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상반기 월간 모던포엠 신인문학상
지붕 밑의 세계 / 홍혜향
중년이었던 아버지 기억으로 발을 디뎌본다
아버지를 부르면 모든 바깥이 뒤돌아보았다
입구엔 미술 시간에 만든 번쩍번쩍한 문패가 우리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일곱 식구를 덮어주는 바깥이었던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 절기에 맞춰 자랐다
꽃이 핀 담배밭은 매웠고 들어가면 숨이 막혔다
늘 밖에 계셔서일까
아버지 손등엔 웬 혹이 그리 많았을까
서둘러 별의 문패가 된 아버지
사나흘 충혈된 눈을 비비고 바깥을 돌아봤을 때
밀고 나갈 힘이 없었다
아버지 걸음을 이어받는 일은 세계가 바뀌는 일이어서
걸어 나갈 준비가 안 된 바깥은 어두워서 넘어질 거 같았다
아버지라는 말에는 뼈가 있어 아버지를 찾을 때마다 지붕을 떠올린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지나
절기가 몇 바퀴 바뀌어도 여전히 바깥인 아버지
팔월의 연蓮을 새라고 불렀다 / 홍혜향
연꽃이 33도로 피어 팔월의 온도를 견디고 있다
연꽃은 이마가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햇빛에서 보는 거래. 우리는 햇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이 온도를 견디지 못한다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모여 사는 이곳은 연못이 하늘이다
뜨거운 온도를 견디느라 진화한 꽃
연꽃은 조류의 태생인지도 모른다. 퇴화한 날개가 꽃잎으로 돋아난.
초록은 새들의 둥지다. 이제 막 머리를 내미는 꽃이 보인다
긴 목을 하늘로 빼고 있는 새는 큰 날개를 달고 있다
몸통은 희고 부리 끝이 조금 붉은 새였다. 날개를 활짝 폈으나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는 연못에 떠 있다
긴 발톱을 뿌리에 박고 무수히 나는 날갯짓을 했을까
떨어진 날개를 만져보니 상처가 많다
한 무리 새들이 홰를 치는데 공중이 고요하다
월말 부부 / 홍혜향
달걀 한 판에서 한 알을 꺼내면
하루가 지워집니다
오늘 아침은 쌍란입니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날엔
프라이팬에 두 개의 달이 뜹니다
그와 한 달 만에 만나는 날이지요
빈 곳이 늘어날수록 만나는 날이 가까워집니다
잘못 집어든 달걀이 발치에 떨어져 깨지는 날도 있습니다
약속은 껍질이 얇아 잘 깨집니다
머릿속에 끈적끈적 엉겨 붙어 하던 일이 뒤죽박죽입니다
바깥인데 마네킹처럼 창고에 갇힙니다
엘리베이터는 가만히 멈춰 있고
서 있는 곳이 사막인지 초원인지 모릅니다
시월의 바람은 금방 헤어질 연인처럼 싸늘합니다
반숙의 아침이 늘어납니다
만남은 설익은 것에서 시작하니까요
비어 있는 곳에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
믿음이 채워집니다
내일은 완숙의 만월이 뜰 테니까요
* 홍혜향 시인
전남 화순 출생.
전국 마로니에 백일장, 동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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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사랑해요 내 행성들!
당신은 내 안쪽 궤도를 도는 행성. 하루 종일 당신을 품고 있다. 근지점이면서 원지점인 당신은 불면. 어지러워도 밀쳐내지 못한다.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보여도 감사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꺼내 보이는 것은 힘들다. 끙끙 앓으면서도 오래도록 이 별에 머물기를 바란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뜻밖의 선물처럼 당선 소식이 도착했다. 믿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하다. 믿음 속에는 격려의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안다. 오랫동안 버팀목이 되어 준 선생님과, 함께 문학의 길 걸어가는 시 창작반 문우들께 감사의 말씀 전한다.
시가 내 안쪽 궤도를 도는 행성이라면 남편과 두 아들은 내 바깥쪽을 지키는 행성.
퇴근 후 부은 발등을 주무른다. 아무리 편한 신발을 신어도 오래 서 있는 발은 잘 붓는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기에 나는 또 이 발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