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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 34. 화평이 아니요 35. 불화하게 하려 함 36. 사람의 원수
마 10: 34. 화평이 아니요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오셨다.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신 것이 사실이지만(마 11: 28),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심령 속에와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있는 평안이며 화목이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평안이 아니고, 또 진리와 비진리, 혹은 선과 악의 화해가 아니다. 복음은 막연한 평화의 개념이 아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오히려 죄와 마귀와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다.
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예수 당시 많은 사람들은 메사야가 와서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는 바로 이 같은 그릇된 기대들을 일거(一擧)에 거부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피력(披瀝)하셨다.
2] 화평이 아니요
이 어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불화(不和)와 반목(反目)을 일으키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평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인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로 번역된다. 유대인들은 영적 문제이든 세속적 문제이든지 간에 온갖 종류의 복을 기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번영이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꽃피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문에서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를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화평, 즉 현상적(정치, 경제 등)이고 외적인 평화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로 예수는 본질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고 내적인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요일 4: 10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3] 검을 주러 왔노라.
이사야는 메시아의 탄생을 '평강의 왕'이라 예언하였다.
* 사 9: 6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 탄생시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그의 탄생을 두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 14)라고 노래하였다. 예수는 평화의 실체이자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다.
* 눅 1: 79 -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롬 10: 15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사 52: 7)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골 1: 20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곳에서 예수께서 '화평'이 아니라 '검'(sword)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은 메시야의 임하심으로 야기되는 그 영향력과 결과들 중의 하나가 불의를 정복하고 악을 제거하는 투쟁임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주다'는 뜻의 원어 '바레인'(*)은 '던지다'는 뜻으로 긴박하고도 급작스런 전투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문구로서 본문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高潮)시켜준다. 여하튼 검이라고 하는 것은 적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며, 무기로서 검을 준다는 것은 적대감을 유발시켜 투쟁과 분열과 전쟁을 발발케 한다는 것이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신국(神國)을 건설키 위해 오셨다. 이 신국은 곧 땅 위의 죄악 된 질서를 척결(剔抉)함으로써 그 위에 세워질 것이다.
* 마 5: 9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런 까닭에 세상은 메시야와 그의 통치를 완강히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생결단의 치열한 혈전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 전투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 10: 35. 불화하게 하려 함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모든 성도의 삶이 그렇지만, 특히 전도자들의 삶이 그렇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최고의 헌신과 사랑과 복종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순종의 최고의 대상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절대적 헌신과 사랑과 복종은 때때로 집안 식구들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일으킬 것이다.
1] 내가 온 것은
'내가 왔다'(*,엘돈)는 표현은 예수의 기독론 적이며, 종말론적인 자의식(自意識)을 반영해 준다.
2]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본문은 미 7: 6의 인용이다. 미가는 아하스 왕 시대의 죄악성을 묘사하고, 예수는 복음이 빚어낼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가족적 분쟁을 일으키는데, 자신이 오신 목적이 있다고 천명하셨다.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종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 미 7: 6 -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이는 예수의 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그러한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오셨다. 제자들을 가장 많이 핍박할 자는 이방인이 아닌, 예수의 경우처럼, 자기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 마 13: 53-58 –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 요 7: 3-5 –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를 핍박한 자들은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불신 가족을 원수 취급해서는 안 된다. 적대감을 갖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본문의 특징은 젊은 세대(사람, 딸, 며느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언급되었으며, 이들이 늙은 세대에 항거할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이는 복음의 생동감 넘치는 침투력과, 고답적(高踏的) 사상에 물들지 않은 여린 신앙인들의 복음에의 열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3]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불화하게'(*, 다카사이)란 '둘로 나누다'는 뜻으로, 신앙 문제에 관한한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마치 기름과 물처럼 결코 연합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어떤 불신자들은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라고 비난하고, 일부 신자들은 가족까지도 무시하거나 원수 취급을 하면서 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 오히려 자기가 앞장서서 가족의 불화와 반목을 일으키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본문의 말씀을 그릇되게 이해한 데서 나온 파행(跛行)적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는, 당신을 신앙하며 헌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 많은 사람과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招來)하는 일임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마 10: 36. 사람의 원수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또 미워하고 핍박하던 식구들과 한 번 혹은 여러 번 싸움과 갈등을 치룬 후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킨 후에야 가정의 참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나 전도자의 사명의 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아마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 과정이다.
그러나 참고 진행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은혜와 유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에 계시고 그의 위로와 평안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있을 것이다.
1]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주는가 하면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케 한다.
그 까닭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지녔다거나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접한 각인(各人)의 부패한 심성(心性)과 반항적 기질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2] 구주의 오심과 제자들의 고난
본문은 예수님께서 복음 전도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기 전에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을 영접함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님이 오신 목적과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해 살펴보자.
(1) 주님이 오신 목적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이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고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① 사람들의 생각이 그릇됨을 지적하고 있다.
34절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생각함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다. 이 말씀은 마 5: 17에서도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한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신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고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셔서 온전한 자로 세워 주신다.
②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이며,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화다.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화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 자기 자신의 죄와 싸워 이긴 후에 오는 평화다. 이렇듯 세상과 다른 평화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약속되었다.
③ 주님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검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분쟁을 의미한다.
* 눅 12: 51-53 –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이 죄로 물들고 타락한 상태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죄 된 모든 생활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상태를 겪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원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에(히 4: 12) 사람들이 회개토록 자극한다.
* 계 2: 16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
주님은 미가서 7: 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대적함으로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관계의 단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①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죄 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의 가지에 붙어 있기에 이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죄 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둠의 자녀들이기에 그들은 빛을 싫어하며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으로 나아오기를 꺼려 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들을 미워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주의 이름을 위해 미움을 받게 된다.
* 마 10: 21 -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그러므로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② 주를 믿는 사람들은 가족들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게 되면 한 가정 안에서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주님을 믿기 때문에 오는 핍박 중의 하나다. 한 가정 안에서 신앙을 달리하게 되거나 주님을 믿는 식구로 말미암아 그 집이 어려움을 받게 되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을 믿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임을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위해 집이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신다.
* 마 19: 29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③ 고난은 보상이 주어진다.
첫째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
* 마 10: 22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둘째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이나 부모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게 됩니다(마 19: 29).
셋째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 마 5: 10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넷째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한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그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날선 검보다도 예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가 담대히 외쳐야 하며, 주님을 위해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되 가정까지도 포기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상급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견디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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