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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의 돈오성불 사상]
이제 돈오(頓悟)니 점수(漸悟)니 하는 것이 중국에서 시작된 개념임을 살펴보는 차례이다.
이러한 논변은 현대의 불교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갑론을박은 왜 생겼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어리석음이 다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어떠한 어리석음으로 생긴 것인가? [단박]과 [점차]에 대한 의미의 집착이다. 또 어떠한 [경지]에 대한 오해이다.
즉 한쪽은 [점차로 들어가는 경지가 아니다(돈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음이 모두 없고 번뇌가 전혀 없어야 비로소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의 주장은 번뇌가 소멸하더라도 차차로 소멸하는 것이고 아는 것도 차차로 알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돈오도 점오의 쌓임이라는 견해다. 이 두 가지 생각의 근저는 어떤 경지가 그것도 100미터 달리기의 결승점처럼 있다는 근본 어리석음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한마디로 타파하는 붇다의 말씀이 여기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있을 때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영혼과 육신은 같다’,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유한 하지 않다.’ 는 견해를 일으키는가?
[수행승] 세존의 말씀을 듣고 받아 지니겠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이 있을 때에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영혼과 육신은 같다’,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유한 하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수행승들이여, 감수가 있을 때 감수에 집착하고 감수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영혼과 육신은 같다’,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유한 하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수행승들이여, 지각, 형성, 의식이 있을 때 지각, 형성, 의식에 집착하고 지각, 형성, 의식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영혼과 육신은 같다’,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 감수, 형성,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에 집착하지 않고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영혼과 육신은 같다’,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유한 하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킬 수 있는가?
[수행승] 그렇지 않습니다. (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4], 589-623)
모든 형이상학적 이론들은 별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이론이 생기는 원인은 다름아닌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한 것을 밑천으로 탐착하고, 집착하고, 지각하고, 형성하고, 의식한 것을 이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탐착, 집착, 지각, 형성, 의식이 무상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논거의 바탕이 허망한 것이니 그 허망한 앎을 근거로 생각해낸 그 어떠한 화려하고 영원한 세계도 모두 귀신놀음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붇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불교의 형이상학 이론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의 뿌리가 깊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일종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을 돈점의 이론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것이다.
사람들이 [돈오다] [점수다] [정신이다][육체다]하는 개념과 말을 세워서 갑론을박하는 것은 그것이 중생들의 분별심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다.
[돈점의 논쟁은 사람들이 물질(몸에 대한 집착으로 그 몸의 깨달음을 생각함)이 있을 때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탐착하여 이러한 논쟁이 생긴다. 감수(깨달은 경지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함), 지각(진리를 지각하듯이 아는 상태나 경계가 있다고 봄), 형성(깨달음 세계를 상상함), 의식이 있을 때 감수, 지각, 형성, 의식에 집착하고 탐착하여 돈점의 논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생과, 사령운과, 그 후의 모든 스님들의 돈오에 대한 견해가 다 조금씩 다르고 점수에 대한 것도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생긴 의식 등이 그때그때 그 사람들의 지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서로 집착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마치 다음과 같은 논변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말한다. [지금 이곳은 밝은 것(돈오)이다], 또 다른 이는 말한다. [아니다
지금 이 곳은 어두운 것(점오) 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어리석음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진리법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방법은 오직 무엇이 틀린 것인 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다 놓았다 하는 것이다 버리고 놓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풍우란님의 책을 따라 그 논변을 소개하고 자세한 부분까지 옳고 그름을 살펴보자. ([중국철학사], 하, 269쪽, 풍우란, 박성규역)
승조와 동학이며 나란히 이름을 날린 사람이 도생(道生, 355-434)이다. [고승전]은 말한다
축도생(竺道生)은 본성은 위(魏)이고, 거록 사람이며 팽성에서 살았다…….
도생은 사색이 깊어짐에 따라서 언어 바깥의 의미를 꿰뚫어 깨달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무릇 상징이란 의미를 표현하려는 수단이니 의미를 터득하면 상징은 필요 없고, 언어는 이치를 설명하는 수단이니 이치를 깨달으면 언어는 종식된다. 불경이 전래된 이래 번역자들은 여러 가지 장애로 문자에 얽매어 온전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통발을 잊고 물고기를 잡아야 비로소 도를 논할 수 있다. 그는 진리와 속견을 비교 검토하고 인과의 이치를 탐구하여 마침내 “선은 응보를 받지 않는다”, “문득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설을 세웠다…….
[竺道生, 本姓魏, 鉅鹿人, 寓居彭城……. 生旣濳思日久, 徹悟言外, 迺喟然歎曰: “夫象以盡義, 得意則象忘; 言以詮理, 入理則言息. 自經典東流, 譯人重阻, 多守滯文, 鮮見圓義. 若忘筌取魚, 始可與言道矣.” 於是校閱眞俗, 硏思因果, 迺立 “善不受報’, “頓悟成佛.”
([고승전], 255-57)([중국철학사], 하, 251쪽, 풍우란)
즉 도생에 의해서 처음으로 돈오의 사상이 출발한 것인데 중국의 선종에서 문자보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과 같다. 도생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돈오라는 말이 탄생하면서 돈점의 계속되는 논란이 시작된다.
풍우란님에 따르면 “선은 응보를 받지 않는다”는 견해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혜원의 [명보응론(明報應論)]에 나오는 동일한 내용을 도생의 영향으로 추측한다. 이제 이 글부터 살펴보고 돈점의 논쟁을 살펴본다.
혜원(
4대(지수화풍)의 본성을 추론하여 이 몸을 만든 근본을 밝히자면, 4대의 상이한 사물을 빌려 하나의 몸을 형성한 것이니, 이 생명은 버려진 티끌과 같고 몸의 생성과 소멸은 모두 기의 변화에 불과하다. 이것은 바로 지혜의 통찰을 넣어 지혜의 칼로 분석하여 얻은 이치이다. 그래서 소멸과 탄생의 자연운행에 순종하여 모이든 흩어지든 주견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온갖 사물을 마치 큰 꿈 속의 사물로 간주하면 ‘유”의 세계에 살더라도 “무”의 세계에 사는 것과 같아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어찌 현재의 몸에 구애되거나 생명에 대한 미련에 얽매이는 일이 있겠는가?
만약 이 이치를 자기는 마음에 터득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면 독선(獨善)은 공덕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 아파하여 선각자로서 감회를 일으켜 마침내 도를 선양하여 가르침을 천명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서(仁恕: 타인을 구제할 마음)의 공덕을 펼치는 것이다. 만약 너와 내가 함께 행복을 누리고 서로 반목하지 않으면 칼싸움을 하더라도 신비한 합일 속에서 그윽한 인식을 얻고 전쟁터에서 서로 대적하더라도 막역지우가 만난 것처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상도 정신에 해가 되지 않고 죽일 생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문수보살은 검을 들고 반역의 길을 걸었으나 도에 순응했으니 온종일 창을 휘두르더라도 죽일 대상은 하나도 없는 경우와 같다. 이와 같으므로 사람들에게 각자의 지혜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고무했거나 형벌을 통해서 교화를 성취한 훌륭한 공들도 오히려 상을 받지 않았거늘 무슨 죄벌이 있을 수 잇겠는가?
[推夫四大之性, 以明受形之本; 則假於異物, 託爲同體; 生若遺塵, 旣滅一化. 此則慧觀之所入, 智刃之所遊也. 於是乘去來之自運, 雖聚散而非我. 寓群形於大夢, 實處有而同無. 豈復有封於所受, 有係於所戀哉? 若斯理自得於心, 而外物未悟. 則悲獨善之無功, 感先覺而興懷. 於是思弘道以明訓, 故仁恕之德存焉. 若彼我同得, 心無兩對; 遊刃則泯一玄觀, 交兵則莫逆相遇; 傷之豈唯無害於神, 固亦無生可殺. 此則文殊按劍, 跡逆而道順, 雖復終日揮戈, 措刃無地矣. 若然者, 方將託鼓舞以盡神, 運干鈸而成化, 雖功치猶無賞, 何罪罰之有耶? 若反此而尋基源, 則報應可得而明; 推事而求其宗, 則罪罰可得而論矣. 嘗試言之, 夫因緣之所感, 變化之所生, 豈不由其道哉? ([중국철학사], 하, 272쪽, 풍우란)
이 글은 [선은 응보를 받지 않는다]는 도생의 견해를 살피기 위한 것이니 한번 살펴보자.
위 글 중에 [독선(獨善)은 공덕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 아파하여 선각자로서 감회를 일으켜 마침내 도를 선양하여 가르침을 천명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서(仁恕: 타인을 구제할 마음)의 공덕을 펼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의 뜻은 이러한 것 같다. 즉 이 글의 善이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렇게 홀로 깨달아(獨善) 바야 세상에 이득이 되는 공덕은 없다는 것이다. 즉 함께 알아야 세상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는 공덕이 있는 것이지 혼자 깨달은 것으로는 이루어지는 공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천명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말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옳은 생각이다. 성인들이 자비심으로 법을 설한다고 보아도 좋지만 이 글에서처럼 이 세상의 행복은 함께 이루어야 하는 이치를 알기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선각자의 설법은 이러한 합목적적 이유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글과 같은 내용의 뜻이라면 이것은 위험한 사상이다.
[~생명에 대한 미련에 얽매이는 일이 있겠는가?]까지의 글의 내용과 깨달음을 근거한 소견이 아니고 無我의 뜻을 도가적으로 이해한 소견이다. 이러한 이해는 뒤의 소견에 여러 사상의 문제를 일으킨다. 즉 [그렇게 되면 살상도 정신에 해가 되지 않고 죽일 생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등의 소견이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아설을 天地不仁이라는 도가적 사상으로 이해함으로써 나온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서로 칼싸움을 하면서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말 장난일 뿐이다. 사람이란 보고 듣고 느끼는 그곳에서 진리에 전도된 존재이다. 정신으로는 반목하지 않고 몸에는 칼이 들어오는 이치는 오직 정신병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이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형이상학의 병인 것이다. 논리를 따라 판단한 정의 또는 이치는 [유물사관]과 같은 경우에서처럼 인류의 삶에 매우 심각한 병폐를 일으키는 것이다. 처음부터 레닌과 같은 독재자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칼 막스]라는 형이상학자가 있어서 그 사상에서 조금만 사상을 변형시키면 바로 레닌 등의 독재자가 나오는 것이다. 혜원의 글도 그러한 것이다. 어떤 초월한 관점이 있다고 자신 마음대로 상상하고는 그것을 근거로 너무나 엄청난 말을 너무도 태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깨달은 이는 세상의 그 어떤 악한 행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글이 되는 것이다. 인과를 부정하니 막행막식의 사상이다.
마치 현대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스와핑을 하는데 우리 부부는 해탈하여서 서로에게 질투도 느끼지 않고 남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으니 비난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고 우리 스스로도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으며 우리는 정말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이들과 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다음은 돈오 성불론이다.
[변종론]
신론도사(新論)는 “거울 같은 고요(열반)은 심원하니 단계적 접근을 용납하지 않으며, ‘배움의 축적’은 끝이 없으니 어떻게 저절로 종결되겠는가?”(도생의 말)라고 주장하였다. (사령운의 말)이제 부처의 “점오”를 버리고 그의 “능지(能至)를 취하며, 공자의 “태서(殆庶)”를 버리고 그의 “일극(一極)”을 취한다. …… 중생구제에 관한 이 두 논의는 원래 도가가 창안한 득의(得意: 진리 터득)의 설인데 이제 나는 절충하여 신론이 옳다고 여긴다.
[有新論道士, 以爲寂鑑微妙, 不容階級, 積學無限, 何爲自絶? 今去釋氏之漸悟, 而取其能至; 去孔氏之殆庶, 而取其一極. …… 余謂二談救物之言, 道家之唱得意之說, 敢以折中, 自許竊謂新論爲然. ([광홍명집], [대장경] 52, 225)] .([중국철학사], 하, 269쪽, 풍우란, 박성규역)
도생의 이 말은 돈오에 대한 도생의 학설임을 사령운은 말하고 있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 설명하는 것이다. 즉 붇다는 차차로 알아 가는 법을 말하였지만 그 궁극의 경지는 심원하고 신비하니 차차로 단계를 밟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설이다. 비유로 말하면 이러한 사고이다. 진리를 알아가는데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상태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소견이 남아 있어서 깨달았다는 말은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번뇌가 없는 어떤 상태를 있다고 보는 견해이며 또 그 상태에 도달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글에 따라 차차로 밝히겠지만 우선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는 이러한 설을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또 그러한 상태는 어떠한 말로 꾸며 보아도 상태이므로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이어지는 논변을 살펴보고 총체적으로 살펴보자.
승유(僧維)에 대한 사령운의 답이다.
질문) 신론법사에 따르면 궁극 목표는 심원하고 신비하니 단계적 접근을 용납하지 않는다. 배우는 사람이 유의 극한을 규명하면(유를 완전히 단절하면) 자연히 무(無)로 나아가 마치 부절의 경우처럼 일치가 되거늘 무슨 무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처럼 무에 의지하여 유를 규명할 경우 어찌 점오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承新論法師, 以宗極微妙, 不用階級. 使夫學者窮有之極, 自然之無, 有若符契, 何須言無也. 若資無以盡有者, 焉得不謂之漸悟耶?]
답) 번뇌가 없어지지 않으면 무는 터득할 수 없다. 번뇌의 폐단을 다 없애야 비로소 무를 터득할 수 있다. 번뇌가 없어지면 곧 무이니 진실로 부절을 합친 경우처럼 된다. 이 번뇌를 없애려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하지만, 유에 머무는 동안의 공부는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유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나 배움에 의탁하여 도달한다. 다만
“단계적 접근”은 어리석은 이를 가르치는 논설이고 “단박 깨달음”은 진리를 터득하는 이론이다.
[夫累旣未盡, 無不可得; 盡累之弊, 始可得無耳. 累盡則無, 誠如符契; 將除其累, 要須傍敎. 在有之時, 學而非悟; 悟在有表, 託學以至. 但階級敎愚之談, 一悟得意之論矣 [符契: 符節 꼭 들어 맞음] .([중국철학사], 하, 276-7쪽, 풍우란, 박성규역)
이 질문자와 답하는 사령운의 소견은 유무의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유의 세계에서 번뇌가 나고 그것은 무의 세계에서 완전히 없어진다는 소견이다. 도대체 왜 붇다의 깨달음의 세계를 도가의 무의 세계로 이해하는가? 중국에서 불교가 어긋나는 가장 큰 병통이 [무]임을 이 문답의 글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무의 개념에서 출발한 돈오의 개념은 그대로 중국불교의 한 특징인 선가의 논리가 된 것이니. 중국불교가 얼마나 엉터리 사상을 근거로 발전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질문의 요지는 이런 것이다. [무를 이해하고 차차로 유의 세계에서 그 이치가 무임을 규명하다 보면 무의 세계를 알게 될 수 있으니 차차로 규명하는 것이므로 점오라고 해도 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답변의 내용은 이렇다 [완전히 무를 터득하지 않고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는 유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불교를 조금만 이해한 사람이라면 [유의 영역 바깥의 무]라는 말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사상인 줄 금방 알 것이다. 이러한 유무의 대립적인 사고로 붇다의 깨달음을 논한다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 속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번뇌란 무엇인가?
번뇌란 생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생각들은 그 생각자체의 [있는 바 사실]을 여실히 알지 못할 때 그 것을 우리는 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번뇌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생각이 없는 무가 아니다 그 생각의 바른 이치를 알아서 번뇌와 보리가 다른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즉 깨달으면 나에게 괴로운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서 그것을 서로가 괴롭지 않게 하는 법도 알게 된 것이며,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 [사람은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즉 깨달음을 근거로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괴롭지 않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붇다의 말을 빌리면, 즉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의 머묾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바로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다. 번뇌를 소멸시킬 지혜를 얻은(열반: 궁극) 것이다. 사실 붇다의 법을 제대로 깨달은 이는 [내가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다]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없다 나의 것이 없다]는 법을 알고는 그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무의 상태를 완전히 체득했다.] [번뇌가 있다.]는 등은 무아도 아닌 유아의 소견이다. 무를 말하기 위해서 온통 유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로는 법을 설명할 수 없고 끝없는 논란이 이어지므로 선가에서는 입을 열어 한 마디의 말만 하려 하면 바로 몽둥이질이고, “활(꽥 소리치는 것)”을 해대는 것이다. 중국선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이 소견과는 다소의 다름은 있지만 그 근본은 이러한 잘못된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깨달은 것은 무의 세계이며, 노자의 세계이며, 체험의 세계이다. 결코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무의 세계도 무의 개념도 아니다. 이[무]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다. 이 [무]자를 근거로 하는 한 절대로 바른 깨달음은 이룰 수 없다.
다음의 문답에서 이들의 사상적 근거를 더욱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질문)가르침을 받들어 궁극적 진리를 추구할 때 그 마음이 영원히 작용하지는 않더라도, 추구하고 있는 동안 어찌 잠시라도 무(열반)와 부합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잠시 동안이라도 부합했다면 전혀 부합한 적이 없는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것이니 그것이 바로 점오가 아니고 무엇인가?
[夫尊敎而推宗者, 雖不永用, 當推之時, 豈可不暫合無耶? 若許其暫合, 猶自賢於不合, 非漸如何?
(답) 잠시는 거짓이고, 진리는 영원하다. 거짓 자각은 영원함이 없고, 영원한 깨달음은 거짓이 없다. 그러니 어찌 잠시의 거짓 자각을 가지고 진리의 영원한 깨달음의 영역을 침노할 수 있겠는가? 잠시의 부합이라도 전혀 부합하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그대의 말은 진실로 옳다.
[暫者, 假也; 眞者, 常也. 假知無常; 常知無假. 今豈可以假知之暫, 而侵常知眞哉? 今暫合賢於不合, 誠如來言,]
.([중국철학사], 하, 278쪽, 풍우란, 박성규역)
잠시 무와 부합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번뇌가 없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잠시 없는 번뇌는 소멸된 것이 아니고 잠복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번뇌가 [무]인 상태를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 이 [잠복된 번뇌]에 대한 구차한 이론이 이어서 등장하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번뇌에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번민과 고뇌가 붇다와 공자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오직 할 일 없는 도인을 추구하는 도가에서만 있는 경지이다.
번뇌의 흥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니, 마음이 촉발되어 번뇌가 생긴다. 번뇌가 항상 촉발되는 까닭은 마음이 나날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가르침에 따라 작용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번뇌가 나날이 잠복한다. 잠복된 번뇌가 오래되면 소멸된 번뇌에 이른다. 번뇌의 소멸은 번뇌가 잠복된 이후에 일어난다. 잠복된 번뇌와 소멸된 번뇌는 겉모습은 동일하나 실제는 다르므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소멸된 번뇌의 실체는 객관과 주관을 모두 잊고 유와 무를 하나로 보는 것이지만, 잠복된 번뇌의 상태는 남과 나의 감정을 구별하고 실과 공을 차별하고 자기와 남을 분리하는 것이므로 결국은 속박에 빠진다.
[累起因心; 心觸成累. 累恒觸者心日昏, 敎爲用者心日伏. 伏累彌久, 至於滅累; 然滅之時, 在累伏之後也. 伏累滅累, 貌同實異, 不可不察. 滅異之體, 物我同忘, 有無一觀; 伏累之狀, 他己異情, 空實殊見. 殊實空, 異己他者, 入於滯矣.]([중국철학사], 하, 280쪽, 풍우란, 박성규역)
[번뇌의 흥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니] 번뇌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번뇌가 즉 마음이다. 마음 따로 있고 번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범인에게만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성인의 마음에도 고뇌가 있는 것이다. 진리란 누구에게는 그렇고 누구에게는 안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성인은 번뇌의 원인과 머무름과 소멸의 이치를 알아 본인은 물론 남도 함께 번민을 덜고자 가르치는 것이다.
사령운이 말하는 잠복된 번뇌와 상대되는 소멸된 번뇌의 상태란 [객관과 주관을 모두 잊고 유와 무를 하나로 보는 것이지만]이라고 한다. 나와 남을 잊고 어떻게 살아갈까? 경계를 보고 경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요, 경계를 보고 경계를 인식한다면 마음의 작용이 있는 것이니 만약 번뇌가 없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잠복된 번뇌이다. 이치를 따져보면 말장난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비롯된 불교는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유위법이라고 하여 (노자의 개념을 빌어) 터부시하고 오직 깨달음(체험의)만을 가장 수승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기독교인들이 신은 믿어보면 아는 것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니, 붇다의 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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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 한잔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