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잠 3:3) 인자(헤세드 = 은혜)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하나님께서 지금(예수님의 구속사역 완성 이후) 인류를 내려다보시면 두 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즉 거듭난 성도요, 교회입니다. 두 번째는 불순종의 아들들, 즉 불신자들입니다. 이 불신자들이 또 둘로 나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성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거듭난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며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엡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 새 사람(one new man)”이란, 새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이 하나의 종류란 말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에는 이방인, 유대인이 없고 그냥 한 종류란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지식 위에, 오늘은 예수님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아마 이 게시판을 찾아오시는 분들은 어느 정도 지식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즉 위의 잠언 말씀처럼 마음판에 새겼는지 오늘은 그것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지금까지 제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사역”이란 영, 혼, 몸의 정체성 중에 영에 관한 정체성을 말씀에 입각해 알려주고, 영과 격차가 있는 혼의 모습을 영에 맞게 바꿔 가도록 독려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은 느껴지지 않고 혼은 느껴지기 때문에 대부분 혼적 자기를 진짜 자기로 인식합니다. 영혼몸을 배워도 말입니다. 영은 느껴지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느껴지지 않는 영에 대한 말씀과 느껴지는 혼에 대한 현실이 상충할 때 대부분 혼을 선택합니다. 이런 경우 '영'을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조차 믿음에 대해 너무나 잘못된 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에는 복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도 믿음을 어떻게 발휘하는지 구체적으로 배워본 적이 거의 없었더랬으니까요.
어떤 사람의 혼의 상태가 영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은 영과 다르다'라고 지적할 때,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바꿉니다. 하지만 육을 따라 행하는 사람, 그러니까 말씀과 다른 혼의 모습으로 행하는 사람은 그 혼을 자기로 보고 있기 때문에 바로 실족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해결책은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믿음을 발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내 혼은 쓴뿌리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씀이 내 영에 사랑이 가득하다고 하기 때문에 내 영에 대한 말씀을 믿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혼적 자아(=육신)와 매우 깊숙하게 밀착돼 있으면 있을수록, 이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단순하고 간단하지만, 사람에 따라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선포하는 내 정체성 안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과 다른 내 혼적 모습들은 버려야 할 부분이지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질 대상이 아니며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혼적 모습(=육신)을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지는 것을, 구약에선 ‘목이 곧은 백성이다’라고 하고 요즘 표현으로 ‘똥고집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묵상합니까? 묵상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 이거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하면 될까, 저렇게 하면 될까?" 라며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부정적인 묵상입니다.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묵상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묵상을 하긴 하는데, 그 묵상의 내용을 성경적 자아로 바꾸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제가 큰 돌파를 이룰 때마다, 하루에 일정 시간씩 적극적인 묵상을 하곤 했습니다. 묵상하는 시간에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주 적극적인 묵상의 시간이 어느 정도 채워져서 임계치에 도달해야만, 자아상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 묵상 시간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니까, 나만 바꿀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사상과 이념이 삐뚤어진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때도 없는 것 같군요. 사상과 이념이 삐뚤어진 사람들의 얘길 들어보면 적극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가꾼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누가 세뇌하는 대로 그렇게 따라가다가 결국 괴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신사적이어서, "이것이 내 길이다. 선택은 너에게 맡긴다. 선택을 하고 묵상을 통해 너의 마음에 새기는 것도 너의 자유다."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묵상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선택해서 가장 중요한 내 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새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 3:3) 인자(헤세드 = 은혜)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당신이 보는 당신의 자아상은 어떻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과 비슷합니까, 아니면 아주 다릅니까? 이것은 모든 것의 중심축이 되기에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잠 23:7a, 킹제임스 흠정역) 그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함같이 그도 그러하니라.
(요삼 1:2 , 킹제임스 흠정역 )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혼이 형통함같이 네가 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내가 바라노라.
이 묵상에 도움이 될 몇 가지 구체적 질문을 나열하자면...
내가 보는 나는 성공하는(형통한) 사람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부요한 사람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심신이 건강한 사람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하나님께 축복받은 사람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호의를 받고 있습니까?
내가 보는 나는 주는 자입니까, 아니면 받는 자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아니면 그냥 인간입니까? ('나도 인간인데....')
내가 보는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까?
사회적인 영역에 적용하자면...
내가 보는 나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나 자신을 혁신하여 발전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기득권을 뒤집으려 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국민입니까, 아니면 서민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근로자입니까, 아니면 노동자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승리자입니까, 아니면 피해자입니까?
내가 보는 나는 금수저입니까, 아니면 흙수저입니까?
...
이 자아상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