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컬을 내려 봉창을 블라인드 쳐버리고 하루를 오롯이 징역살이 했어요. 교도소(정신 병동)의 하루라는 것이 단조롭기 그지 없다는 걸 아는 사람만 알 것입니다. 잠(2번)-글쓰기-유튜브-푸시업-샤워 따위를 했고 간간이 멍을 때렸는데 좀도 쑤시고 배도 고파 이뿔 킥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택시를 끌고 고모리 단골 식당으로 피난을 갔어요. 옛날 찐빵(5.000)을 사들고 가 나눠 먹었고 육회 비빔밥을 한 그릇 뚝딱 먹어치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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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가 졸지에 징역(입원)을 살게 돼서 많이 답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자는 어디에 있던지 그것을 내 집처럼 만만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물론 임기응변(불법 포함)은 실력입니다. 징역을 잘 살려면 내가 이 곳에서도 발전한다는(발전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금지된 것은 모조리 하는 겁니다. 하루 3번(의무실, 변접, 운동) 출방을 했어요. 아마도 '노르웨이의 숲'이나 '마지막 잎새'를 의정부 송산에서 읽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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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블로그도 감시받는 시대라 기타 등등은 생략합니다. 참고로 담배 한 가치에 2만 원인데 피우다 걸리면 징벌방을 가야 합니다. 담배나 술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이 역시 아는 사람만 알 것입니다. '현존재'개념을 공부하다가 '차연'이란 단어에 꽂혀 정리하고 갑니다. 우리 시대 차-화-연이란 배우가 있었어요. 차연이라는 말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용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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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연은 우리의 문화나 용어가 뚜렷한 공통성을 갖는 것 같으나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을 넓혀 차이를 갖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우리 사회에 도입될 때 그것은 계산하는 도구였어요. 주판이나 종이를 사용한 계산 도구와 구별하기 위해 그것을 전자계산기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이름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라졌지요. 물론 컴퓨터 자체의 용도도 무한히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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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차연 differance’은 ‘차이 difference’의 어미 ‘-ence’를 ‘-ance’로 바꾸어 사용한, 기존의 인식론을 뒤흔드는 말들을 가리키는 독특한 신조어입니다. 이 말에는 ‘다르다 diff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혹은 지연시키다 defer’라는 의미를 모두 가진 ‘differer’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연은 '변별성'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연기나 지연'이라는 뜻도 적극적으로 포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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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이 두 의미를 동시에 모두 작동시키며, 어떤 순간에도 한쪽만의 의미를 강조하지 않아요. 결과적으로 우리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고정된 무엇이라는 사실을 거부해요. 세계란 언어의 사용을 통해 얼마든지 달리 해석되는 여지를 가진 텍스트라는 데리다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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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데리다는 왜 이런 주장으로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가? 차연이란 도대체 왜 문제가 되는가? 실질적인 예를 들어 보면 사회에는 온갖 갈등들이 부단히 일어납니다. 그런데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절대시 하는 데서 온다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차이라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이해에서 빚어지는 시간과 공간 때문에 생기는 가변적인 기제라는 것을 안다면, 이런 갈등은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데리다의 '차연'을 논하는 오늘의 연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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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연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의 작동원리는 사전의 단어 정의로 설명할 수 있어요. 즉, 한 단어는 다른 단어에 의해 차이에 따라 정의되고, 그러한 정의는 의미의 가능성에 한계를 가지게 한합니다. 그리고 의미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단어는 그와 다른 단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데, 그 다른 단어 역시 또 그와 다른 단어로 이루어진 정의를 요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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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순환은 끝없이 반복됩니다. 개 dog의 사전적 정의는 ‘갯과에 딸린 가축의 하나’. 여기서 개를 알기 위해서는 갯과와 가축을 또 찾아야 합니다. 갯과와 가축의 인식은 개를 알기 위한 전제 조건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들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 체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이것을 데리다는 ‘시간화’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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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화란 지연, 연기, 우회를 의미해요. ‘개’라는 지시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실제 개가 아닌 개에 대한 내적 관념을 가리킨다는 걸 기억하시라. 진짜 개는 실제로 나타나지 않아요. 없는 개를 있게 하는 것은 기호 작용입니다. 이때 기호는 시간상으로 지연됩니다. 인식은 공간화도 요청하지요. 공간화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면서 나타납니다. 분필을 분필로 인식하려면 우리는 칠판으로부터 분필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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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분필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분필을 떼어놓아 ‘공간’을 만들어야 해요. 이런 의미에서 공간화는 분필과 다른 모든 것들 사이에 시간적 연기를 개입시키는 것과 결국은 똑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하나에 대한 두 개의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시간의 공간화는 공간의 시간화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지만 많은 차이와 전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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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얽혀 있어서 그것을 붙잡는 한 개인은 매우 특수한 한 사례를 붙잡은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사례로 연결된 수많은 사태와 관계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자신이 지칭하는 단어나 개념이 '차연'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차연'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 늘 확장되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 기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상 타인과 필연적으로 연루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차연은 '다르다'와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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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금요일 오후 2시경 이사짐 싸고 운반하는 아저씨들 감독하는 거 가능하신지요? 3일 후입니다(에스더). " "Okay that is my pleasure(나)"
2024.7.30.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