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모르
수확물
추수 때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져야 할 의무.
단어는 종종 그 단어가 지칭하는 개념의 기원을 감추곤 합니다. 어원과 의미는 서로 엇갈리며, 이로 인해 혼란을 야기합니다. 이번 주 토라에 나오는 할라카(유대법) 관련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바로 동사 “to glean(이삭 줍기)”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된 노동을 통해 얻는 미미한 수확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농업 용어인 이 단어는 수확철에 밭에서 낫질 후 남은 것을 주워 모으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그 의미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종류의 사물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수집하는 모든 활동으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관없이 확장됩니다.
“glean”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중세 영어나 심지어 켈트어일 수도 있지만, 그 개념 자체는 토라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며, 서구 문명의 구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개념 중 하나입니다.
성경적 맥락 없이는 이 단어에 내재된 사회적 가치는 밝혀지지 않은 채 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밭에 이삭을 남겨두는 관행은 유대교와 그 후 기독교에서 신앙이 자선의 씨앗이 되는 정도를 보여주는 극적인 예입니다.
이번 주 토라 포션에서는 지난주 토라에서 처음 언급된 율법의 요약된 버전을 읽게 됩니다. “너희가 너희 땅의 곡식을 거둘 때, 밭 가장자리까지 다 거두지 말며, 너희 수확물의 이삭을 주워 모으지 말지니, 이를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하여 남겨 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레위기 23:22).
포도원 수확에 관한 유사한 명령은 생략되었습니다. “너희는 포도원을 훑어 다 따지 말며, 포도원에서 떨어진 열매도 주워 모으지 말라”(19:10).
고난을 마음에 새기며
두 구절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바로 우리가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우리보다 처지가 어려운 이들의 고난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 이 수확을 거두었다 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우리만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작물을 마지막 줄기나 싹 하나까지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을 금하십니다. 먼저 납부해야 할 세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쉬나에 따르면, 이는 레케트(leqet), 시케하(shikheha), 페아(peah)의 세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레케트(לֶקֶט)는 수확 과정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시케하(שִׁכְחָה)는 곡식을 실내로 옮길 때 밭에 무심코 남겨둔 것, 즉 밀 단이나 건초 다발을 의미합니다. 레케트와 시케하는 모두 돌이킬 수 없이 공공의 소유가 됩니다. 페아(פֵּאָה)의 경우, 밭의 일부(최소 60분의 1)를 전혀 수확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는 것을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랍비들은 성경의 명령을 낳은 윤리적 충동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낸 것입니다.
그 명령의 다른 두 가지 특징도 주목할 만하다. 첫째, 이 명령은 대체로 강제할 수 없습니다. 준수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관료들이 밭을 샅샅이 뒤지며 감독할 수 있는 조항은 없습니다. 기대되는 바의 상당 부분은 사실 완전히 주관적이기에 측정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 규정은 공동체 내 각 토지 소유자가 이를 내면화할 때만 달성 가능한 상호 책임의 이상을 제시하며, 이것이 바로 본문 끝부분에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라는 하나님을 향한 웅장한 언급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자선 활동은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영감을 주십니다.
둘째, 우리의 이상주의가 혜택을 주는 대상에는 가난한 토착민보다 훨씬 더 취약한 이방인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사회 비전에는 보편주의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자선은 엄밀히 말해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이는 룻기의 핵심 원칙입니다.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다로 돌아온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수확철이 되자 두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밭으로 나갑니다. 그녀는 우연히 나오미의 혈육인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을 받아들여 곧바로 레비라트 결혼(levirate marriage: 과부 재혼)의 권리를 얻습니다. 그들의 고귀한 행실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운명을 지닌 다윗이라는 증손자로 보답받습니다. 요컨대, 소박한 자선 행위에서 비롯될 수 있는 선한 결과는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6세기 전반 이탈리아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랍비, 인본주의자, 의사였던 오바디아 스포르노는 자신의 토라 주석에서 이번 토라 포션 내 이 자선 규정의 문맥적 배경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구절이 이스라엘 농부들에게 성전이나 성막에 첫 열매, 특히 수확을 앞둔 새 밀로 만든 빵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구절 바로 뒤에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땅의 풍요에 대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인 이 행위는 농산물을 인간의 소비를 위해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스포르노는 바로 이 감사의 순간에, 순례자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수고의 열매를 거둘 때 소유하지 못한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맥락은 그 의미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스포르노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심오한 격언을 인용합니다. “부의 소금은 자선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케투봇 66a).”
즉, 우리의 부를 보존하려면 친절의 행위를 통해 부를 줄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토라는 자만감에 빠져 있는 농부에게, 하나님께서 수확하는 자들만큼이나 이삭을 줍는 자들을 돌보신다고 경고합니다. 부유한 자들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신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기반한 자선의 구원 능력을 낭만적으로 미화해서는 안됩니다. 이삭 줍는 이들의 삶은 언제나 위태로웠습니다. 대다수 지주들의 양심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의무만, 그것도 겨우 이행하도록 강요했을 뿐입니다.
장-프랑수아 밀레는 1857년작인 매우 감동적인 유화 <이삭 줍는 사람들>에서 이삭 줍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암울한 현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전경에는 세 명의 검은 피부에 다부진 체격의 농부 여인들이 땅에 남은 드문드문한 그루터기에서 몇 줄기라도 건져내려고 허리를 굽히고 있습니다. 멀리서 솟아오른 건초 더미들은 수확량이 얼마나 적은지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수거할 만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밀레가 농민들에게 보인 공감은 그들에게 고통과 절망 너머로 끌어올리는 묵직한 위엄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럼에도 성경만으로는 이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제 체제의 불공정을 바로잡을 수 없었습니다. 급속히 세속화되는 시대에, 누가 시민 사회의 도덕적 중재자로서 개입해야 할지 깊은 질문을 남깁니다.
By Rabbi Ismar Schor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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