸만 후계자로 기록하면서 후계 승계를 단절 시켰다.
4) 미추왕부터 김씨로 바꿔놓은것은 훨씬 후대에 일로 왕위 승계에서 윗대에서 갈라진 방계들을 배제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보는 신라왕 계보가 만들어 진 것이다.
7. 다섯번째 신리아臣離兒, 불례不例, 구사拘邪의 진염지秦支廉
광주 나주지역이다.
선주민은 마한과 비슷한 시기에 요서지역에서 건너온것으로 보여지는 옹관묘세력이다.
후에 위나라가 대방을 직영하고 직할지를 넓히면서 부터 생긴 많은 부여계 이주민들의 종착지가 되면서 세력이 커졌다.
이때 마한과 함께 조공했고 진서 장화전에 실린다.
조금 뒤 소서노와 분서왕세력이 도착했으며 올랐다는 부아악은 광주 무등산 서석대와 입석대다.
정확히 어떤세력(옹관묘 소서노 분서왕 등)이 주체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제의 진씨가 그 왕성이다.
남해 제해권을 두고 가야와 전쟁을 벌이던 해상세력들을 가볍게 손에 넣고 제주도도 장악하고 신묘년 331년부터 마한과 연합하면서 남가야(본피부)와 전쟁을 벌여 조분왕을 살해하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등 가야의 해안과 중요 길목 7국을 점령하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광개토대왕 전쟁이 있은 후 자신들을 왜왕으로 칭하며 중국과 교류하였다.
8. 마한백제의 성립
마한왕은
삼국사기에서는 解仇등 解씨를 성씨로 기록하기도 했고 ( 졸본부여의 왕이라는 의미 )
肖古 , 仇首, 照古, 貴須, 奇生, 葛城, 久尒辛 등 순우리말을 음차한 명칭을 쓰기도 하였으며
(공주(고마나루),부여(소부리)의 왕이라는 의미)
木씨 성을 쓴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였으며(목지국의 왕이라는 의미)
중국과의 통교에서는 扶餘씨를 쓰기도 하였다.(부여전체의 왕이라는 의미)
이들은 비류왕에게 점령당한지 13년 후인
1) 신묘년 331년 부터 왜국과 연합한 마한은 군사적 우위를 살려 346년에 비류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백제를 점령하고 백제왕이 되었는데 바로 비류왕이 병관좌평으로 임명한 해구이며 근초고왕이다.
2).고구려의 남평양을 취하고 한성으로 도읍했다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은 이때를 말하는 것이다.
3). 근초고왕조 2년 이후부터 21년 까지 아무 기사도 없는데 이 19년 동안의 기록을 비류왕 13년 이후에 붙혀 놓았다.
이복형제 우복(비류왕이다)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는데 4년뒤 반역을 꾀하다 토벌당하고 진의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는게 주된 내용이다.
대방지역 왕들 기록을 지워버리고 선대 마한왕이였던 초고왕과 구수왕을 윗대 조상왕들로 만들었다.
여러 마한왕 → 초고 → 구수 → 비류 → 계왕 → 근초고왕
이 역사서가 남아있었다면 우리 고대역사의 시작이 몇백년은 빨라졌을 거고 더욱 자세했을 것이다.
최초 요동의 졸번부여에 동명이 왔던 그 시절 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4).고구려와의 대결
370년 근구수 왕세자가 칠지도를 만들어 동맹국왕이자 외할아버지인 왜왕 진지에게 준다.
전연과의 질긴 악연을 끊어낸 고국원왕이 396년 부터 남쪽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왜국으로부터 병력을 얻어낸 왕세자는 371년 공격해오는 고구려를 오히려 되치기 하고 평양까지 공격한다.
9. 고구려 간섭기간.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의 대결은 백제 내부적으로는 여러 구성원간의 갈등이 증대되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은 호태왕 비문과 백제본기와 비교를 통해 가설을 만들고 중국측 조공기사로 확인 하였으며 일본서기를 통해 교차검증한 연표이다.
백제 왕세자 여휘 384 – 388(4)
침류왕 388 – 389(1)
진사 389 – 396(7)
왕세자 구이신 396 – 401(5)
아신왕 401 – 414(13)
전지왕 414 – 429(15)
비유왕 429 – 455(26)
개로왕 455 – 475(20)
문주왕 475 - 479(4)
동성왕 479- 501(22)
무령왕 501 – 523(22)
성왕 523 - 554 (31)
이 비극적인 기간에 대해서 다음에 글을 써보겠다.
첫댓글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지배층 내부의 왕권투쟁을 흑룡 출현이나 모반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비류왕조는 다음처럼 흑룡과 모반이 동시에, 그것도 백제본기 <최초로> 등장합니다.
*비류왕 13년, 여름 4월, 최초 흑룡 출현, *비류왕 24년, 가을 9월, 최초 모반
참고로 백제본기 전체에서 이 외에 흑룡과 모반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는 웅진천도 직후의 대 혼란기인 문주왕 때 뿐입니다. 비류왕 재위기에 관하여 다음 4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1) 흑룡 출현과 모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흑룡 출현의 이유는 무엇입니끼?
3) 내신좌평 우복에 의한 모반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비류왕 41년 재위 중에 30년 기록이 왕의 마지막 모습이고, 이후 10년 동안 왕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