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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천국 (마태복음 11:12-15)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해석이 다양합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셨지만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묘하신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침노란 말은 무력으로 쳐들어가 강탈한다는 뜻인데 천국이 이처럼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으니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뜻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왜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말씀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아담의 후손으로 육의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자손만이 그 자격자가 됩니다. 이 두 나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2) 천국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순탄하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철통같은 장애물들이 가로 막혀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장벽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끊어 버리기 어려운 세상 줄이라고 하는 끄나풀이 얽매어 있습니다. 부서져야 할 교만이 우뚝 서 있습니다. 사탄과 그 졸병들이 아무도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일은 참으로 침노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를 소유자만이 들어간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사탄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막을 수 없는 한가지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까지는 이 길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의 최후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힌 죄악의 담을 말합니다. 그것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면서 성소 한 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히10:19-20). 이 길만이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무기란 진리입니다. 이 무장을 갖추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세상에 속한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는 유일한 하나님의 병기인 것입니다(요8:31-32).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진리가 되십니다.
3. 천국은 오직 십자가로만이 침노할 수 있다.
십자가는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누구든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만 통하면 누구든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강도범도 십자가를 통해 천국에 침노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가 한 나라의 제왕이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의 통로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인간이 죽었다는 표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죽어야 자신의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롬6:6). 십자가는 사망 권세를 이긴 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그의 부활에 연합되어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 아들의 십자가만이 가능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엡2:16).
4. 천국은 새사람만이 침노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감겨져 있으므로 그 곳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는 길조차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천국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바라볼 수 있도록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비밀한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한 곳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심령의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결론적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튼튼히 잡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침노한 사람들임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1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곧 마음의 안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참 안식은 먼저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안식은 그 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들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인류가 메어야 할 무거운 짐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인류는 두 가지 멍에를 메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는 죄의 멍에요 다른 하나는 율법의 멍에입니다.
(1) 모든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죄가 우리들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이 죄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멍에가 심히 무겁다는 것은 그 죄 값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2) 율법은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율법을 멍에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의 의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한 것입니다(롬3:20).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이나 양심의 멍에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데 있어 육신적으로 저야 하는 무거운 짐도 있습니다. 이 짐은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내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1:12절에서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이 모든 짐으로 인하여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2. 내 멍에를 메라
이 같은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져야 할 다른 또 하나의 멍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멍에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 멍에라고 하신 그리스도인들의 멍에입니다.
(1)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메야 할 멍에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신 그런 마음입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멍에는 겸손의 멍에입니다. 주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부요하신 분으로 가난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심판주이시면서 친히 인류의 죄 값으로 스스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남을 대접하시고 남을 자기보다 높이시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신 분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멍에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지기에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대신 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를 메야 합니다. 이 멍에는 성령의 힘으로 지기 때문에 쉬운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멍에를 메는 일은 주님을 배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죄에 대한 회개에서 나옵니다. 겸손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결론 : 주님은 우리가 저야 할 무거운 짐을 저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지기에 가벼울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멍에를 반드시 메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는 사람들은 율법과 좌의 멍에를 다시 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생활로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고 소망으로 자기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대의 비유 (마태복음 11:16-19)
회개할 줄 모르고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이 세대를 향하여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를 역설하면서 이 세대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요한의 애곡에 가슴을 치는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은 생명과 천국과 소망을 주는 복음의 피리를 불었지만 이 피리 소리에 맞장구쳐 춤추는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1. 영적으로 감각이 없는 세대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의 여사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가슴을 치며 애곡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용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죄에서 돌이키라고 회개를 외치게 하십니다. 선지자 요나의 애곡하는 소리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이에 동조하여 가슴을 치며 애곡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애곡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며 요한을 가리켜 귀신이 들린 사람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노아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노아가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며 회개하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생활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도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물 속에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애곡을 했지만 그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2. 애곡을 해도 가슴을 안치는 세대
애곡이란 말은 장사집에서 슬피 울부짖는 소리를 말합니다. 누구든 슬픈 일을 당한 장사집에서 애곡이 나오게 되고 이 소리를 듣는 무리들은 주인의 슬픔에 동참하여 슬퍼하며 가슴을 칩니다. 이 비유는 죄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위시하여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애곡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 세례 요한을 죽였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애곡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7). 우리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 중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죄악 중에서 살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죄악에서 떠나면 죄악이 우리를 패망케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고 권면하십니다(겔18:30-32).
(3)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은 회개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권면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렘5:25).
그러면 왜 사람들은 애곡하는 선지자의 경종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에 인색한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죄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심령의 완악함으로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3. 피리를 불어도 춤을 안추는 세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말 할 수 없는 축복을 거역하는 세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천국을 주며 평안을 줍니다. 이 복된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이 소리에 맞추어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이 피리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나팔에 따라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 : 그러면 왜 이런 세대에 이른 것입니까? 악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곧 마음의 안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참 안식은 먼저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안식은 그 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들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인류가 메어야 할 무거운 짐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인류는 두 가지 멍에를 메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는 죄의 멍에요 다른 하나는 율법의 멍에입니다.
(1) 모든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죄가 우리들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이 죄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멍에가 심히 무겁다는 것은 그 죄 값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2) 율법은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율법을 멍에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의 의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한 것입니다(롬3:20).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이나 양심의 멍에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데 있어 육신적으로 저야 하는 무거운 짐도 있습니다. 이 짐은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내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1:12절에서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이 모든 짐으로 인하여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2. 내 멍에를 메라
이 같은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져야 할 다른 또 하나의 멍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멍에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 멍에라고 하신 그리스도인들의 멍에입니다.
(1)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메야 할 멍에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신 그런 마음입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멍에는 겸손의 멍에입니다. 주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부요하신 분으로 가난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심판주이시면서 친히 인류의 죄 값으로 스스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남을 대접하시고 남을 자기보다 높이시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신 분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멍에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지기에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대신 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를 메야 합니다. 이 멍에는 성령의 힘으로 지기 때문에 쉬운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멍에를 메는 일은 주님을 배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죄에 대한 회개에서 나옵니다. 겸손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결론 : 주님은 우리가 저야 할 무거운 짐을 저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지기에 가벼울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멍에를 반드시 메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는 사람들은 율법과 좌의 멍에를 다시 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생활로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고 소망으로 자기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생 초대장 (마태복음 11:28-30)
성경에는 오라는 말씀이 600번나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인생 초대는 오직 한곳에만 나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오늘 본문 말씀은 오직 한 사람만이 자신 있게 인생들에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이 인생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1.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이 말씀은 온 인류를 안중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 길을 쉼 없이 걸어갑니다. 주님은 이 같은 인생을 불쌍히 보시고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라는 헬라어는 ‘코피온테스’(κοπιώντες)로 이 말의 뜻은 현재 계속 피곤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이런 수고는 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3:17).
그러나 그 수고의 결과도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 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전2:22-23).
(2)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멍에와 죄의 멍에를 가리킨 말입니다. 무거운 짐 진자란 말은 ‘페풀티스메노이’(πεφορτισμἐνοι)로 이 말의 뜻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계속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지고 살아가는 율법이나 양심이나 죄는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가리켜 지기 어려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눅11:46). 그러면 왜 율법이 인생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키는 일에도 온전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누 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2:10). 죄 역시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죄는 어느 국한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어떤 특정한 범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육신으로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곧 죄악인 것입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이런 절망적인 인생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시며 그들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자기에게 오는 일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6:37).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그의 초청에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 초청의 시간도 제한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입니다. 이 같은 부르심은 에덴에서 이미 들려 주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향하여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9:1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벧전1:15).
예수님의 초청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 대한 안식에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주님은 그 다음 말씀으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 영혼의 만족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안겨 주십니다.
다음에 우리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사죄의 은혜에서 오는 평안으로 우리 마음속에 모든 불안과 걱정을 제거하고 오히려 즐거움과 안정을 줍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완성되지만 현세적으로는 우리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모든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의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기 때문에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죄 (마태복음 11:20-24)
주님은 많은 권능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기울이신 고을이 회개치 않고 주님을 배척했을 때 그 고을을 향하여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주님의 구원의 사역을 보고도 회개치 아니하고 결실이 없을 때 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등이 이런 고을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두로와 시돈이나 소돔보다 심판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화가 더욱 중하다는 것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1. 세 고을의 역사적 배경
주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다는 고을, 고라신과 벳새다는 두로와 시돈과 비교되고 가버나움은 소돔과 비교되어 경종 하셨습니다.
(1) 고라신은 요단강 서쪽 갈릴리 북편에 있는 성읍으로 이곳에서 주님은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2)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변에 있는 성읍으로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유명합니다. 주님이 산에서 기도하신 후 바다를 건너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소경을 안찰 하시어 고치신 곳도 이곳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 신앙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에게 행하신 이런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두로는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 성은 주전331경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곳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고 시가지는 불타 버렸습니다. 그 후 로마가 점령하고 재건했지만 터키에 예속되어 다시 쇠잔해진 곳입니다. 시돈은 두로와 함께 동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로 이곳 왕은 이세벨의 친정 아버지인 엣바알이었습니다. 주전351년에 바사에 반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성읍 사람들이 스스로 도시를 불살라 버림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4) 가버나움은 비교적 성경에 그 지명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고을은 갈릴리 서북 해안에 있는 큰 성읍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제2고향으로 회당과 세관이 있고 주님은 이 지방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을 부르셨습니다.
자기 종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주님을 찾아 나온 백부장이 살던 곳이며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곳도 이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끝까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그 후에 회교도들에 의해 진멸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 화가 있다고 선고받은 이유
주님께서 이처럼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향하여 화가 있다고 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입니다.
(1)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거나 바라보고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심은 그 같은 일을 통해서 우리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완악하여 그것을 받지 않을 때는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았을 때는 그 죄가 경합니다. 경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의 거역은 주님을 거역하는 죄가 따르는 것입니다.
3. 권능을 보고도 왜 회개치 않았나?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 경우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찔리는 경우입니다. 오순절에 회개한 유대인의 무리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했을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두려움으로 회개하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를 다 경험했으면서도 회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이들은 회개치 못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말씀을 듣거나 권능을 보아도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민14:22-23).
결론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거나 체험했을 때 우리는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12:1-8)
복음서에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주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신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그 법대로 집행한다면 사형에 해당되는 일임으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제자들이 매우 시장한지라 그 밀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1. 최초의 안식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안식일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주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골1:15-17).
안식일은 이처럼 원래가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로 축복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안식일을 율법에 정하시고 이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하신 안식일의 참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설명이 히4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제 7일에 관한 성경의 설명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내 안식’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며 순종하는 자들이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
구약에는 모세의 율법에 처음으로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율법에서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의 규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안식일은 절대적인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따라 지킨 안식일은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원래 율법이란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이 사람을 주장하여 정죄하였고 심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기는 일은 곧 저주를 자초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3. 신약시대와 안식일
그러면 신약 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해답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골2: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월삭이나 절기처럼 안식일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월삭이나 절기가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졌다면 안식일 역시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것을 법대로 지키지 못할 때 율법이 규정한 온갖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율법적인 절기도 함께 지켜야 하며 율법에 규정된 모든 법도 온전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실체가 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림자인 안식일은 다른 율법과 함께 폐해졌습니다.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는 날은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을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안식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부활한 몸으로 안식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이 생명이 영생입니다. 영생이야말로 안식의 완성인 것입니다.
안식은 쉼을 얻는 것인데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안식일의 대용품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법에 얽매어 저주나 받을 안식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미 안식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주의 날은 율법으로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감사와 사랑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성경적인 근거를 대시면서 다윗 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한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폐해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례대로 주일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날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의 참 의의 (마태복음 12:9-13)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로 회당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회당까지 찾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옳은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분명한 해답을 듣고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간계에서 그리한 것입니다.
랍비들의 안식일 해석에 따르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은 하나의 의료 행위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질문에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 양의 비유를 통해서 기묘하게 말의 올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1. 무엇이 더 귀하냐?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이 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사람들에게 즐거운 날이 되지 못하고 어기면 형벌 받는 날이요 지키려면 힘겨운 날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안식일의 종의 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안식일의 멍에를 벗어버리게 하시고 저주나 정죄를 받음이 없이 하나님을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막2:27-28).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일에 지친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목적에서 벗어나 안식일 때문에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람들이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오히려 사람으로 더 큰 정죄의 멍에를 메게 만들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안식일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2.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바리새인들의 눈은 일제히 주님께로 행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그들의 질문에 주님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이 가지신 특유의 지혜로 그들의 올무의 함정을 기묘하게 피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처럼 물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아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가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고 하셨습니다(출23:3-5).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안식일과 상관없이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분명히 율법을 어긴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을뿐더러 합당한 일이란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3. 안식일의 의의
안식일은 그 규례를 어기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식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 의식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이처럼 복음을 전하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선의 표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도 안식일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누구라도 안식일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이 속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일용할 양식을 얻는 일에 사용하고 육신의 정욕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고 세상 재미를 만족시키는 일에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율법과 같은 어떤 의문에 쓴 법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메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강제적이요 정죄적인 율법은 이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예수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날이 이런 날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복된 날로 지켜야 합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한 이유 (마태복음 12:14-21)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명은 소리 없이 조용히 진행되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 것을 항상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이 예언에서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나의 택한 종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종으로 나와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택하신 종입니다. 종이란 말은 예수님의 비하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택한 종이란 사람의 몸으로 자기를 낮추어 세상에 오신 그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택한 종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가리켜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최초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나타내실 때 내가 기뻐하는 자란 말을 쓰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역시 그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생애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강건함을 주시고 범사에 축복해 주시려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시기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심판 받을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이방에 알리시기 위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
19절부터는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가 다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모함을 들으셨지만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누구에게나 사랑과 진실이 가득차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혹은 비유로 혹은 예화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시는 일에 성의를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헤롯왕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셨으며 빌라도 앞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2) ‘들레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들렌다는 말은 큰소리로 떠드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언제나 많은 군중들을 피하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주님의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은 단 둘이나 아니면 몇 명 안돼는 조용한 곳에서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3)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란 죄인들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빛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가라지까지도 심판의 날까지 남겨두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결론 : 주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은 최후의 심판 날 까지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이런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며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한 이유 (마태복음 12:14-21)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명은 소리 없이 조용히 진행되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 것을 항상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이 예언에서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나의 택한 종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종으로 나와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택하신 종입니다. 종이란 말은 예수님의 비하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택한 종이란 사람의 몸으로 자기를 낮추어 세상에 오신 그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택한 종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가리켜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최초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나타내실 때 내가 기뻐하는 자란 말을 쓰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역시 그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생애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강건함을 주시고 범사에 축복해 주시려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시기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심판 받을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이방에 알리시기 위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
19절부터는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가 다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모함을 들으셨지만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누구에게나 사랑과 진실이 가득차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혹은 비유로 혹은 예화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시는 일에 성의를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헤롯왕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셨으며 빌라도 앞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2) ‘들레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들렌다는 말은 큰소리로 떠드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언제나 많은 군중들을 피하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주님의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은 단 둘이나 아니면 몇 명 안돼는 조용한 곳에서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3)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란 죄인들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빛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가라지까지도 심판의 날까지 남겨두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결론 : 주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은 최후의 심판 날 까지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이런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며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탄의 분쟁 (마태복음 12:22-30)
사탄은 궤휼과 간교에 뛰어난 존재입니다. 이런 사탄의 간교와 궤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교회의 분쟁을 조장하는 일에 가장 유효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사탄의 역사가 자신들의 나라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주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심으로 그들의 나라에도 질서와 체계가 있고 엄격한 규율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는 모함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주님께 데려 왔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을 하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송사할 조건을 찾아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은 고의적으로 주님을 비방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힙 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일임을 증거하기 위해 주님은 몇 가지 예를 들어 그들의 경우와 결부시킨 것입니다.
(1) 주님은 그들의 주장의 부당성에 대하여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에 사로잡혀 그 귀신의 힘으로 다른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분쟁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분쟁은 교회를 혼란케 합니다.
분쟁은 어떤 조직이던 파멸시킵니다. 사탄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계율이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그 졸개들을 쫓아낸다면 귀신의 나라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하셨습니다. 너희 아들들이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귀신을 쫓아낸 일은 예수님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도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막9:38).
(3) 이처럼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역사는 바로 성령의 능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종의 모습으로 계셨지만 삼위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이 하나님으로써의 권능을 행하시려면 육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행하시도록 그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한 본체를 이루고 있는 한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의 능력이나 권능은 곧 예수님의 능력이나 권능이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는 주님께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한 이유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귀신의 왕과 결부시켜 모함한 것은 시기심과 고의적인 모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능력과 권능으로 증거되는 주님의 메시야적 증거를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당황한 그들은 고의적으로 모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이 정말로 귀신의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인 줄로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를 메시야로 믿으려는 군중들에게 믿지 못하게 하려고 심술을 부린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두 가지 원인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시기심입니다. 하나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 자기를 스스로 메시야로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메시야적 예우를 받는 일에 시기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을 때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서 내 가정에서 그리고 내 교회에서 분쟁의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분쟁은 황폐의 원인이요 멸망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조차 분쟁이 없는데 우리 주변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 (마태복음 12:38-45)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많은 표적을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표적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은 복음은 표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란 말은 ‘세메이온’(σημεἰού)으로 표시, 증거 또는 기적으로 이것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참으로 놀라운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그 곳에 있었던 군중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놀랐습니다(요6:14).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명하고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요구한 표적이란 어떤 종류의 표적이었을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메시야된 증거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우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까지 자신을 메시야의 증거로 삼기 위해 나타내신 표적은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거절하셨습니다.
복음은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큰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기적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나왔지만 믿음이 기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믿음보다 기적을 바라고 그것을 따르는 신앙을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앙에 깊이 빠지면 신앙의 정상궤도를 이탈하여 거짓 예언, 거짓 은사, 거짓된 증거 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표적으로 메시야의 증거로 삼으려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대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이 보여 주실 표적
주님은 그가 보여주실 한가지 표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표적이란 곧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요나의 표적에 대하여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요 메시야이신 그의 참 표적이 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표적은 메시야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술객들 조차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는 술수를 썼습니다. 또한 종말에 등장할 거짓 선지자는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으로 말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표방할 수 없는 메시야된 진실한 표적이 주님께 있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표적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죽으시므로 밤낮 사흘간을 땅속에 묻혀 있으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야된 표적을 바로 이 표적에서 찾지 않으면 영원히 생명의 길을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죄악의 도성에 살고 있었던 니느웨 사람들이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우며 이방의 남방 여왕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지혜로웠다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경종을 삼으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표적을 보여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들 역시 요구에게 표적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바리새인들의 심판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바리새인들이 잘 알고 있는 남방 여왕의 경우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왕은 단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그 멀리 남방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왕보다 더 큰 존재이심은 그는 메시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를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심판 날에 남방 여왕이 증거가 되어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악한 세대를 비유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있을 곳이 없으므로 다시 옛집을 돌아왔을 때의 경우를 들어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벌써 그런 귀신의 거처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의 신앙을 견고히 가지고 움직임이 없어야 합니다.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 관계 (마태복음 12:46-50)
어느 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 있다는 전갈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느라 오랜 기간 집에 들리실 기회가 없으셨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모친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 들려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듯 싶습니다. 모친은 아마 이런 풍설을 듣고 주님을 찾아 왔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 왔다는 말을 듣고 앞에 모여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교훈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 관계입니다.
1. 인간 사회의 가족 제도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의 생활이나 책임이 새롭게 부여됩니다.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거대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한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낳아 주신 분을 부모라 부릅니다. 그리고 한 부모 아래 같은 혈육으로 태어난 사람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인간의 가족 관계는 영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같은 혈육의 한 가족이라도 신앙이 같지 아니하면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만 해도 그의 형제들이라도 믿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그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요7:5).
2. 천국의 가족 제도
천국은 혈육과는 상관없이 영적 결합체인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예수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 사회에서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한 형제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영적인 형제자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들이 됐다면 한 가족을 하나로 결속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형제의 사랑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13:34-35).
사도 요한은 요일3:14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의 가족 관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계급이나 남녀의 구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 어떤 사회적 명예나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한 형제로서의 사랑과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요일3:16-18).
3.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와 자매와 모친
주님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신 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1) 아버지의 뜻은 첫째로 그의 아들을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죄를 품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3)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순종이 없는 자녀는 자녀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4)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1:4-5).
결론 :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가장이신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형제의 가족 관계를 지속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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