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17년(1417년),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근의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치면서 두 고을의 앞 글자를 따 '무장현'이라 이름 붙이고 읍성을 쌓았다. 기록에 따르면 병마사 김저래의 지휘 아래, 전라도 각지의 승려와 백성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단 4개월(2월~5월) 만에 성을 완성했다고 한다.
1894년 무장현에서 일어난 농민군들이 고을을 장악할 때 바로 이 남문과 진무루를 거쳐 성안으로 진격했던 동학농민군의 진격로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현재는 옹성과 함께 옛 위용을 멋지게 되찾은 상태이다. 무장읍성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압도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첫댓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평지 읍성으로 조선 초기 읍성의 계획적인 축조 방식과 관아 배치를 원형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역사적으로도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지였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근의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치면서 두 고을의 앞 글자를 따 '무장현'이라 이름 붙이고 읍성을 쌓았다.
기록에 따르면 병마사 김저래의 지휘 아래, 전라도 각지의 승려와 백성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단 4개월(2월~5월) 만에 성을 완성했다고 한다.
해발 60m의 야산과 평지를 사각형 형태로 에워싼 성벽으로, 둘레는 약 1.2km이다. 성벽 바깥에 물길을 내어 적의 접근을 막는 해자(垓字)와 성문을 보호하는 반원형의 옹성 등 탄탄한 방어 구조를 갖추었다.
성벽과 함께 동헌(취백당), 객사(송사관) 등의 관아 건물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동시에 건립되어 조선 초기의 행정·군사 중심지 구조를 명확히 보여준다. 조선 초기 관아 배치 연구의 표준이 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포고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1차 봉기를 시작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농민군이 무장읍성에 무혈 입성한 후 객사의 현판을 내리고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2018년 성내 군기고(무기창고) 터 발굴 조사 중, 조선의 독창적인 작렬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무려 11점이나 무더기로 발견되어 학계와 대중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당시 무장읍성이 지닌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위상을 잘 증명해 준다.
무장읍성의 남문(南門)과 그 위에 세워진 문루인 진무루(鎭茂樓)는 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중심 건축물이자, 무장읍성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남운의 문루인 진무루(鎭茂樓)는 '무장현을 진압하여 안정시키고 무성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군사적인 방어 기지로서 외적을 막아내고 고을을 평안하게 다스리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이름이다.
진무루와 남문은 조선 초기 읍성 관문 방어 체계의 정석을 보여준다.
아랫부분은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성벽과 홍예문(무지개 모양의 문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당당한 2층짜리 목조 누각(진무루)이 올라가 있다.
성문 바깥쪽에는 성문을 둥글게 감싸 안듯 쌓은 '반원형 옹성(甕城)'이 둘러싸고 있다. 적이 성문을 직접 타격하지 못하게 막고, 항아리(옹) 속에 갇힌 쥐를 잡듯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을 성벽 위에서 사방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핵심 방어 시설이다.
1894년 무장현에서 일어난 농민군들이 고을을 장악할 때 바로 이 남문과 진무루를 거쳐 성안으로 진격했던 동학농민군의 진격로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현재는 옹성과 함께 옛 위용을 멋지게 되찾은 상태이다. 무장읍성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압도적인 풍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