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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9일 [연중 제26주일]
마르코 9,38-43.45.47-48
사람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은 마치 손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잘라내고 눈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포용력과 함께 굉장한 단호함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용력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며 사람의 애정과 미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능력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배척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쉽게 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알고 품어야 할 사람을 아는 게 참 지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끊지 못해도 망합니다. 베토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카 카를에게 집착하였습니다.
형수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오랜 재판과정에서 매우 노쇠하였으며 카를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살 시도한 것 때문에 더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몇 달 뒤에 사망합니다.
중국 항우란 인물은 품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해 망한 경우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유방입니다. 포용력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일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사고나 치는 백수건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하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대장부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뜻을 키웠습니다.
반면 개인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하층민들도 필요한 부서에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꿈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엔 관심 없던 배나 다리를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처럼 천하통일을 꿈꾸던 유방은 누가 품어야 할 사람이고 누가 맞서야 할 사람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곧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처럼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품고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방법은 ‘목적의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있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조금 흔들리거나 흥분될 수 있어도 그 대본을 끝까지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연기나 주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디랭귀지』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많은 성공과 파산, 그리고 말기 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언제까지는 암을 극복한다, 언제까지 베스트셀러를 써서 재기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습니다.
전립선암 방사선치료로 정자가 생성되지 않고 아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개나 키우라는 의사는 차버리고 고환을 빼내어 정자가 생성될 수 있게 수술해 주겠다는 의사는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목적이 생기면 내 편과 아닌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돈 내고 방청석에 일단 앉았으면 무조건 내 편입니다.
그러나 연기에 방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끌어내야 합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관객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리고 대본을 받는 시간은 새벽 기도에서입니다.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파견된 날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 휘둘릴 일이 없고 같은 사명에 동참하는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9일 [연중 제26주일]
복음: 마르 9,38-43.47-48
이주민과 난민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도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에 단체로 예멘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 ‘이주자’에 대해 언급하시며,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품격있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큰 박수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냅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일 강론>
(2024. 9. 29.)(마르 9,38-43.45.47-48)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38-41)”
1) 여기서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는
“막았습니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어떤 사람’의 구마 행위를 막은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3-16).”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입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사도들만의 권한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긴 했는데(마르 6,7), 열두 사도에게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가 아니었지만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또 코린토 1서의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사도들을 ‘첫째’ 자리에 두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네 번째’ 자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이 사도들만의 권한은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고, 직무에 따른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하고, 아무나 마음대로 설치는 ‘월권행위’를 막아야 하는데, 지금 ‘어떤 사람’이 마귀를 쫓아낸 것을 월권행위로 보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옹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일을 승인하신 것과 같습니다.>
2)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 사도 입장에서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신자가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 그 당시에, 예수님은 알고 계시는데 사도들은 모르고 있었던 제자들(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께 어린 나귀를 빌려 드린 사람과 최후의 만찬 장소를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 등이 그런 제자들입니다(마르 11,1-6; 마르 14,12-16).
신자 수가 적었던 당시에도 사도들이 모든 신자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오늘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저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반대로,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세례 증명서’만 있으면 되나?
사실 그런 서류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으니,
그것이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 또 신앙인답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2) 공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떤 사람’의 일을 인정하신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3)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을 생각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이단’은 경계해야 하고, 물리쳐야 하지만, 다른 종교 사람들과 다른 종파 사람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모두,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3)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구원 사업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할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아니라도,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개방성’과 ‘보편성’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톨릭교회’ 라는 이름은 ‘보편적인 교회’ 라는 뜻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신자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배타적인 집단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