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아 일로 와봐라~"
형이 신혼방으로 나를 부른다. 뭔 일일까...?
궁금함보단 먼저 신이 났다.
형이 꾸민 신혼방엔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났다.
가구들도 새롭고 요기조기 예쁜 액세서리로 치장된
방은 내 호기심을 늘 자극했다.
뭔가 은밀한 느낌까지...
부르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방에 들뜬 마음으로 들어갔다.
"큰히야 와?"
생글거리며 바라본 형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익이 니..."
약간 말을 주저하는 것으로 보아 하기 어려운 말인가 보다.
"어. 뭐?"
"인자부터... 내한테... 히야라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 불러라."
"형님...??"
머릿속에서 쾅~하는 울림이 일어났다.
"그라고 말도 인자 존대로 쓰라."
형은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한 듯, 시작한 말을 거침없이 냉정하게 다하고 끝을 맺었다.
"말...까지...높이라꼬.........예..."
쾅~ 하던 울림이 지진으로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갑자기 서툴게 말 끝에 예자가 따라붙었다.
"원래 형제간이라도 형이 결혼하면 그래 부르는기다.
니도 인자 그래 불러라. 알았제?"
내 서운한 마음을 모르는지 형은 마지막 못을 박았고...
갑자기 바로 앞에 앉은 형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내 속에 늘 있던 형이 밖으로 뛰쳐나가 저 멀리 서있는 느낌.
"노력...해보께.....요"
끝에 존대어를 붙일수록 자꾸만 형이 더 멀어지는 것 같아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형의 신혼방 문고리를 잡는데...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구슬 따먹기의 갖가지 요령을 신나게 가르쳐주던 큰히야.
바둑돌로 하는 삼국지알까기를 창안해서 작은형과 나에게 전수해 주던 큰히야.
<태양을 향해 쏴라> 영화를 영화시간보다 더 길게 이야기해 주던 큰히야.
두레상 앞에서 나이롱고데 모자를 쓰고 배호 노래 눈 지그시 감고 멋지게 부르던 큰히야.
이제부터는 예전의 내 자상하고 든든한 그 큰히야와는 이별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봄이었다.
큰형이 큰형수와 선 보던 날.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형과 함께 있었다.
그때까지 결혼을 약속한 이성이 없었던 형에게
그해 대학을 졸업한 이종사촌누나가 앨범을 펼쳐두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하나 고르라고 했었다.
형은 한 사람을 골랐고 한 번인가 둘만의 데이트를 한 다음 사촌누나가 큰형수 될 분을 이모집으로 불렀는데, 큰형수 될 분을 미리 볼 좋은 기회. 내가 형제들 대표로 따라붙었다.
이모집에는 처녀였던 큰형수가 와 있었고...
내 눈에는 얼굴은 예쁜 듯한데... 턱이 너무 뾰족해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턱이 둥근 우리 집 누나들만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보름달형 미인들만 보다가 계란형 미인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큰 형이 물었다.
"익아. 어떻더노?"
"히야는 이뿌더나...?"
조심스레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응. 내보기엔 이뿐데... 니는 어떻더노?"
"내 보기에도 이쁘던데... 근데..."
"응... 근데 뭐?"
형도 내 느낌이 궁금한 듯 재차 물었다.
"... 턱이 너무 빼쪽하더라. 잘못하마 찔릴 것 같더라."
갑자기 형이 하하하 한참을 웃었다.
나는 내 말에 무게를 싣느라... 마지막 말도 했다.
"만화에 나오는 마귀할멈 턱 같더라..."
형은 이제 아주 껄껄대며 웃었다. 길 위에서...
.
.
형이 그만 턱 뾰족한 형수의 꾐에 빠진 거야...
그게 아니면 갑자기 나에게 이럴 수가 없어...
형의 방을 나와 어머니에게로 가서는 살살 형 방에서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혹 엄마라도 내 편이 돼 줄까 하는 기대로...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형 말처럼 형님이라고 불러야 된다."
절벽에서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기댈 데도 없구나...
볼멘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라마 큰 히야가 엄마를 어머님이라고 부르마 나도 형님이라고 부르께! 그래야 공평하잖아~"
결국 그날 이후 오래도록 형님을 형님으로 부르지 못했다.
차츰 큰형과의 대화도 줄어들었고,
큰형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내 속에 깊이 자리한 큰 히야를 떠나보내는 고통을 오래도록 힘들게 겪었다.
이제는 예사로운 그 존칭과 존대가 그때는 왜 그리 서운하고 섭섭하게 느껴지던지...
히야와 형님의 거리는 얼마쯤 일까?
첫댓글 내 아들들은 나에게 아직도 반말을 씁니다
나도 존대말 새삼스럽게 듣는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아들들이 존대말을 붙여주는거는 더 거리감이 생길거 같다는게
나와 내 아들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나도 어릴때에 외삼춘이 이제는 존대를 부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주춤하게 됩디다
이상 내 경험도 말씀드려 봤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ㅎㄹ 저도 딸은 저에게 반말,
아들은 어릴 때부터 하던 대로
존대를 합니다.
저도 그냥 그들이 하는대로 놔두는
편이지요. ㅎ
딸애,큰아들
존대를 하는데
막내는 자기편한대로
반말을 하는데
막내라서 사랑스럽고
예쁘네요.
새벽이랑 보람찬 한 해
기원드립니다.
한 번 딸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동생은 존대하는 데 넌 왜 안 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아빠가 아저씨가 되잖아."
그 마음 알 것 같았습니다. ㅎ
올해도 안전운전 하겠습니다.
옛날 이야기는 잘 읽지 않는데 오늘은 큰 마음 먹고 읽어보았습니다.
동화 같았지만 막냇 동생 마음이 잘 드러난 수작이라고 생각했지요.
잘 읽고 갑니다.
형제 여럿인 집의 막내는 이렇게 컸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세대를 꼰대나 틀딱이라고 부르는 젊은 친구들에게 우리도 어릴 때는 어린 마음으로 살았다고 말하고 싶었던가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갑자기 존댓말을 쓰면 거리가. 멀어지고 서먹서먹. 오래전 경험한 서운한 이야기를
지금 눈앞에서 하듯이 잘도 썼군요
옛사진을 보듯 마음에 남은 일은
꺼내면 그때 그 마음으로 곧바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ㅎ
그랬었지요.
저도 열 여섯살 차이나는 큰오빠가
결혼했을때 존대쓰기가 어찌나
어색하던지요.
히야와 형님과의 거리는
생각보다 먼 것 같습니다.
다른 지방에서도 쓰는지 모르겠는데
경상도에서는 미혼의 형이나 언니한테
히야라고 불렀지요.
세 분의 오빠들이 결혼하고 존대쓰던
그 과정을 마음자리 님이 생생하게
묘사를 해주셨네요.
추억의 글 감사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여동생이면 그런 마음이 더했겠네요.
늘 든든하고 가깝던 오빠가 갑자기
서먹서먹하게 느껴졌을 테니...
삭제된 댓글 입니다.
호칭은 형님으로 바꾸었지만,
지금도 속마음엔 그냥 히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ㅎ
어느 날 갑자기 히야와 나,
거리가 생겼음에
얼떨떨한 막내의 마음을
참 표현을 잘 하셨네요.
가족 관계가
결혼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말 못할 얄궂음이
잠시 스쳐갑니다.
올캐를 보니, 어머니는 집안 일을 새 식구와
의논 함에, 속으로 놀랐습니다.
당연한 일인데, 머리로써의 앎과
마음으로 오는 느낌이 서로 엇박자가 되었습니다.^^
마음자리님의 글을 보니,
40여년 전의 그때가 떠 오르네요.
그땐 위계나 가족의 질서, 권위 같은
것들을 그렇게 지켜나가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하라니 반감이 생기고 저항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는 일들이 지금 다 글이 되니 저에겐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히야가 형님 이름이신줄 ...ㅎㅎ
위에 이베리아 님 설명으로 알았어요.
저도 마음자리님과 똑 같이 결혼한 큰 오빠가
부르더니 이제부터 존대어 쓰라 해서 엄청
배신감 들었어요 .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예법이지요 .
그러다 어떻게 써졌는지 지금은 존대어로
말 합니다 .
저와 같은 황당함이 들었겠습니다.
호칭, 사실 불러달라는 대로 불러주면
되는데, 그게 그땐 서운하고 원망이
생기더라구요.
소중한 추억이
가득한 맘자리님의
꼬맹이 시절을 봅니다.
얼굴이 V라인이었으면
형수님이 미인이셨을듯요.
그런데 동화책에서는
마귀할멈을 그렇게 묘사했었으니 ㅋㅋ
시대가 변하며 계란형이 미인으로 바뀌더군요. ㅎㅎ
큰형과의 이야기가 참 따스한 추억으로 느껴집니다
서울에선 어릴때 형들을 언니라고 불렀었지요
큰형은 제가 형이라고 부르기도전에 총각의 몸으로 돌아가셨고
두살위의 작은형만 한분 계십니다
지역마다 다르니...
서울서 전학온 친구가 형을 언니라고
불러 헷갈려허던 기억이 납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야라고도 하고 시야 라고도
했지요
어쩜 이렇게 기억력이 좋으신지
마음자리님 글을 읽을 때면
꼭 옛날 그때 그시절로 돌아간 듯 합니다
17살 위 오빠가 결혼하고 나서
엄마가 우리들한테 오빠께 꼭 존댓말 하라고
당부하셨거든요
아부지같이 안아주고 업어주던
오빠가 갑자기 멀어진 느낌이었어요
맏이들은 잘 모를 것 같은데, 동생들 입장에서는 대부분 유사한 느낌들을 공유할 수 있네요.
호칭 하나 바꾸는데... 그렇게나 거리감이 크게 생길 줄은 정말 몰랐어요. ㅎㅎ
사투리 '히야' 참 정겹습니다. 저도 세살 터울 언니에게 늘 이름을 부르다가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제 스스로 언니라 고쳐 불렀습니다
착코님은 철이 조금 일찍 들었던가 봅니다.
스스로 알아서 고쳐부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ㅎㅎ
엄마도 내편이 아니라고 느꼈을때 어린소년의 많이 당황스럽고 외로운 마음이 하도 리얼하게 느껴져 댓글을 바로 쓰지못했네요
아름다운 영상에서 빠져나오기싫어
화면정지상태로 있듯,
멈추어 있다가
댓글 씁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막내들이 철 없고 뒤끝이 있다보니..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구봉선배님이 맏이셨군요.
제 아픔은 실연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아픔입니다. ㅎㅎ
세월이 흐르면 거리도 서서히 멀어지나요,
큰 형님과는 나이차가 조금 있어
아무래도 철없는 시절과는 달리
어려움을 간혹 느끼실 것 같습니다.
형제 간의 우애에 얽힌 추억담
잘 읽었습니다.
올 힌해 더욱 건강하세요.
열네살이나 차이가 나니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저만의 형이라는 소유심이
있었던가 봅니다. ㅎ
그때 그시절의 언어적 간격으로 고정시킬 수도 없고...
그것도 비극이겠네요.
같은 울타리에 있다고 느끼며 살다가
그렇게 서로의 영역을 찾아 갈라지는
것 같더라구요.
형제가 많은 복을 타고나셔
그런
행복한 벼락도 맞으십니다.
우습고 부럽고.
읽으면서 소년의 마음이 보여
글이 착착 감겼습니다.
행복한 벼락!
딱 맞춤한 말입니다.
글 쓰고나서 제가 느꼈던 느낌입니다.
갑자기 형님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라셨겠어요.ㅠㅠ
히야와 형님 사이에는 형수님이 계셨네요.
그렇네요. 그 거리는 측량키 어렵지만 분명한 팩트는 형수님이 그 사이에 있다는 것. ㅎㅎ
형님이 멋지시네요 마음자리님도 착하시고요 저도 이 글을 읽으니 언니가 결혼을 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가슴에 구멍 하나가 뚫린 듯하더군요 혼자서 울며 아래 이 노래를 속으로 몇번이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도 같네요 오래도록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마음님도 아마 그런 마음이셨던 듯합니다
감동적으로 옛날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행복하세요 😊
새색시 시집가네-이연실 - 이는 검색해서 기억이 나서 퍼왔습니다 ^^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꽃가마 타고 가네
아홉 살 새색시가
시집을 간다네
가네 가네 갑순이
갑순이 울면서 가네
소꿉동무 새색시가
사랑일 줄이야
뒷동산 밭이랑이
꼴 베는 갑돌이
그리운 소꿉동무
갑돌이뿐이건만
우네 우네 갑순이
갑순이 가면서 우네
아홉 살 새색시가
시집을 간다네
시집을 간다네
자매간에는 더 애틋한 느낌이 들겠네요.
저도 저 노래 좋아하고 잘 불렀던
노랩니다.
덕분에 옛노래 한번 다시 불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