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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십자가 복음'을 외치던 김준곤 목사님 그의 생가와 고향 교회에 가서 보고 들었던 이야기 7년 전에 썼던 글을 여기 다시 되집어본다 . ------------------------------------
전남도민일보 2011. 3. 2 황영준 김준곤 목사 이야기(1) 거기서 만나자
봉리교회(신안군 지도) 세례교인명부 표지를 넘기니 첫 장에 김통안(1901. 8. 19-97. 10. 20)권사 이름이 적혀있다. 김 권사님은 6‧25 때 좌익에 의해 사랑하는 남편과 젊은 자부를 잃었다. 남편 김면주 씨의 비문에 ‘일제시 소작쟁의 사건에 가담하여 선봉적 역할로 일관하시고 농업에 종사하여 탁월한 기지로 풍요 단락한 가정을 영위하시니... 6‧25사변으로 인하여 1950년 8월 26일 60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기세하시었다.’ 라고 새겨져있다.
김통안 권사의 자부 인정진(김준곤 목사의 부인)도 그 해에 순교했다. 그녀 묘비에 ‘1924년 10월15일 생. 지도국민학교 교사 재직 중 주일학교 한 죄로 토착 공산당들에게 1950년 10월 3일 영광스러운 순교를 했다. 슬하에 딸 김은희가 있고... 남편 고향인 원동으로 피난 왔다 순교함.’이라 했다. 내가 몇 년 전에 보았던 비에는 ‘북만주에서 남편 따라 이 섬에 와서 밀 알 한 알처럼! 26세를 일기로 기도와 눈물과 사랑과 신앙의 거름되어 1950년 10월 3일 6․25 전란 중에 순교하여 여기 잠들으시다.’ 라고 새겨있었다. 좌익 폭도들의 무자비한 손에 살해된 것이다. 사상적 대립과 전쟁으로 인한 우리의 슬픈 이야기이다.
김준곤 목사님의 부인 인명진 사모님 순교 이야기다. 김준곤이 1948년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금촌교회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 일제 때 만주에서 살면서 그리고 8‧15 조국광복 후에 소련 공산당 군대의 만행을 보았던 그는 공산군을 피해 고향(신안군 지도)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평화스러웠던 섬마을 고향도 피난처는 아니었다. 지방에서 일어난 좌익의 광란에 공무원과 유지들과 주민들이 무차별 살해되고 있었다. 김준곤은 사방이 바다로 막혀있는 섬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며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피의 수렁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10월 2일, 부부가 긴장과 불안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찬송하고 기도했다. 사모님은 이미 흰옷을 입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 만날 준비를 했던 것 같다. 10월 3일 새벽 2시쯤. 폭도들이 들이닥쳤다. 김준곤은 아내와 함께 황금리 저수지 위로 끌려갔다. 그곳은 이미 피비린내 나는 사람 도살장이었다. 몽둥이, 죽창, 칼에 찔리고 찢기고 터져 숨은 거둔 시신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울부짖음과 신음과 분노는 아비규환이었다. 인정진도 그렇게 죽었다.
김준곤은 시신에 섞여 실신했다가 깨어났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한 집에 숨었다가 다시 붙잡혔다. 몸에 돌을 달아 바다에 던지기겠다고 했다. 그러던 때에 목포에 국군과 경찰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폭도들은 도망치기에 급했다. 김준곤은 버려졌다. 그렇게 산 자로 남았다.(김수진 한인수,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
김통안 권사님의 피멍이 든 슬픔과 원한을 누가 씻어줄 수 있었을까. 경찰이 들어와서 좌익을 색출하고 처형했다. 피해자들 신고 따라 그들은 끌려가고 죽어갔다.
김준곤은 내 가족을 죽인 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그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자며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을 숨기거나 보호했다는 것이다.
김 권사님도 김준곤 목사님도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떠나셨다. 김준곤 목사님은 딸(김신희)이 암으로 죽었을 때 “…지금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후일 내가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나면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 나와 주겠지요.” 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세상 고생을 통과했던 가족들과 함께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는가?
봉리교회 교인 명단. 세번 째 이름 고 인정진 사모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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