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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 순례 및 문화유적 답사기(5)
정진옥
제6일 ( 2016-09-04, 일요일 ) :
내금강( 표훈사, 만폭동, 보덕암, 묘길상, 삼불암 )
눈을 떠보니 7시가 다 되었다. 베란다로 나가 눈앞에 넓게 펼쳐진 장전항을 굽어본다. 물굽이(灣)라서 호수처럼 동그랗게 보이는데, 오른쪽은 바다에 면하는 쪽이라 산줄기가 멀리 낮게 보이고, 왼쪽은 뾰족한 바위봉들의 산줄기가 가까와서인지 제법 높게 벌려있다. 어제 보다는 드리운 구름이 많지 않아 왼쪽으로 있는 산줄기의 정상들을 볼 수 있는데, 산자락의 여기저기에 리본같은 구름띠들을 두르고있어, 이 역시 범상치 않은 어엿한 금강산의 한 자락임을 드러낸다. 호수같이 고요한 물굽이, 기품있는 바위산 줄기, 신비로운 구름띠 -산과 바다, 바위와 구름이 어우러진 신령한 아침을 몸으로 눈으로 코로 깊게 빨아 들인다. 금강산가족호텔이라는 이 시설을 이곳에 지은 이의 안목과 배려에 경의를 올린다.
아침식사를 위해 구내식당에 모인다. 김형근단장이 우리 일행에게 두만강 유역 어딘가에 큰 홍수재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인명피해도 많은 것 같다니, 안쓰럽다. 즉석에서 다들 기탄없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수재의연금을 갹출한다. 자세한 피해상황을 모르지만 이런 때 남북한의 정부간에 원활한 소통과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동포애 차원의 염원을 가져본다.
8시반에 내금강을 향해 출발하는데, 오늘도 역시 외금강호텔에 들린다. 오늘은 많이 걷기가 힘든 분들을 위해 중간에 두 팀으로 나누어 탐방을 한다고 하여, 김명주라는 해설강사를 덧붙여 태운다. 역시 밝고 예쁜 처녀이다. 하늘엔 컴컴한 구름이 가득하여,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고려의 이곡 ‘李殼’이라는 분이 쓴 동유기‘東遊記’에, 풍악“을 유람하려던 사람들 중에는 구름과 안개때문에 구경을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을 읽었는데, 오늘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차창으로 보이는 경관들이 다 수려하다.
숙소를 나온지 40분쯤이 지나고 차가 가파른 산길(아마도, 온정령; 857m)을 힘들게 오르고 있을때, 안내원이 오른쪽 차창밖으로 만물상이 보인다고 알려준다. 나는 왼편 좌석에 앉아 있는데다가 산봉우리가 높아서 그 봉들을 한번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차에는 전혀 빈자리가 없어 옮겨 볼 수도 없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물상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다소 위안을 삼는다.
차가 내리막으로 접어들고 나서 바로 ‘온정령굴’이라고 쓰인 터널을 지난다. 조명시설이 아예 안되어 있는지, 정말 ‘굴속같이’ 깜깜한 터널이다. 수려한 산길에 이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길을 지나고 이제는 넓은 들길을 지난다. 연초록 벼이삭들이 고갤 숙이며 익어가는 논을 지난다. 산간마을의 집들이 저만큼 안쪽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산하이다.
굴을 지난지 1시간이 될 무렵에, 그 옛날 고향 인근의 면사무소를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 곳에 차가 멎는다. ‘내금강명승지관리소’라는 건물이다. 아마도 관람허가절차를 밟나보다.
그로부터 약 15분후에 ‘장안사터’라는 표지말뚝이 있는 곳에서 차를 내린다. 보존유적 제96호임을 밝히고 설명판이 있다. 70여채의 절 건물과 많은 유물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다 불타버렸다는 내용이다. 군데군데 주춧돌만 보이는 빈땅으로 온통 무성한 잡초에 덮여있다. 70여 건물들이 있었던 대가람의 터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좁아 보인다. 아마도 주위 산자락들에 있는 초목들이, 이 텅 빈 땅을 그들의 세상으로 빠르게 환원시켜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저쪽 뒤편 멀리로 부도탑으로 보이는 석물이 하나 서있을 뿐이다. 장안사라는 유서깊은 거찰 스스로가, 우리네 어리석고 욕심많은 중생에게 제행이 무상함’을 설파키 위해 직접 자기 몸을 불사른 살신성인의 절실한 가르침이 바로 이 풀밭인지 모르겠다.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이라는 분이 남긴 장안사‘長安寺’라는 시를 인용하여 이 자리를 기려 본다.
烟霞深鎖洞中天, 說利浮圖萬劫傳; 松檜迎遮山上日, 竹筒流引石間泉.
轉輪藏動開深殿, 無盡燈明照大天; 梵唄聲殘群動息, 坐看凉月陟層顚.
저녁안개 짙게 끼어 하늘까지 감도는 골, 부처님 좋은 말씀 만겁을 전해오네.
높이 솟은 노송 끝에 서산 해 걸려있고, 잇대놓은 대나무 대롱 돌샘물 끌어온다.
전각 깊은 곳엔 법륜을 굴리는 대장경이 살아 움직이고, 꺼지잖는 등불 밝혀 온 우주를 비춰주네.
염불소리 끊어지고 삼라만상 잠이 드니, 산마루에 돋아오른 차가운 달 홀로 보네 - 졸역
불지암에서 기념촬영.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금순 해설강사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한지 10분쯤에 표훈사 경내(表訓寺 境內)에 도착한다. 차를 내리니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왼쪽으로 사찰건물의 기와지붕이 나무들 사이로 보인다. 12단의 돌층계 위에 세운 2층 누각양식의 능파루(凌波樓)가 맨 앞에 나온다. 절의 맨 앞 입구에 세워져 있는 건물임에‘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건넌 피안의 집’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 옆으로는 판도방(辨道房)이라 현액이 붙은 건물이 있다. '도를 찾는 사람들이 묵는 방’이라는 의미인 듯 한데, 요사寮舍가 아닌가 싶다. 국보유적 제 97호인 표훈사의 연혁을 소개하는 화강암 설명판이 있다. 679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의 건물은 1778년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다시 몇 계단을 올라간다. 널찍하고 정갈한 흙마당인데 중앙에 8층으로 보여지는 소박단순한 석탑이 있다. 마당 뒤로 ‘반야보전’이라는 현액이 있는 대웅전이 또 몇 계단 위 높이로 터를 잡아 건립되어 있다. 좌우로 영산전과 명부전이 벌려있고 뒤에는 작은 사당인 칠성각이 배치되었다. 왼쪽 맨 뒤로는 어실각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왕가를 위한 기도처이거나 궁중에서 부탁받는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인가 한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간결하다. 주지스님과 젊은 스님 한 분이 우리를 맞아 주신다. 부처님의 좌우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셨다는 대웅전에서 두 분 스님의 인도로 예불을 하고 작은 시주를 보탠다. 주지스님의 설명이 끝난 두에 단체사진을 찍는다. 약 30분을 머물렀다. 표훈대사가 창건한 절이라서 표훈사라고 한다는데, 스님의 법명으로 사찰명을 삼았다는 설명이 다소 의아하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두 개의 팀으로 나뉜다. 나는 만폭동을 보면서 묘길상까지를 다녀오는 팀에 든다. 표훈사를 나와서 녹은이 짙은 좁은 산길에 들어선다. 작은 계곡의 물길을 건너는 작은 철제교량이 나온다. 그 앞에 “금강문 108m, 보덕암 1669m, 묘길상 3747m”라는 이정표가 있다.
금강문 앞에 이르렀다. 외금강 구룡연계곡에서 보았던 금강문과 유사하다. 집채만한 천연바위 2개가 서로 몸을 맞대어 기대고 있다. 왼쪽 앞의 큰 바위에 금강문 금강문‘金剛門’이라 새겨져 있는데, 진한 녹색의 돌이끼로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그 바로 뒤에는 한글로 ‘원화문’이라고 새긴 화강암 표지석이 있다. 11시 15분에 이 원화문을 지난다. 이 만폭동을 이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원화동천‘元化洞天’이라고 하여, 후대에와서는 이렇게 원화문으로 부르기로 했나보다. 하긴 봉래 양사언이 이곳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초서체의 큰 글씨를 남긴 것이 더욱 ‘원화문’이라 개명한 배경일지도 모르겠다. ‘元化洞天’이란 기묘함과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계곡 옆으로 나있는 탐방로를 따라 7~8분을 가다보니,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 233호 금강초롱”이라는 팻말과 해설판이 있다. “금강초롱은 내금강만폭동구역의 묘길상부근에 퍼져 있으며, 그 면적은 7.5정보이고 그 자원량資源量은 4000포기정도이다.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1909년에 알려진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도라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식물이며 7~8월경 푸른보라색의 초롱모양꽃이 송이꽃차례를 이루고 몇개가 성글게 피거나, 드물게는 한개씩피는데 내리드리운다.” 얼핏보면 남가주의 산록山麓에서 자주 보게되는 Poison Oak을 닮았다.
왼쪽의 원천골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폭동 계곡과 합류되어지는 곳에 이른다. 튼튼하게 잘 축조된 교량이 있다. 왼쪽으로 수려한 암석미岩石美의 금강대가 절벽처럼 우뚝 솟아있다. 암봉巖峰의 가슴에 해당될 매끈한 부위에 지원“志遠”이란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왼편에 ‘김형직선생님 탄생예순돐기념’이라고 附記되어있다. 김형직金亨稷(1894~1926)은 32세의 젊은 시절에 살해된 김일성의 부친이고 지원‘志遠’은 그의 좌우명이란다. 사후 28년이 되는 1954년에 새긴 것으로 헤아려지니 아마도 회갑아닌 회갑을 기리는 뜻이 아닌가 추측된다. 민족의 서안인 金剛의 멋진 바위봉에 두드러진 큰 글자의 새김-다행이라면 특정인의 이름이나 어록語錄이 아닌, 좋은 뜻의 말이라서 거부감이 덜하다는 점이겠다.
이 금강대에서 부터 상류쪽인 화룡담火龍潭까지를 만폭동萬瀑洞 계곡으로 본다고 한다. 만폭동의 대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어유봉魚有鳳(1672~1744)이 남긴 류금강산기‘遊金剛山記’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 분이 60세였던 1732년경에 이 산을 유람한 내용이다.
“이 산에 뻗어있는 큰물은 셋이 있는데 만폭동(萬瀑洞), 내원통(內圓通), 영원동(靈源洞)이다. 만폭의 물은 한 줄기는 비로봉에서 나오고 한 줄기는 구룡령에서 나오고 한 줄기는 안문점에서 나와 이허대(李許臺) 아래에서 합쳐져서 서남쪽으로 몇 리를 흘러 화룡담(火龍潭)이 되고 선담(船潭)이 되고 구담(龜潭)이 된다. 선담은 못의 모습이 배처럼 생겼기 때문이며, 구담은 담 안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아래로 몇 步를 가면 진주담(眞珠潭)이 되고 벽하담(碧霞潭)이 되며, 아래로 몇 보를 더 가면 흑룡담(黑龍潭)이 되고 또 몇 리를 가면 황룡담(黃龍潭)이며 다시 몇 리를 가면 청룡담(靑龍潭)이니, 이른바 팔담(八潭)이다. 그 사이에 비파담(琵琶潭), 응벽담(凝碧潭) 같은 것들은 대개 모두 다 셀 수 없다.”
이 분은 상류에서 하류쪽으로의 기술하였는데, 우리는 하류에서 상류로 오르는 탐방을 한다. 금강대를 지나면서 만폭동계곡은 확실히 수려해진다. 철재로 건립한 튼튼하고 긴 다리를 지나 마치 잔교棧橋처럼 계곡의 직벽에 바짝 붙여 조성한 보호난간이 있는 탐방로를 걷는다.
오른쪽은 금강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는 만폭동의 계류溪流가 온통 폭포를 이루고 소沼를 이루면서 부단히 흘러내린다. 금강대에서 1분정도의 거리의 계곡 너럭바위에 예의 그 유명한 “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양사언의 초서草書글씨가 있다.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종縱으로 2자씩을 쓰면서 왼쪽으로 이어진다. 이 글씨의 주위에는 많은 人名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획수가 많지 않은 뒤의 ‘元化洞天’ 네 글자는 마치 뱀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이 구불구불하다. 유명한 文人이며 조선의 4대 명필로 꼽아주는 분의 글씨라니, 그런가 보다 한다. “금강산의 값을 10,000냥이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5,000냥은 봉래 양사언이 만폭동의 바위에 남긴 글씨의 몫”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런 류의 글자새김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대자연의 외람된 훼손인가, 의미있는 인간역사의 기록인가?”
금강산 계곡에서의 깨우침인데, 옛 시절에는 탐방객의 이름이나 싯귀를 돌에 새기는 것을 업으로 삼는 石工들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골 저 골, 이 바위 저 바위에 새겨진 인명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아마도 몇 푼 품삯을 받고 이들 이름을 새긴 그 石工들의 바로 그 손으로 마애불인 묘길상妙吉祥도 삼불암三佛巖도 새겨졌을 것이겠다. 善과 不善을 따지기 어려운, 우리네 인간들의, 실로 고금동서에 일관된 장수와 영원에 대한 본원적 희구심의 발로라고 이해해야 할 것도 같다. 하기는 인간의 흔적이나 설화가 아예 없는 대자연에서는 인간 입장에서의 풍류라는 맛이 덜 하고 어쩌면 생소함 공허함 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양사언이 없고, 김규진이 없는, ‘봉래풍악 원화동천’이 없고, ‘미륵불’이 없는 금강산이란다면 뭔가 아름다운데 향기가 없는 꽃이랄까, 절세가인인데 온기가 없는 그런 좀 무미한 경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계곡 뒤로 솟아있는 산봉우리도 역시 금강산답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명징한 옥빛의 물이 흘러 넘치는 潭沼와 와폭臥瀑을 여럿 지나는데 사람들이 그에 붙여놓은 이름들은 모르겠다. 튼튼해 보이는 다리를 통해 계곡을 오른쪽으로 건넌다. 계곡바닥이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굴곡없이 매끄러운 반석으로 되어있는 지역이다. 계곡의 오른쪽에서 이제 기슭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온다. ‘흑룡담’이라는 표식이 보인다. 지금 시각이 11시40분이다. 바위와 시멘트를 섞어서 내구성이 있게 만든 표식이다. 면적이 130평이고 깊이가 7.5m란다. 마당같이 넓은 너럭바위를 타고 수렴水簾으로 넓게 갈라진 채 미끄럼을 타고 내린 물들이 잠시 여울져 흐르는 큰 담소이다. 못의 저편 기슭의 바위절벽면이 유난히 검은 빛을 띄고 있다. 흑룡이라는 이름이 이에서 비롯됐겠다.
상류쪽으로 또 다른 철재 허궁다리가 보인다. 다리 너머로 오른쪽 암봉 중턱에 제비집처럼 조그맣게 붙어있는 것이 보덕암이라는 암자란다. 흑룡담 바로 위에 있는 비파담을 지나고 다시 벽파담을 지난다. 다리까지 다가가는 계곡의 바닥이 온통 운동장같이 너른 바위마당이다. 그러고보니 외금강구룡연 계곡은 사나운 야성의 물길이 크고 둥그럼한 바위덩이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격의 격렬함으로 비유한다면, 이곳 내금강만폭동 계곡은 차분히 순치馴致된 물길이 넓고도 반반한 너럭바위들의 보드라운 몸결을 간지르며 애무하며 흐르는 경쾌함으로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쪽이 약동이라면 이 쪽은 원숙이고, 그 쪽이 동動이고 무武라면, 이 쪽은 정靜이고 문文이 아닐까. 물론 상대적인 관점에서의 그런 특성이 있는것같다 라는 의미이다.
허궁다리를 건너 보덕암을 향한다. 다리 밑으로 보이는 큰 연못처럼 넓은 물웅덩이가 분설담이겠다. 법기봉 중턱의 절벽에 달랑 매달려있는 형국인 보덕암으로 오르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2자 남짓될 좁은 폭의 돌로 쌓은 계단을 밟고 오르는데 경사가 아주 급하고 약간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오른다. 이윽고 산 중턱에 오르면 10평 내외로 조성된 평지에 닿는다.
국보유적 제99호라는 팻말이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판이 있다. – “보덕암은 고구려 중 보덕이 세웠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167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높은 절벽위에 9m의 구리기둥 하나로 떠받든 한 동의 건물에 우진각, 배집, 합각식의 조선건축지붕형식이 배합된 기발한 건축수법으로 지은 것으로서 금강산의 수려한 자연경치와 어울리는 정교한 예술적 미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보덕암은 앞에서는 3층 건물로 보이는데, 실내에 들어가보면 단층이다. 바깥의 평지가 3층 지붕의 추녀와 같은 높이라서, 절벽 아래로 향하는 10 단계 쯤의 무너질 듯 위태로운 형세의 좁은 돌계단을 내려가서야 암자의 입구에 닿는다. 폭이 60cm쯤이고, 높이는 사람이 겨우 일어설 만큼인, 좁은 통로로 들어가서, 왼쪽 문을 열면 바로 절벽 바깥의 허허공중으로 만폭동 계곡이 저 아래로 까마득하고, 오른쪽은 천연의 좁은 석굴이 바로 코 앞이다. 폭이 약 1m, 깊이는 약 2m, 높이는 사람의 키에 맞을 정도이다. 안으로는 더 좁아지는데, 더 안쪽에는 허리높이쯤의 석단을 쌓았다. 불상을 모시고 일용품을 얹는 용도였겠다. 6면이 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석굴로, 홀로 고행을 겸한 정진도량으로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천연의 석굴을 수행도량으로 삼으려는 보덕의 아이디어가 이러한 독특한 건축물을 조성해낸 것이리라. 석굴의 맨 안쪽에는 빛이 들어오는 작은 틈새가 있으니 환기는 될 듯하다. 이 몸이 천학비재淺學非才라 직접 읊진 못하겠고, 선인先人의 詩 한수를 빌어 어설픈 내 감회를 승화한다.
鐵鉤銅柱勢相撑, 石室雲樓坐欲傾; 特比世途尙安地, 老僧無累度平生.
쇠갈구리 구리기둥 서로서로 버티었네, 돌집이며 구름루대 앉으면 무너질라,
사바세계 비겨보면 그래도 편안한 곳, 늙은 스님 한평생을 탈없이 보냈으리.
- 퇴어당退漁堂 김진상金鎭商(1684~? ) ‘보덕암普德窟’ - ‘금강산 한시집’
우리 일행이 한번에 암자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교대로 돌계단을 내리고 오르며 암자의 내부를 살펴본다. 이 보덕암寶德庵의 앞마당은 천길허공이라는 점이 生疏하고, 뒷마당은 가장 윗쪽 지붕과 높이가 같다는 점이 기묘하다. 뒷마당에서는 축소된 萬瀑洞의 계곡을 지붕너머로 볼 수 있으며, 서쪽의 촛대봉이 아주 가깝다. 촛대봉은 대체로 북한산의 인수봉처럼 미끈한 화강암으로 보이는데, 좀 더 뾰쪽한 삼각봉이면서 약간의 판상절리현상이 빚어져 있어 암석미가 탁월하다. 또 성긴 소나무들과 조화미가 더해진다. 꼭 닮은 모양의 두 봉우리가 남매라도 되는 양 가까이 딱 붙어있는 점도 희귀하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아슬한 보덕암 계단길을 내려와 아까의 허궁다리를 되 건넌다. 上流를 향해 다시 걸음에 나선지 몇 분에 또 하나의 장엄한 와폭臥瀑과 담소潭沼가 나온다. 진주담眞珠潭이 아닌가 짐작한다. 계곡 바닥 전체가 한 덩이의 넓직하고 미끈한 암반으로, 이 풍성한 만폭동의 물줄기가 얇고 넓게 퍼지면서 미풍에 너울거리는 비단포가 되어 부드러운 형세로 흘러 내린다. 듣건대 이 만폭동萬瀑洞을 포함한 내금강의 물줄기들은 북한강北漢江의 上流가 되므로 나중에는 당연히 서울을 감싸고 흐르는 한강이 되어지고 종내는 西海로 流入된다고 하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국토분단 민족분단의 통분함이 새삼 절실하다. 지금 이렇게 진주담眞珠潭이라 불리며 내 곁을 흐르는 이 물들이 더욱 정겹고 소중하고 또 안타깝다.
계곡의 왼쪽 암봉巖峰의 기슭에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이 썼다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이라는 단아한 해서체楷書體의 큰 글씨가 종縱으로 새겨져 있다. 곧이어 역시 이 분이 썼다는 천하기절‘天下奇絶’이라는 초서체의 글씨도 보인다. 역시 縱으로 내려 썼는데, 워낙 굵고 깊게 새겨져 있어서 마치 이 만폭동萬瀑洞 계곡의 담소潭沼에 숨어있던 용龍들이 마침내 하늘의 허락許諾함을 입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암벽岩壁을 타고 승천하는 것이란 상상想像에 빠진다.
다시 잠시의 걸음으로 구담에 이른다. 역시도 넓은 반석의 계곡바닥 중간에 거북의 모습을 한 바위덩이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거북이 못’으로 불리게 되었겠다. 해설강사 아가씨가 이 거북바위에서 5~6m아래의 작은 못의 가운데에 있는 까만 동혈洞穴을 가리킨다. 이 구멍은 동해의 용궁으로 통하도록 뚫려있어서 때로 거북이가 이곳을 통해 용궁을 오가기도 한다는 전설이 있단다.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지만, 별주부와 용왕님의 이야기를 代入해 본다. 거북이, 자라, 남생이는 다 거북의 범주에 든다니, 이 거북이를 별주부로 간주하고, 용왕님의 근황近況이 어떠신지, 病은 다 나으셨는지를 주부벼슬의 이 거북바위를 향하여 물어보고 싶어진다. 아 참,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이 거북님은 이젠 주부主簿 아닌‘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쯤의 어엿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차陞差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는 당찬 모양새를 보니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오른지도 하마 오래 전의 일이었나 보다. 이런 명승을 탐방함에 있어서는 事實로 볼 것이 아니요, 想像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六堂의 권고는 정말 탁월한 견해임이 分明하다.
다시 上流를 향한다. 50m쯤의 앞에서 계곡이 왼편으로 굽어지는지, 계곡의 정면이 높직한 봉우리에 가로 막혔다. 푸르른 나무들이 가로막은 봉우리의 大綱을 덮고 있는 중에 맨 앞의 한 부분은 岩壁의 맨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래로는 또 하나의 와폭臥瀑과 潭沼가 눈처럼 희게 부서지고 비취처럼 푸르게 고여있다.‘선담船潭’이라는 못이 바로 여긴가 보다. 뒤편에 드러난 바위벽이 영락없는 범선帆船의 회색빛 돛이다. 팽팽한 바람을 돛에 담고 담소潭沼의 푸른 물에 떠서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 척 범선이 완연하다.
다시 2~3분을 나아가니 이제는 계곡이 완연히 평평하다. 양안의 숲도 더 푸르르다. 얕으면서도 넓은 담소가 나온다. 火龍潭일 것이다. 다른 潭沼들이, 계곡의 암벽 암반과 조화를 이루었다면 이 화룡담火龍潭은 兩岸의 숲과 조화調和를 이루는 情景이다. 물의 흐름이 순하고 완만하다.
金剛門에서 이 화룡담火龍潭까지의 1.2km가 北韓의 천연기념天然記念物 제455호로 指定된 만폭8담 또는 내팔담內八潭이라고 부르는 구간이다. 下流부터의 순서로는 흑룡담, 비파담, 벽파담, 분설담, 진주담, 구담, 선담, 화룡담을 꼽는다. 앞의 7담이 폭포“瀑布 아니면 소沼, 沼 아니면 瀑布”였다면, 이 화룡담火龍潭만은 다른 7 담潭들과는 달리, 넉넉하면서 평화롭고 푸르른 아름다움이다. 굴곡이 큰 계곡 아닌 평활平闊한 물길을 따라가는 양상樣相이다. 주로 널찍한 盤石들을 타고 와폭臥瀑으로 담소潭沼로 이어지던 계류溪流가 이제는 그닥 크지않은 둥근바위나 자갈이 깔린 물길을 따라 낙차落差없이 유장悠長하게 흘러간다.
외금강쪽에 주로 서식한다는 홍송紅松 또는 미인송美人松들이 계류溪流의 양편 언덕받이에 간간이 그 요염한 자태를 드러낸다.‘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로 무정한 님의 발길을 붙잡으려던 天下의 해어화解語花 황진이의 교태가 여기에 어른거린다.
화룡담火龍潭에서 15분 가량 걸어 이정표里程標가 있는 곳에 다다른다. 일부 숫자가 마멸되었는데,‘마하연터 102m, 묘길상 708m, 표훈사 2553m’로 읽힌다. 우리는 이제 만폭동萬瀑洞구역을 벗어나 백운동白雲洞구역에 들어온 것이란다. 12시27분이다. 마하연摩訶衍 절터의 입구에는 공덕비와 ‘금강산마하연중건사적비’가 있는데, 마하연摩訶衍을 의상조사(625~702)가 創建한 것으로 새겨 있다. 마하 마하‘摩訶’란 크다는 뜻으로 대승大乘을 의미하고, 연‘衍’이란 넘친다는 의미라고 하니, 뭇 중생衆生을 크게 제도濟度하겠다는 서원誓願을 담은 이름일까 추측推測해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