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의 꿈
가을날, 10월의 나른한 오후, 물감으로 뒤덮인 단풍나무 아래 꿈을 꾸었다. 한 무리의 선남(善男)들과 함께 호수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호수는 가을빛으로 푸르고, 깊숙한 곳은 억새들이 바람에 군무(群舞)를 이루며, 백로들도 하얀 깃을 내리고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이 땅은 노인들이 살 곳이 아니어서 비잔티움으로 항해를 시도하듯, 우리는 열차를 타고 언덕으로 향했다, 그곳은 푸른 초장(草場)이 한없이 펼쳐지는 평화로운 고원이었다.
어느새 중천에 머물었던 태양이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듯 서편 강변으로 노을이 되어 하늘 한편을 물들이고 있다.
그곳에 와서 일영표(日影表)를 보니, 우리는 5,000년 전 최초로 인류문명이 시작된 수메르에 시간여행을 온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우리 각자가 우루크의 왕이며 영웅이었던 길가메시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길가메시(Gilgamesh)는 젊은이(mesh)가 된 노인(Gilga)을 뜻하는 수메르 언어이다.
우루크 왕이었던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 탐험을 나섰다가 천신만고 끝에 불사초를 찾았으나 뱀에게 빼앗겨 고국인 우루크로 쓸쓸히 돌아온다. 그 스스로 반신반인(半神半人)이었으나 이제 죽음을 받아들인다.
환희의 소리에 꿈을 깼다. 눈을 뜨고 보니 60년 전 같은 창문에서 함께 공부하며 놀았던 50여 명 친구의 향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홍수의 힘든 역경을 이겨낸 노아는 아라랏산 부근에 정착하여 농사를 시작하며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곳이 조지아 근처인지도 모른다, 처음 수확한 과물(果物)로 포도주를 담그고 대취(大醉)했다. 담당하기 어려운 그간의 고난과 기쁨으로 매끄럽게 넘어가는 그 향기에 한 번쯤 자신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신선이 된 듯 그런 포도주의 향연에 흥건히 빠졌다. 노인들의 취흥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생각해 보면, 어떤 계기에 한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이처럼 오래 아름답게 지속이 되는 기적은 놀라운 행운이다.
우리 생애에 신선들과 함께 몇 번이나 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겸허히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면 좋겠다. 비록 뱀에게 불사초는 빼앗겼을망정, 노인이 젊은이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이라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朽敗) 하더라도 마음은 날로 새로워지고, 오늘이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었으면 좋겠다.
2023.10.26. 어제의 아름다운 노을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