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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而騙(군자이편)
君:임금 군, 子:아들 자, 而:그리하여 이, 騙:속일 편.
어의: 점잖은 사람(군자)이기 때문에 속는다는 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속는다는 뜻이다. 즉 순수하기
때문에 남에게 이용 당하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동정하는 말이다.
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9대 숙종 때 조태채(趙泰采. 1660~1722)는 호가 이우당(二憂堂)이었으며, 우의정을 지냈다.
그가 부인 심(沈)씨를 잃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하급직의 서리 한 명이 근무 시간에 늦게 출근하여 벌로 볼기를 때리려 하자 울면서 호소했다.
“소인은 잘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사정 말씀이나 드리고 벌을 받아도 받겠습니다. 소인은 상처를 하여 어린 것 셋을 데리고 있사온데 큰 놈이 다섯 살, 다음이 세 살, 끝이 딸년으로 난 지 여섯 달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아비 겸 어미 역할을 하며 키우고 있사온데, 오늘 아침 어린 것이 울고 보채어 이웃집 아주머니께 젖을 좀 먹여 달라고 부탁하고 나니 나머지 두 놈이 또 배고프다 울기에 죽을 끓여 먹여 주고 오느라 이렇게 되었사오니 그저 죽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조 정승은 눈물을 지으며 동정했다.
“네 처지가 정녕 나와 같구나.”
그런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보니 그 하급 서리의 행위는 모두 매맞는 것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상관의 정에 호소하여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태채 정승은 노론(老論)의 네 대신 중 한 사람으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지만 천성이 워낙 착해서 이처럼 하급직 서리에게도 속을 정도였다. 그는 나중에 소론(少論)에 의해 세력이 밀리자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후에 소론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權心常守(권심상수)
權:권세 권, 心:마음 심, 常:항상 상, 守:지킬 수.
어의: 권력자의 마음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 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권
력자는 항상 권력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문헌: 오상원 우화(吳尙源 寓話)
동물 나라에서 호랑이 임금이 노경에 접어들자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된 옥좌를 더듬다가 불현 듯 자기의 권좌를 노리는 자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급히 산속의 짐승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명령이 떨어지자 많은 짐승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심을 받자옵고 황급히 달려왔사옵니다. 무슨 긴한 분부라도?”
호랑이 임금은 위엄을 갖추고 한번 둘러본 다음
“빠진 자가 없으렷다?”
하고 물었다. 표범의 얼굴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여우가 말했다.
“표범 어르신께 전갈을 했으나 출타 중이라 아직 대령치 못했사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심히 불쾌한 듯 입속에서 큰 숨을 한번 죽인 다음 입을 열었다.
“짐이 그대들의 도움을 받아 권좌에 오른 후 참으로 긴 세월이 흘러갔다. 이 긴 세월 동안 짐이 무한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짐을 보좌한 노고 때문이라는 것을 짐은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짐도 노경에 접어들고 보니 하루하루 기력은 쇠약해지고,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 또한 흐려져 예전과 같지 못하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보다 강력하고 총명한 후계자를 골라 이 권좌를 물려주려고 한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여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금님의 그 깊으신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부디 그 결심을 거두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제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찌 자기의 노쇠함을 탓하여 나라와 백성을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오니 그 뜻을 거두심이 옳을까 하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늙은 산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짐은 늘 그대의 깊은 경륜을 높이 사오고 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뜻도 같은 줄로 아뢰옵니다.”
호랑이 임금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늙은 산양은 호랑이 임금이 여우의 말을 듣는 순간 입가에 흘린 웃음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는 늦게 당도한 표범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늘 마음속 깊이 그대를 후계자로 점찍어 왔었다. 자,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황송하옵니다.”
표범은 일단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당당하게 말했다.
“예로부터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자기를 알고 모르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영광이 다하기 전에 자리를 물러나면 길이 영광을 누릴 수 있으나, 영광이 다한 연후에 물러나면 남는 것은 회오와 모멸뿐이라 하였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인 모두가 짐의 듯을 거두도록 만류하는데 그대만이 그렇지 않으니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랑이 임금은 표범을 한 입에 물어 쓰러뜨리고 나서 한탄하듯 말했다.
“짐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짐은 이보다 더 슬플 수가 없구나! 바라건대 앞으로는 짐이 또다시 이런 슬픈 일을 겪지 않도록 하라.”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金頭麗臣(금두려신)
金:쇠 금, 頭:머리 두, 麗:빛날 려, 臣:신하 신.
어의: 금으로 된 머리의 고려 신하라는 말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이 주군 왕건을 위하여 목이 잘린 고사에
서 유래했다. 목숨을 바칠 정도의 충절을 의미한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고려의 충신 신숭겸(申崇謙.?~927)의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이었으며, 시호는 장절(壯節)로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이다.
918년,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패악무도를 일삼자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의 집에 모여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결의를 했다.
신숭겸이 왕건에게 말했다.
“폭군의 폐위는 대세이자 천명(天命)입니다. 그러니 하(夏)나라의 걸(桀)과 주(周)나라의 주(紂)와 같은 궁예 왕을 폐위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왕건이 주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오, 그런데 비록 왕이 난폭하다 하더라도 신하된 도리로 어찌 두 마음을 가지겠소?”
그러자 좌우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피폐한 백성들의 원성 또한 하늘을 찌르는데 장군께서 이를 외면하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 됩니다. 또 하늘이 주는 운(運)을 제때에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됩니다. 대세의 좋은 기운은 만나기 어려운 법,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모인 사람들이 이번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자 왕건은 할 수 없이 허락했다. 고려의 개국 위업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개국이 완성되고 평화롭던 어느 날, 신숭겸이 태조(太祖) 왕건을 따라 평주(平山)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그때 하늘에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했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 있겠는가?”
신숭겸이 나서서 말했다.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힐까요?”
그러자 태조가 신숭겸에게 말했다.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보시오.”
신숭겸이 즉시 활시위를 당기자 날아가던 세 번째 기러기가 땅에 떨어졌다. 확인해 보니 과연 왼쪽 날개를 맞고 떨어져 있었다.
태조는 신숭겸의 활 솜씨에 감탄하고 근처 땅 300결(結)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삼도록 하고, 본관(本貫)을 평산(平山)으로 지정해주었다. 사람들은 그 땅을 궁위(弓位)라고 불렀다.
태조 10년, 서기 927년에 태조는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졍기(精騎)5천 명을 거느리고 후백제를 치고자 공산(公山)에 이르렀다. 그 소식을 접한 견훤(甄萱)은 야음을 틈타 고려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신숭겸이 태조에게 말했다.
“제가 대왕의 용모와 비슷하니 대왕으로 변장하여 어차를 타고 출전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틈을 이용하여 탈출하십시오.”
그리하여 태조 왕건은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탈출하고,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출전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견훤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군사를 몰아 사로잡아 놓고 보니 복장만 왕의 것이었을 뿐 왕건이 아니었다. 견훤은 속은 것에 대해 화가 났지만 한편 신숭겸의 행동을 가상하게 여겨 말했다.
“비록 적장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충성심이 장하구나,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사지로 뛰어들다니……, 그러나 너는 나를 속인 적의 장수이니 어찌하겠느냐,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견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숭겸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견훤이 말했다.
“비록 적장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시신이나마 돌아가게 해주어라!”
그리하여 신숭겸의 머리를 그가 타고 있던 말에 매달아 쫓으니 말은 태안사(泰安寺)로 달려가 절 앞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주지 스님이 놀라 나와 보니 신숭겸 장군의 두상인지라 양지바른 곳에 안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왕건은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금으로 그 머리를 만들어 붙인 후 시신과 함께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사찰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야말로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위주현명(위주현명)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氣過必禍(기과필화)
氣:기운 기, 過:지나칠 과, 必:반드시 필, 禍:재앙 화.
어의: 기가 지나치면 반드시 화를 입는다는 말로, 조광조의 어머니가 남곤의 어렸을 적 지나친 기세를 보고 그
의 성정을 예측한 데에서 유래했다. 너그럽고 온화한 성품을 장려하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象)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남곤(南袞.1471~1527)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부터 10여 년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총명과 슬기는 스승을 늘 흐뭇하게 하였다.
그들이 과거를 눈앞에 두고 학문에 열중하고 있던 어느 날,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으로 가는 길에는 예쁜 처녀 아이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조광조는 그 처녀들을 보는 순간 공연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마음은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시선은 줄곧 처녀들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앞으로 해야 할 공부가 많고, 어머니 말씀대로 나라의 동량이 되어야 할 텐데…….”
조광조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선 안 되지, 장차 어쩌려고…….’
조광조가 마음고생으로 뒤처져 걷는 동안 남곤은 저만치 앞서서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조광조는 걸음을 빨리 하여 남곤을 따라갔다.
‘역시 남곤은 나보다 낫구나. 난 아직도 수양이 부족한 거야.’
집으로 돌아온 조광조는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아들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가 말하였다.
“애야.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네 나이 때에 처녀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까 그건 잘못이 아니다. 네 또래의 사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란다.”
“어머니,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간 남곤은 처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꼿꼿이 걸어갔습니다.”
“음, 그랬어?”
“예, 어머니. 남곤은 확실히 저와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밤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사를 가야겠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이사라니요?”
“아무 말 말고 조용히 이삿짐을 싸도록 해라.”
조광조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결정에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에 따라 짐을 꾸려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 이렇게 야반도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얘야, 사람은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예쁜 처녀가 옆을 지나가면 너 같은 총각이 눈길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남곤은 자기 감정을 숨기고 목석처럼 행동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얼마나 차디찬 사람인지 알 수 있겠다. 사람은 따뜻함과 너그러움이 있어야 되는 것이란다. 엄격함과 꼿꼿함만 가지고는 너그럽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엄히 다스려야 할 때도 있지만, 너그러이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앞으로 남곤은 여러 사람을 피 흘리게 할 것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참으로 냉혹한 사람이야.”
조광조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훗날, 남곤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실제로 칼날처럼 냉엄한 정치를 했다. 그는 훈구파(勳舊派)의 선봉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집권자 조광조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한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만년에는 자기의 잘못을 자책하며 화를 입을까봐 자기의 저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其父其子(기부기자)
其:그 기, 父:아비 부, 子:아들 자.
어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로, 조선 초 무기 제조 기술자인 최무선과 그의 아들 해산 부자에게서 유래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닮았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은 무기의 중요성을 알고 조정에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케 주청하여 화약과 화포(火砲), 신포(信砲), 火㷁 등 각종 화기를 만들어 대마도의 왜선 500쳐 척을 격파했다. 그런데 왜군의 침입이 잦아들자 화통도감(火㷁都監)을 폐지하자는 여론이 비등했다.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것은 최무선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대포는 해전에서 그 위력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뭍에서 더 필요한 무기였다.
여론에 밀린 창왕(昌王)이 마침내 화통도감을 없애버리자 최무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내 나이 이제 육십, 화약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지만 그 기술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까 염려스럽구나.”
그는 화약 제조에 몰두하다가 늦게서야 아내를 맞는 바람에 아들이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되었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라도 화약 제조의 비밀을 전하리라 결심했다.
1392년 7월, 고려는 5백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이성계에 의해 조선 왕조로 바뀌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대포의 위력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최무선에게 무기 만드는 관청을 맡도록 했으나 그는 몸이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1395년 3월, 최무선은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아들 해산(海山. 1380~1443)에게 화약 제조법인<화약수련법(火藥修練法)>과 <화포법(火砲法)>의 책자를 주며 당부했다.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여 화약 만드는 법은 물론이고, 내가 발명한 대포보다도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내도록 하여라. 대포는 옮기기가 불편한 게 흠이니 그 점도 개선하도록 하여라.”
그는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1400년, 태조(太祖) 때부터의 충신 권근(權近)이 태종(太宗)에게 아뢰었다.
“장차 왜구의 침입이 염려됩니다. 고려 때에도 그들이 극성을 부렸으나 그때는 최무선의 대포가 있어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오니 그 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잇게 하여 대포와 같은 위력 있는 무기를 생산하도록 어명을 내리시옵소서.”
권근의 추천으로 해산은 20세의 나이로 무기를 다루는 군기감(軍器監)의 관리가 되었다. 해산은 아버지 이름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보람이 있어 1407년, 전에 비해 두배나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기술자만도 33명이나 길러 내었다.
해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409년에는 사방을 방패로 막은 바퀴 달린 수레식 대포, 즉 화차를 발명했다. 그로써 적진 속으로 들어가 공격할 수가 있어 파괴력이 훨씬 높아졌다.
화차 덕분에 오랑캐와 왜구를 물리치자 사람들은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먼(其父其子.기부기자).”
2년 뒤, 최해산은 완구(碗口)라는 새로운 대포를 발명했다. 밥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크기는 대, 중, 소의 세 종류였는데, 그 위력이 대단해서 집채나 성문이 단번에 날아갈 정도였다. 이런 최해산의 노력이 인정을 받아 태종은 그에게 정4품 군기감승(軍器監丞)의 직책을 내렸다.
실제 그의 공은 엄청났다. 그가 처음 관직에 몸을 담았을 때는 화약이 겨우 4근 4냥 밖에 없었으나 나중에는 1천5백 배가 넘는 6천9백 근으로 늘어났다. 대포도 2백 문이 채 안 되었으나 그가 군기감으로 일한 뒤에는 1만3천5백 문으로 증가되었다. 또 포병도 1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어마어마하게 큰 무기고도 건립되었다.
최해산이 죽은 뒤 1471년에는 그가 생시에 그렇게 바라던 화약제조공장인 ‘화약감조청’이 세워졌으며, 정이오(鄭以吾)라는 사람은 <화약고기(火藥古記)>라는 글을 지어 최무선의 공을 역사에 길이 남도록 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起死臥死(기사와사)
起:일어날 기, 死:죽을 사, 臥:누울 와.
어의: 서서 죽으나 누워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즉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한가지라는 듯으로 쓰인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7대 효종(孝宗) 때 무인 출신 우의정 이완(李浣. 1602~1674)은 본관이 경주이고, 호가 매죽헌(梅竹軒)이며, 시호는 정익공(貞翼公)이다.
사냥을 좋아하였던 그가 하루는 노루를 쫓다가 날이 저물어 깊은 산속을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산중에 대궐 같은 큰 집이 있어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갓 스물이 될락 말락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서 말했다.
“여기는 손님이 머물 곳이 못 되니 그냥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이 깊은 산중에 날은 저물고 인가도 없는데 어디로 가겠소? 아무데라도 좋으니 하룻밤 쉬어가게 해주시오.”
“잠자리를 드리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손님께서 여기에 머무시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들어오시지요.”
“좋습니다. 나가서 맹수의 밥이 되나 집 안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그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여인이 홀로 깊은 산중에 있게 된 사연을 물었다.
“이곳은 도둑의 소굴입니다. 저는 본래 양가의 딸이었으나 여기에 잡혀 와서 벌써 한 해를 넘겼습니다. 비록 비단으로 몸을 감고 구슬로 치장했으나 감옥살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은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을 만나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여인은 밥을 짓고, 도둑들이 사냥해온 고기로 반찬을 장만하여 술과 함께 상을 차려 왔다. 이완은 배부르게 먹고 거나하게 취하여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수작을 벌였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소, 또 정절을 지켜 몸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 주겠소?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 생사는 하늘에 맡겨 두고 귀한 인연이나 맺어 봅시다.”
이완은 여인을 꼬여 한바탕 뜨거운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때 뜰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재촉했다.
“큰일 났습니다. 도둑의 우두머리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완은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당신이나 나는 일어나도 죽고, 누워 있어도 죽을 거요. 그냥 이대로 있도록 합시다.”
이윽고 도둑의 우두머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웬 놈이 감히 이곳에 들어왔느냐?”
이완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천천히 말했다.
“노루를 쫓다가 길을 잃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이다.”
“그러면 행랑에나 머물 것이지 감히 남의 유부녀를 범하다니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법이오.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도둑은 굵은 새끼로 그를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여인으로 하여금 멧돼지를 삶고 술을 가져오게 했다. 도둑은 고기를 썰어 우물우물 씹으며 술 한 동이를 다 마셨다. 묶여 있던 이완이 말했다.
“여보시오. 나도 한잔합시다. 아무리 인심이 야박하기로서니 어찌 사내가 옆에 사람을 두고 혼자만 술을 마신단 말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나도 고기 맛이나 보고 죽읍시다.”
“참으로 큰 그릇이로다.”
도둑은 포박한 것을 풀어 주면서 말했다.
“이제 비로소 대장부를 만났습니다. 장차 나라의 큰 간성이 될 인재를 내 어찌 죽이겠습니까? 우리 같이 한잔합시다.”
도둑은 다시 술상을 차려오게 하여 서로 취하게 마셨다.
“저 여인은 이제까지는 나의 아내였으나 그대와 이미 정을 통했으니 지금부터는 그대가 가지시오.”
도둑은 이완에게 형제의 의를 맺자고 하며 말했다.
“내가 뒷날 어려움을 당하여 내 목숨이 그대의 손에 달리게 될 때가 있을 것이오. 그때 오늘의 정의를 잊지 않는다면 고맙겠소.”
이완은 그의 말대로 뒷날 과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 군수, 부사 등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리고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金自點)을 도와 정방산성(正方山城) 싸움에서 크게 승리했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과 북벌을 계획하자 신무기 제조, 성곽 개수 및 신축 등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해냈다. 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런 별세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그 후 수어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가 포도대장 시절 어느 날, 큰 도둑을 잡아 처형하려다가 자세히 보니 바로 옛날 형제의 의를 맺었던 그 도둑이었다.
이완은 효종에게 도둑과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말씀 드리고, 용서케 하여 인재로 등용했다.
도둑은 무과에 급제하여 성을 지키는 부장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碁敗寄馬(기패기마)
碁:바둑 기, 敗:질 패, 寄:맡길 기, 馬:말 마.
어의: 바둑에 져서 말을 맡긴다는 말로, 어던 목적을 위하여 싸움이나 경쟁에서 일부러 져주는 경우를 이른다.
작전상 후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문헌: 조선오백년기담(朝鮮五百年奇譚)
덕원군(德源君. 본명:李曙.1449~1498)은 세조(世祖)의 아들로 성종(成宗) 때 종부서 도제조의 직을 맡아 종실의 규찰과 선왕 제향소를 관리했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였으며 잡기 중에 바둑 두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실력도 뛰어나서 주위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한 군졸(軍卒)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소인은 향군(鄕軍)이온데 이번에 번을 들기 위해 한양에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대군마마께서 바둑을 잘 두신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한 수 가르쳐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알겠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한번 두어 보자꾸나!”
덕원군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애기가(愛碁家)는 원래 서로 적수만 되면 상대 신분의 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군졸이 입을 열었다.
“바둑은 그냥 두면 재미가 없고 내기 바둑이 재미있는 줄 아옵니다. 만약 제가 이기면 쌀 한 가마니를 주시고, 소인이 지면 제가 몰고 온 말을 드리면 어떠할지요?”
“좋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로구나. 어서 바둑알을 놓거라.”
그러나 처음에는 팽팽하던 바둑이 결과는 덕원군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다.
“제가 졌습니다. 약속한 대로 제 말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업네. 자네 덕분에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으니 말은 그냥 가져 가도록 하게나.”
“아닙니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군졸은 말을 두고 돌아가서 번을 서고, 석 달 뒤에 다시 덕원군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말을 건 내기 바둑을 두자고 제의하였다. 덕원군은 반가워하며 마주 앉았다.
“그동안 바둑 실력은 좀 늘었느냐?”
“예.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덕원군은 초반부터 그의 실력에 당황했다.
‘이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걸.’
덕원군은 끝내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방적인 패배에 덕원군은 약속대로 그의 말을 되돌려주면서 말했다.
“너의 솜씨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어찌해서 나에게 졌느냐?”
“예. 죄송하오나 그래야만 했던 사정이 있었습니다. 한양에 말을 타고 오긴 했지만 먹이고 재울 방법이 없어서 대군마마께 잠시 맡겨 둘 요량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번이 끝나서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황공합니다.”
덕원군은 그 군졸의 남다른 기지에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덕원군은 신숙주와 더불어 국사를 돌보기도 했으며, 성종 2년에는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禪雲寺)를 중건하도록 하여 행호(幸浩)선사에게 발원문을 직접 초하기도 했다.
덕원군은 성현의 학문을 전수하여 유종(儒宗)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騎虎之勢(기호지세)
騎:말탈 기, 虎:범 호, 之:어조사 지, 勢:형세 세.
어의; 호랑이를 탄 기세라는 뜻이다. 즉 이왕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는 데까지 갈 수밖에 없음을 이르는 말. 사
람이 범의 등에 탔다면 내릴 수는 없고 가는 데까지 가 본다는 것이 기호지세이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은 개성 부근 예성강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왕륭(王隆)이었으며 지방 사찬(沙湌) 호족으로 덕망이 높았다. 896년 궁예의 세력이 확장 일로에 있자 왕륭은 송악의 궁예 예하로 들어가 금성태수가 되었다.
그 후 왕건이 성장하여 20세에 이르자 광주와 충주, 그리고 당성 등을 공략하여 성공하자 아찬(阿湌)이 되었다.
왕건은 예성강에서 훈련된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錦城. 나주.羅州)을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평정했다.
왕건이 어느 날 정주(貞州)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 그러자 여인은 물을 길은 다음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급하게 마시지 말라는 배려였다. 그녀의 지혜가 마음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의 집에 들어가 여인의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은 다음 그녀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가 바로 토호(土豪) 천궁(天弓)의 딸 유씨(柳氏)부인이었다.
당시 왕건은 궁예(弓裔) 밑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였다. 왕건은 전장에서 쉴 새 없이 싸우다가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소식을 수소문하니 절에 들어가 수절하고 있다고 했다. 왕건은 먼저 가정을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불러 올렸다. 그리고 개국을 이룬 후에는 그녀를 왕후로 맞으니 신혜왕후(神惠王后)가 되었다.
그 무렵, 궁예는 난폭한 행동으로 실정(失政)을 거듭하여 군왕으로서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래서 부하 장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왕건은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였다. 이를 눈치 챈 유씨 부인은 남편에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기호지세이니 장수들의 말대로 추대를 수락하라고 격려했다. 이로써 왕건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
수나라 황제 양견(楊堅)의 부인 독고(獨孤)씨나 왕건의 부인 유씨는 영리하여 사세 판단과 내조를 잘한 왕후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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