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18> 경주이씨(慶州李氏) - 2
김성희씨가 써서 올린 글 뿌리를 찾아서 <18>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잘못된 기술이 많다.
장문의 글에서 원문은 【.............】로 나타내고 잘못 기술한 내용은 원문에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을 올립니다.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부터 현재의 희(熙)자 돌림까지 75대를 내려오고 있다.
씨족의 역사도 2000년이 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소판공 이거명 전까지 35대는 실전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설명대로 이거명 이전에도 이씨 성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진흥왕 이전에 세워진 신라의 비문들을 보면, 이씨(李氏) 성이 쓰여 있기보다는 마을 이름인 급량부와 이름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급량부 ○○’ 이런 식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알평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긴 쉽지 않다.
따라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이거명이 중시조가 된 것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 이후의 세계를 적었기 때문이다.】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부터 현재의 희(熙)자 돌림까지 75대를 내려오고 있다.]
소견)
시조의 子(자- 아들)부터 중시조(소판공)의 부(父- 아버지)까지 약 900여 년 간은 계대가 실전되어 35대인지 - 40대인지 알 수 없고 시조 이알평에서 부터 현재의 희(熙)자 돌림까지 75대를 내려오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신라건국 연도(서기전 57년)부터 지금 중시조 40세 ‘희.형’ 항렬까지 현재 2020년까지 2077년 정도이다.
▲[소판공 이거명 전까지 35대는 실전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다.]
소견)
앞글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시조의 子(자- 아들)부터 중시조(소판공)의 부(父- 아버지)까지 약 900여 년 간은 계대가 실전되어 35대인지 40대인지 알 수 없다.
다만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발굴되어 게재하였다는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35대를 적용하여 말하는 것은 사실적인 게대가 아님으로 이를 적용하여 소판공 이거명 전까지 35대 운운은 필요 없는 말이다.
▲[ 또한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알평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긴 쉽지 않다.]
소견)
김 모 교수의 논문에 위와 같은 글이 있다.
그러나 신라 6성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성씨이다.
남의 성씨의 시조에 대한 부정이 아닌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올라 있는 인물과 박. 석. 김씨도 위 논문대로라면 사실적이지 못한 성씨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소견)
남의 성씨와 시조에 대하여 부정하는 글만 써서 올렸다.
‘실질적인 시조’가 소판공 이거명이라면 경주이씨 시조 알평은 ‘형식적인 시조’인가
남의 성씨와 시조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위와 같은 글은 삼가야 한다.
경주이씨 후손들이 모두 시조는 이알평. 중시조는 이거명. 중흥조는 이핵으로 알고 있는데 중시조 이거명을 ‘실질적인 시조’라니 김성희 선생의 시조도 진흥왕 이후로 보면 그 이전은 김씨가 아니다.
진흥왕 이후의 김씨만 김씨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경주이씨에서 외래본관성씨를 제외한 수많은 본관들이 갈라져 나갔다.
이거명 이전에 분관된 성씨로 성주이씨(星州李氏) 등이 있으며, 이거명 이후에 이구(李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 이거명의 6세손인 이주좌(李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 이주복의 아들 이우칭을 시조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거명의 15세손인 편(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 이거명의 18대 이영재(李永梓)와 이군재(李君梓)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 이거명의 19세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등이 있다.】 ▲[이거명 이전에 분관된 성씨로 성주이씨(星州李氏) 등이 있으며, 이거명 이후에 이구(李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 이거명의 6세손인 이주좌(李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 이주복의 아들 이우칭을 시조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거명의 15세손인 편(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 이거명의 18대 이영재(李永梓)와 이군재(李君梓)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 이거명의 19세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등이 있다.]
소견)
온통 잘못된 내용이다.
아래와 같이 수정하여 나타내어야 바르다.
[이거명 이전 ‘시조 후손’에서 분관된 성씨로는 양식(陽植)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가 있고,
‘중시조 후손’에서 분관된 성씨는 중시조(소판공 이거명)의 5세손(=5대손)인 이주좌(李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 이주복의 아들 이우칭을 시조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거명의 14세손(=14대손)인 편(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 直幹직간)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 이거명의 18대 이영재(李永#27039)와 이군재(李君#27039)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 이거명의 22세손(=22대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등이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토종 이씨의 대종인 경주이씨는 소판공 이거명 이후 고려 말기에 들어와 크게 번성한다.
분파도 고려시대에 8개 분파로 나뉘고, 이후에 다시 70여개 파로 나뉘게 된다.
그중 8대파는 성암공파(誠菴公派),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등이 있다.】
▲[분파도 고려시대에 8개 분파로 나뉘고, 이후에 다시 70여개 파로 나뉘게 된다.
소견)
분파는 고려시대에 8개 분파로 분파된 것이 아니다.
경주 이씨는 총 14개 대파로 분파하였다.
이는 여러 대종회가 회합하여 계대를 따져보고 8개의 분적종과 14개의 대파로 분파한 후에 다시 중. 소파 80여 개 파를 다시 분파한 것이다.
▲[그 외에도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등이 있다.】
소견)
앞서 8대파는 중시조 본손 계통에서 분파하고 아래 6대파는 중시조 지손 계통에서 분파한 것이다.
판전공파(判典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교감공파(校勘公派)
시랑공(侍郞公)은 중시조 10세 부사공(휘 춘정)의 동생 시랑공(휘 춘림)을 가리켜 ‘시랑공파’로 분파한 것으로 하였으나 대종보 분파도에 의거하면 시랑공(휘 춘림)의 9세손인 직장공(휘 양오)의 직장공파(直長公派). 석탄공(휘 존오)의 석탄공파(石灘公派). 진사공(휘 존중)의 진사공파(進士公派). 교감공(휘 존사)의 교감공파(校勘公派)로 분파한 것이다.
첫댓글 한번 오류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크다고 봅니다.....빨리 수정되어야 겠지요 좋은정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