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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2
#성육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고 계셨던, 즉,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영광의 인성을 이 땅의 사람 수준으로 무한히 낮추신 것이라 생각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요셉은 물론이고 마리아와도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나 이단인가?
#부교역자
2년전에 내가 속한 교회는, 불의한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당시 모든 부교역자들을 내쫓은 적이 있었다. 이는 몰렉에게 자기 자녀를 제물로 불살라 바친 것과도 같은 죄이다.부교역자를 핍박하는 것은,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을 학대한 소작농들의 악행과도 같다. 그리스도를 한치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는 기업인이라고 할 때, 교역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귀한 인적 자원들이다. 어떤 교회가 수시로 교역자를 갈아치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귀한 인적자원을 낭비하고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면에 교역자를 어지간해서는 교체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적 자원을 아껴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교역자들을 수시로 갈아치우는 교회는 그리스도께 들러붙어 그분의 피 같은 인적 자원을 마음껏 빨아먹고도 부족하다며 다오다오 하는 거머리와 같다.
#20220922
#신앙고백 #사도신경 #교회
ἁγίαν καθολικὴν ἐκκλησίαν,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公敎會와
거룩한 公會와
거룩한 공교회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모든 성도들의 모임이며,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해 왔고 존재하며 존재할 모든 참된 교회들의 총합이며, 마지막 심판 이후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으로 완성된다. 거룩한 공교회는 요한계시록에서 해를 두르고 달을 딛고 서있는 고귀한 여인으로 비유되는데 이는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지극한 영광과 존귀를 부여하셨음을 의미한다. 해를 옷입은 여인이 남자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대로 거룩한 공교회의 역사 가운데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킨다. 출산한 남자아이가 하늘로 들린 후에 여인이 용의 핍박을 피해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신 후에 이 땅의 교회는 부귀영화는 고사하고 세상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돌보시는 섭리로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공교회는 성전 바깥 뜰에 세워진 거룩한 성으로도 비유되는데 이방인들이 마흔두달 동안 성전 바깥 뜰을 짓밟는다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믿지 않는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거룩한 공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두 증인으로도 비유되는데 두 증인이 땅의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용이 세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체가 멸시와 조롱을 당하고 삼일 반 후에 부활승천하게 된다는 것은 이 땅에 세워진 거룩한 공교회의 일원들이 복음으로써 세상을 거스르고 땅의 세력에 의해 멸절과 멸시를 당하나 주님의 강림하심으로 부활하여 승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강림하심으로 부활승천한 성도들은 불타는 유리바닷가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이루어 천년동안 땅에 부어지는 일곱대접 재앙을 유리바다를 통해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주신 거문고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땅의 교회들 각자는 어느 하나가 거룩한 공교회의 전체가 될 수 없고 한 부분을 이룰 수 있을뿐이다. 따라서 이 땅의 어느 특정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를 자처하고 나선다거나 거룩한 공교회를 이룬다는 빌미로 세속적으로 교세를 키워나가려 한다면 해를 옷입은 여자로서의 거룩한 공교회가 아니라 짐승을 탄 큰 음녀 바벨론으로서의 거짓 교회의 일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룩한 공교회에 속한 이 땅의 교회들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신 성경을 유일한 신앙규범으로 삼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공교회에 속한 교회라 하더라도 이 땅에서는 거룩함보다 세속적인 것에 물들게 마련이므로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교회의 불완전한 요소만을 침소봉대하거나 참소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선한 것도 보이지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조차도 당신께서 소유하신 교회라고 인정하시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신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아예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혼자서 신앙생활 하겠다는 무교회 가나안주의는 정죄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이 땅의 성도들도 여전히 죄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범죄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야 마땅할 것이다.
거룩한 공교회를 참되게 추구하는 이 땅의 교회들은 여전히 죄에 몸부림치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신앙을 위한 제도 또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신앙형식의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신앙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비롯한 자발적인 헌금과 자원하는 봉사를 드림으로써 교회의 외형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하는 것이다. 교회 또한 당연히 복음 사역에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함과 더불어 성도들의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가급적 건물이나 시설 등의 외형적인 것도 적절히 구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라는 원론과 이상만을 내세우며 건물이나 시설 등을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영지주의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육체를 가지신 사람이시고 우리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영혼과 육체 또는 영과 혼과 육의 연합체로 지어진 존재이듯이, 육체를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이 땅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육체에 해당하는 건물과 시설 등이 필요한 법이다.
#20210922
#신명기 #Deuteronomy 32:8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당시 여호와께서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만 택하셨을지라도 그 영향력이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시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민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각자 자기들 소견에 옳은대로 일월성신이나 가상의 신들을 만들어 섬겼으나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 또한 여호와의 돌보심 덕분이었던 것이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동산에서 쫓겨났어도 여호와께서는 온전한 제사를 드린 아벨을 쳐죽인 가인과 그의 후예들에게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인 은혜의 섭리를 베푸신 것이었다. 홍수로 노아 시대 인류들을 멸하시고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교만하여 그들의 언어를 흩으셔서 뿔뿔이 퍼지게 하신 것도 여호와이시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이삭의 맏아들 에서에게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두 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모압과 암몬에게도 한 민족씩 허락하셔서 그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신 것도 여호와이시다. 아무리 앗수르가 흉포한 전투민족이어도 그들에게는 범죄한 이스라엘 열 지파만 차지할 수 있었을 뿐 히스기야가 다스리던 유다 왕국은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앗수르가 계속 욕심을 부려 선을 넘으려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한 명의 천사를 보내셔서 하룻밤에 그들의 군사 18만 5천을 갈갈이 찢어버리신 것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잘나서 여기저기 많은 나라들을 침략해서 차지한 줄 알고 자만심에 젖었으나 늘그막에 하늘의 징계를 받아 무려 7년 동안 들짐승처럼 처참해진 후에야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을 샅샅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자기가 다스리는 모든 지역에 조서를 내려 오로지 여호와 한 분 만을 섬길것을 권면하였다.
이방 여인인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가 예수님의 족보에 편입된 것이나, 에돔 족속인 욥이 당대 최고의 의인으로 평가받은 것 또한 여호와께서 모든 족속들을 다스리신다는 증거가 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 모든 족속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각 시대와 나라와 족속에 퍼져 살고 있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그들 주변의 사회와 문화 등을 지키시고 돌보심으로 섭리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섭리하심을 알지 못하는 군주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영토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온갖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나름 큰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그런 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들의 끝모를 욕심 때문에 자기가 감당하지도 못할 영토를 차지하느라 자멸해버렸다. 한 때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지나치게 식민정책을 추구하였으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로 인해 유발 된 전쟁의 참화와 그들이 원래 차지하고 있었던 본토 뿐이었다. 오늘날에는 각국이 그런 영토전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국제기구를 만들고 각자의 국권을 존중하는 생각이 자리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자국의 영향력을 어떻게든 넓혀나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중에서도 몇몇 나라는 과거 역사적인 정복자들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정해놓으신 경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온갖 날조와 억지로 다른 나라의 영토나 문화유산을 탐내기도 하고 위협을 주기도 하지만 성경의 원리에 따른다고 한다면 그런 선넘는 탐욕을 부리는 국가는 결국 화를 당하게 마련이다.
여호와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나누신 것은 비단 인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빈부귀천과 직분과 지위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주께서 각 사람마다 나누시고 적절하게 안배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불변하신 작정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성공할 사람은 성공하고 못사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살기 때문에 아무 노력도 필요없게 된다는 운명론이나 변명을 합리화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작정하심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 각자의 의지를 은밀하게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귀한 자들의 교만함은 물론이거니와 빈천한 자들의 자포자기적인 신세한탄 또한 마땅히 정죄받아야 한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서 아무리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다고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폄훼하고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를 하려는 태도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제정하신 경계는 사람이 정당한 방식을 따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 얻게 되는 것 이상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신앙이 탁월하여도 남편보다 앞서려 해서는 안되고 일반 신자가 아무리 성경지식이 탁월하여도 목사를 깔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목사는 교회를 넘어선 정치활동이나 경제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교회가 못마땅 하더라도 교회를 저버리고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려 해서는 안된다.
#20200922
#레위기 #Leviticus 21:8-9
8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여호와께서는 모든 족속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직접 여호와께 나아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중에서 다시 레위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레위인들 중에서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거룩하게 지정하셔서 오직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엄격하게 제한하셨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심이 무지하고 완악한 백성들에 의해 망령되게 취급되는 것을 막으시려고 백성들에게 자기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을 마치 여호와를 대하듯이 거룩하게 여기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한편으로 제사장들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것은 제사장을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죄악으로 취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령의 부차적 이유로는 레위인들의 실생활을 보존하시려는데 있다. 다른 지파들은 전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어도 레위인들은 여호와의 제사 직무에 봉사하기 위해 아무런 기업을 얻지는 못하고 단지 제물의 고기와 각 지파들에게서 얼마의 땅을 할당 받아 살아갈 뿐이었다. 그래서 육적으로만 보면 레위인은 아무란 생산적인 일도 안하고 단지 성막에서 편하게 백성들이 가져오는 제물이나 잡아 제사를 드리며 고기를 취하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이렇게 단지 육적인 눈으로만 레위인들을 홀대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엄중히 경고하신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러한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여러 죄를 저질렀다. 같은 레위 지파의 고라 자손과 다른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 등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땅이 갈라져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모든 소유가 삼키우는 심판을 받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를 비롯한 광야 2세대들이 죽은 후에는 이 규례를 신속하게 무시하였다. 그래서 사사 시대에는 그들중에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없어서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는데, 어떤 지파는 자기들에게 할당 된 레위인 제사장들을 돌보지 않아 제사장으로 그 지파를 떠나게 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레위인을 공적인 제사장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우상숭배를 위한 사적인 제사장으로 삼기도 했으며, 어떤 지파는 레위인을 지파를 대표하는 제사장으로 삼기는 했어도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약탈의 방식으로 하였다. 심지어 베냐민 지파는 자기 지경에 유숙하는 레위인을 소돔인들마냥 강간하려 하였고 결국 그 레위인의 첩을 윤간해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사울 왕은 사무엘을 무시하고 자기가 번제를 드린데다, 단지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아히멜렉을 비롯한 여호와의 제사장 85명을 살해하였다. 어떤 왕은 제사장을 무시하고 향을 피우려다가 나병을 얻기도 하였다. 이 모든 죄악은 바로 레위인 제사장을 거룩하게 성별하신 여호와께 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호와의 이 명령은 단지 레위인 이외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은 아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에게는 동시에 자기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제사 직무를 항상 심령에 각인하여 다른 백성들보다도 더 여호와 앞에 거룩하고 성결해야 할 것과, 일용할 양식에 대해 육적인 걱정을 하지 말 것과, 이 땅의 부귀영화에 탐심을 품지 말고 오로지 여호와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자족할 것을 요구하신다. 레위인 제사장들이 이를 어겨 여호와께 범죄하는 것은 다른 백성들의 죄보다 더 크고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악을 행하는 자기의 두 아들을 더 사랑하는 죄를 지었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께 드릴 제물의 고기를 가로채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간음함으로써 여호와의 제사를 능멸하였다가 삼부자가 한 날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솔로몬을 따르지 않고 그 대적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가 제사장 직분을 박탈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에 제사장 사독은 충실하고 거룩하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함으로써 후대에 선지자들에 의해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기도 하였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비록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의 연장선은 물론 아니지만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른 교인들보다 더 특별하게 세우신 직분자들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처럼 그리스도께로부터 더 많은 신령한 권세와 책임이 있는 자들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모든 정당한 교역자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신령한 권세를 부여 받은 직분자들로 알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담임목사 외에는 교역자로서의 존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역자들에게 사례비를 지급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마치 일반 회사에 고용된 직원처럼 여긴다. 그래서 장로들은 교역자들을 가족처럼, 자녀처럼, 형제자매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사역에 조금 부족함이 보이고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는 교역자에 대해서는 그러한 자녀를 대하듯이 위로하고 격려하며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을 지원하기보다는 능력없는 직원을 평가하듯이 부정적으로 대하고 언제든지 사임시킬 궁리를 한다. 장로들이 먼저 교역자들을 품고 존중하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니 일반 교인들도 그저 형식적인 예의만 차릴 뿐 그 이상의 애정과 존중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속한 교회에서는 2년 전에 불의한 담임목사를 감싸고 지키느라 당시 교역자들을 전부 내쫓는 만행을 저지른 바가 있다. 이처럼 교회가 모종의 부당한 사유로 교역자를 사임시키는 것은 마치 몰렉에게 자기 자녀를 제물로 불살라 바치는 것과 방불한 죄악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교역자를 교묘하게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은 포도원 주인이 소출을 받기 위해 보낸 종들을 때리고 학대한 소작농들의 죄와 같다. 교역자를 수시로 함부로 교체하는 것은 교역자들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인적 자원을 낭비하고 남용하는 죄이며 주인의 소유를 부당하게 허비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죄와 같다. 그리스도의 교역자들을 허비하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께 들러붙어 그분의 피 같은 인적 자원을 마음껏 빨아먹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오 다오 하는 거머리와도 같고, 3년 동안 물과 거름을 충분히 주어도 아무런 과실을 맺지 않아 땅만 차지하고 있는 찍혀버릴 나무와도 같다.
무릇 교회는 교역자를 뽑을 때는 그저 세속 기업이나 회사가 직원을 고용하듯이 해서는 세상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도리어 그렇게 뽑으면 세속 기업의 고용 수준보다 더 저열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으려면 교역자들을 입양하듯이 들여야 한다. 즉, 사례비를 주고 사역을 시키는 그런 기업 같은 무미건조한 관계가 아니라, 우리 교회의 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회는 단지 기업의 상사나 임원 같은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심령으로 교역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행여나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맡은 사역에서 부족함을 보이는 교역자가 있다면 장로들은 그런 교역자를 부정적으로 보고 사임시킬 기회만 엿보려고 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다른 형제들보다 좀 부족한 자녀에게 더 특별한 애정과 지원을 쏟는 부모와 같이 그런 교역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양자처럼 들인 교역자는 아주 부득이한 사유가 아닌 한 절대로 교회의 사정으로 인해 사임하게 해서는 안되며, 교역자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교회에서 책임질 필요가 있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간 교육전도사에게는 학비를 지원해주고, 강도사에게는 목사 안수를 받게 해주며, 부목사들이 개척한다면 자녀를 독립시키는 부모의 심정으로 개척에 필요한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9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여기서 제사장의 아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딸의 행음에 대해서만 정죄하는 것에 어떤 이들은 불편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사장의 아들은 아비를 따라 차후에 제사장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제사장이 된 후에 행음하게 된다면 여호와 앞에서 바로 범죄한 것이므로 여호와께서 직접 심판하시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렸다가 그자리에서 불타 죽은 것이나, 엘리 제사장의 사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바로 제사장으로서 악을 행하다가 여호와의 심판으로 죽은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여느 부모라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음행과 같은 죄를 저질러도 어떻게 해서든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의 경우에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신령하고 거룩한 직분을 수행하기 때문에 혈육의 정 마저도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어야 했다. 만약에 제사장이 자기 자녀의 패역한 악행을 발견했다면, 그는 아무리 자녀에 대한 애끊는 심정이 타오르더라도 자기 스스로를 여호와 앞에 거룩하게 성별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자녀라도 그에 합당한 정죄와 심판을 받도록 먼저 내어주어야 했다.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의 신령하고 거룩한 제사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도 또한 아들들과 함께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감독이나 장로 또는 집사 등의 교회 직분자의 조건의 하나로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언급했는데 이는 교회 직분자는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도덕성에 흠결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직분자의 자녀가 도덕성에 흠결을 일으키는 경우라도 구약 시대처럼 그 자녀를 사형시킬 수는 없다. 때문에 자녀가 문제를 일으킨 경우에는 해당 직분자는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으로 교회 직분을 내려놓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장로나 집사를 세울 때 사도 바울이 제시한 기준대로가 아니라 재력 등의 세속 기준으로 선정해 온지가 원죄처럼 오래 되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도덕성 흠결까지 점검하는 경우는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