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정읍은 지리적으로 전주와 광주의 중간적 지리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호남과 서해안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예부터 기름지고 드넓은 동진평야를 두고 있다. 그만큼 광활하고 기름진 땅에서 소출이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하니 역사적으로 수탈의 중심에 서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조선후기 사회에 이곳 관리로 부임되기를 줄을 대어 기다릴 정도였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싫어서 중앙의 세도가에게 뇌물을 써서 수탈을 나누었으니 이곳 민초들의 서러움이야 상상이 될 법하다. 어딜 가나 붉은 황토밭이 넓게 펼쳐지면서 옛날 그 서러웠던 한의 색상처럼 마음 또한 그렇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지하의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상략, 하략)
이토록 붉게 내 뱉은 “황톳길”을 기억해 낸다. 어쩌면 이리도 역사적 사실을 함께 한 듯 표현할 수 있을까? 시기와 존경과 질투를 섞었던 부러운 기억이었다.
정읍이란 이정표를 반갑게 지나친다. 백제 때는 정촌井村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정읍으로 불리게 되었다는데 땅을 한 자만 파도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지하수가 넉넉하기 때문에 고을 이름에 우물정井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정읍하면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 된 것인 정읍사井邑詞가 떠오른다. 백제여인의 애절한 마음씨가 담겨있으며,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동안 돌아오지 않은 남편에 대한 의구심을 감추지 않은 시샘의 마음을 절곡하여 노래한 여인을 상상하며 내가 남편이 된 듯 미소를 짓는다. 장삿길에 나선남편을 기다리며, 자꾸만 고개 드는 의구심을 ‘달이여, 높이 돋아 멀리 비춰주세요.’ 라고 노래한다. 그리워 기다리던 여인은 외롭고 그리움의 애잔함을 해학의 아름다움으로 달래고 반전과 익살 섞인 애정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있다. 아마 일상의 삶에 희망을 자근자근 담아 노래하였던 그런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근대사 농민항쟁의 역사에 함성의 소리와 겹쳐지면서 스스로 사치의 허영에 정리되지 않는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그렇게 항쟁의 역사를 찾아 하루를 보낸다. 고부관아터로 향해가던 길에 약간의 길을 돌았다. 바로 은선리 삼층석탑이 보고 싶어서였다. 농민항쟁 역사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평소 즐겨 감상하곤 했던 석탑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서다. 바로 정읍 영원면 은선리에 서있는 석탑이다. 해는 점점 기울어 가는데 하루의 일정이 빡빡하여 조급함이 앞서긴 하지만 애써 여유를 부린다. 오늘 날 뿐인가? 늦으면 하루를 정읍에서 유하고 내일 김제를 돌아 전주로 향해도 될 것을······· 길에서 찾는 여유는 사람에게 이상한 에너지를 안겨준다. 그것은 다음 답사지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다.
좁은 포장길을 꼬불꼬불 지나자 왼편에 우뚝 솟은 석탑한기가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논밭을 두고 뒤로는 산을 머리에 이고 있다. 나는 순간 당황해 버린다. 그렇게 많이 다녔다고 자부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석탑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터에 6m 높이로 우뚝 솟은 석탑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라라는 듯 일층 몸돌을 훌쩍 늘려놓았다. 당당하게 견장을 찬 의장대의 멋진 모습에 나는 땅에서 빌빌기는 초라한 졸병이 되는 순간이다. 한곳에 집중을 하고 눈을 때지 못한다. 쭉쭉 하늘로 뻗은 기막히게 섹시한 모습의 석탑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는 그 모습은 영판 다른 인상이었다. 처음 잔잔하게 주는 질감의 성정이 그러하고, 빛바랜 석탑에 세월의 손때가 묻은 듯 황갈색의 색상이 그러하고, 기울어 비추는 햇살에 갈리는 양감에서 볼륨감을 느끼니 전체적 분위기가 이 지방의 가슴 속에 묻어있는 색상인 한恨의 황토가 세월에 침전된 느낌이다. 다소 억지를 부리자면 일부러 일층 몸돌의 길이를 크게 가져간 것은 당당했던 그들의 기상을 이전의 세상에서 미리 예언한 것 같은 모양세니 후손들은 이곳에서 그들만의 희망과 자부심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선인들이 느끼고 던졌던 교훈들을 저변 깊숙이 간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가만히 합장을 하고 탑돌이 시늉을 내며 사방을 뜯어본다. 네 장의 돌로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넓은 판석으로 하나의 기단을 올렸으며, 모서리기둥 우주가 돋아있다. 그 위에 두개의 덮개석을 놓고 훌쩍 일층 몸돌을 올렸다. 남과 북쪽에는 한 장의 판석이며, 그 양 옆으로는 세로로 좁다란 두 개의 판석으로 완성해 놓았다. 덕분에 긴 몸돌에 세로줄이 하나 더 있으니 시각적 직선이 멋을 낸 모습이다. 그 위에 두텁지만 잘 다듬은 사각의 지붕돌 층급받침이 하나이며, 모서리 반전이 전혀 이루어 지지 않은 평면으로 지붕돌을 올렸다.
때문에 세로의 직선과 가로의 단정한 선이 마감하며 흔들림 없는 기상을 엿본다. 또 위에 낙수면이 한 단 더 있고, 같은 두께의 몸돌받침 위에 2층 몸돌을 판석으로 짜 놓았다. 삼층 또한 같은 모양새이나 상륜부에 노반과 복발이 정직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일층만 눈에서 지워버리면 어쩜, 지나왔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을 닮아있다. 평평하고 넓은 지붕돌의 낙수면 모습이나 판석으로 짜 맞춘 형태로 보아 백제계 석탑이 분명하나 그들의 마음씨를 담아 고려시대 그들의 후손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 여겨진다. 또 하나 특이한 모습은 이층 몸돌 남쪽 면에 감실을 달고 두 개의 돌로 문을 달았다. 손잡이 홈이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손잡이를 달고 그 속에 감실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무엇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양념처럼 찾아본 이곳에서 그동안의 함성과 울분과 새로운 세상에 목말라 했던 열기들을 다소 식힐 수 있었다. 탑이 서 있는 자리 앞에 또 하나의 석탑이 된 듯 자리를 틀고 앉아 시름에 잠긴다. 해가 기울어지면 늘상 그렇듯 두고 온 붙박이들이 생각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43번지
첫댓글
초시님~ 안녕하세요? 초시님의 정서를 닮아 단아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삽화도 멋져요!!!!
여전히 멋진 글. 더분데 잘 지내나 보네 요즘은 연락도 없네 놀러 좀 와라
초시님 글을 읽다보면 왠지모르게 한이 역사가 느껴져 슬퍼져요...석탑!! 하나를 봐도 그리도 풍부하고 섬세한 감성이 일다니...
형니 전화 좀 받으시죠??????
당당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우뚝 서있는 석탑이 무언의 용기를 주는 듯 합니다. 멋지게 그려주신 그림속의 인물처럼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