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디엠(Carpe Diem)
열여덟 살의 초여름, 상비군 선발을 위한 검도 대회의 단체 결승전. 주저 앉은 다리로 전해진 강당 마룻바닥의 서늘함을 잊을 수 없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 다신 시합을 못 하겠구나.' 그 뒤로 학교에서 잠만 잤다. 조별 과제를 할 때면 우등생인 짝꿍의 눈초 리가 따가웠다. '학교는 왜 나왔대?' 짝꿍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 다. 선생님들도 나를 포기했다. 나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책상에 엎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매일을 보냈다. 어느 날 우리 반 국어 선생님이 바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선생님도 내 게 무관심하길 바랐다. 하나 선생님은 첫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깨 웠다. 그러고는 칠판에 'Carpe Diem(카르페디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 라'라는 뜻의 라틴어)'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내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책을 건넸다. "왜 주시는 건데요?" 내가 묻자 선생님은 다 읽고 교무실에 오라고 했다. 수업 내내 그 책을 읽고 하교 직전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수업 때 자지 말라는 말 도, 공부하라는 말도 없이 그저 웃으며 다른 책을 내밀었다. 《이방인》, 《오만과 편견》, 《데미안》・・・・・・. 그렇게 3학년이 될 때까지 매일 책을 읽었다. 어김없이 선생님에게 책을 빌린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이렇게 읽는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처음 빌려 준 <죽은 시인 의 사회) 기억나지? 사실 그 제목은 번역가의 오역이었어. 원래 사회가 아니라 '동아리'로 번역되어야 했는데, 사소한 실수로 길이 남을 제목이 됐지." 그 순간 내 무릎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할 때면 살아 있음을 느끼곤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손톱을 기르지 도 못하고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혔지만 그 손으로 죽도를 휘둘렀다. 발 톱이 숱하게 빠지면서도 마룻바닥에 발을 굴렀다. 책상에 얼굴을 파묻을 때면 국가대표를 꿈꾼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눈을 뜨면 보호대 찬 무릎만 남아 있었다. 매일 생각했다. '운동하지 말걸. 모든 게 무너진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나 그날 선생님이 내 삶도 빛날 수 있다고 말해 준 것 같았다. 제목을 오역한 후 잘리지는 않을까 머리를 쥐어뜯었을 번역가의 모습과, 최고의 번역으로 꼽힌 후 가슴을 쓸어내렸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듬해 3학년이 되었고, 선생님은 여전히 2학년을 가르쳤다. 학기가 시 작 되자 선생님은 복도에 글쓰기 동아리 부원 모집 안내문을 직접 붙이 고 다녔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모집 기간은 지났지만 선생님은 내 게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를 물었다. "맞춤법을 많이 틀려서요." 선생님이 웃었다. 그렇게 나는 유일한 3학년 부원이 되었다. 재수해 대학에 들어가 글을 쓰는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교사가 되길 꿈꾼다. 내게 '지금'을 선물한 선생님이 곧 교직을 떠난단다. 조만간 찾아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도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되고 싶어요. 저 는 지금 현재를 즐기며 살고 있어요." 정유진 | 서울시 성북구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들로 만들어진다. _ 마르틴 발저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누군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으며 화를 냈다. 왜 그렇게 흥분했느냐고 물으니 서울에 살다가 강원도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는 분의 글을 읽었는데 자기가 재배한 배추 자랑을 하느라 남쪽 지방의 배추를 헐뜯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하고 그 농부 이름을 검 색해 들어가 보니 정말로 남도 배추와 강원도 배추를 매우 편파적으로 비 교 평가하고 있었다.
문제는 공정성을 잃은 비방이었다. ‘남쪽 배추는 허우대만 멀쩡하지 김치 를 담가 놓으면 몇 달도 못 가서 물러 버린다. 반면에 우리 배추는 일년이 지나도록 아삭한 맛을 유지한다.’ 대충 글의 요지만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 다. 아내는 작년에 이 글을 쓴 농부의 배추도 사고 남도의 배추도 사서(집 에서 요리 수업을 하는 바람에 그녀는 그해 김장을 두 번 했다) 김치를 담 갔는데 둘 다 맛이 좋고 오래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공정성을 잃은 것은 물론 선량한 농부들의 밥줄까지 끊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화끈하게 그의 배추를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글이란 그 런 것이다. 한 줄의 글은 어린 소년의 운명을 바꿔 놓기도 하지만 낙향한 농부의 고객을 한 명 사라지게도 한다.
아내 직업은 출판 기획자다. 그래서 글에 대한 철학이 일반 독자보다 분 명한 편인데 그녀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태도다. 글을 쓰는 사람이 세상 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면 그가 평소 어떤 판단을 하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를 남자 친구로 선택할 때도 내가 쓴 글을 읽고 마음에 들어 결심했다는데(그때 아내가 읽은 글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바보짓 한 이야기들을 모아 연재한 ‘음주일기’ 중 몇 편이었는데. 아무튼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오래 생활을 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부부 가 둘 다 놀고 있다’는 내용의 책을 냄으로써 작가 생활을 시작한 나도 글 쓰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내와 같은 생각이다. 글이란 생각을 담는 그릇이 고 그 생각은 자신과 타인을 변화시켜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좋은 이야기를 쓰라는 게 아니다. 남을 비웃거나 헐뜯는 글은 당시엔 쾌감을 줄지 모르지만 반드시 동티가 나게 마련이다.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이나 썼던 글 때문에 화를 당한 유명인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그럼 재미없더라도 긍정적인 글만 써야 하느냐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에 게 누군가 물었단다. 너는 어떻게 다루는 작품 중 좋지 않았다는 평이 하 나도 없냐. 그거 흔히 말하는 주례사 비평 아니냐. 이에 대한 신형철의 답 은 “저는 읽고 좋았던 것만 쓰기로 했습니다”였다고 한다. 굳이 작가의 부 족한 면을 들춰내고 후벼 파서 상처를 주는 글보다는 그가 이룩한 성과를 좀 더 부각해 더 많은 독자와 만나게 해주는 게 좋은 평론가가 할 일이라 는 걸 그는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글쓰기 강연을 할 때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말을 한다. 나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거나 누군가를 속이려 드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쓸 리가 없다. 아니, 어쩌면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점점 좋은 사람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글쓰기는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위로와 공감을 주는 것은 물론 일용할 양식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직장에서 날마다 쓰는 기획서나 보 고서도 글로 이뤄져 있고 세계의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K드라마도 몇 줄 의 시놉에서 시작된다. 이번 칼럼을 의뢰받고 생각해 낸 코너 제목이 ‘글 쓰기로 먹고살기’다.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어요?”라고 묻기 때문이다. 네, 글 써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십 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지쳐 칼럼으로 써보자 마음먹었다. 너는 카피라이 터 출신이고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으니까 그렇지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다만 글을 쓰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나는 이 칼럼을 읽는 분들에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전파하고 싶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글을 쓰면서 사는 사람과 그렇 지 않은 사람의 삶은 확실히 다르다.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내가 공부하 는 이유’엔 “책 읽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글쓰기도 그렇 다.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젊다.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 편성준 작가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소중한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쁨과 웃음이
함께하는 행복한
주말되세요~^^
카르페디엠(Carpe Diem)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오늘도 귀한글로
감동방을 가득 채워주신 망실봉님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소중한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승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