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왕가의 백합)
우리는 점심을 마치고 로마 수도교 바로 앞에 있는 아소게호 광장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로마교 끝이 닿는 곳까지 따라가서 보아야 할 것인데 시간에 쫓기는 우리는 그러지는 못하였다. 아마 그곳 정점에는 13세기에 축성되었다는 알카사르 성이 있을 것인데 이 성은 우아하고 선이 뚜렷하여 월트디즈니의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때의 왕 펠리페 2세의 결혼식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니 고지대에 우뚝 선 빼어난 이곳의 경관이 어떠한지 짐작이 간다. 갈 길이 바쁘다보니 남는 아쉬움도 많다. 차를 주차할 때 한 할아버지가 나서서 주차를 도와주었는데 그가 안 보인다. 단지 무료봉사였는지 아리송하다. 우리는 준비한 잔돈을 호주머니에 넣고 알카사르를 못 보는 아쉬움에 다시 성벽을 쳐다보곤 차에 올랐다.
세고비아 근처엔 또 다른 명소가 하나 더 있다. 10킬로 떨어진 라 그란하 라는 곳엔 작은 베르사유의 궁전이라 불리는 궁전이 있다. 프랑스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고국인 프랑스를 그리워하며 1731년 페날리라 산기슭에 세운 궁전이라고 했다. 우리는 라 그란하라는 이정표를 쫓아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 참 산이 가까워지는데 산등성이 온통 하얗다. 설산이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것이다. 천이 넘는 고원지대에 하늘높이 보이는 산이라니 그곳 해발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마드리드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이곳에 궁전을 세운 것은 얕은 구릉지 고원에서 달리 보이는 아주 색다른 아득한 절경이라 그러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차를 주차하고 궁전을 향하였다. 얕게 깔린 눈발이 푸석한 황사바람 날리는 조금 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고즈넉한 겨울의 정원 속에 여행의 고상함이 바로 인식되어진다. 그렇게 걷다보니 궁전 뒷면의 성당을 지나 궁전을 한 바퀴 자연 돌아 산에 가까이 가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겨울의 정원 그리고 숲이 바로 설산과 연결된 것이 아닐까 싶다. 대단한 자연경관이다. 우거진 수목에 다채로운 분수에 끝없이 펼쳐지는 가로수가 우리를 압도한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타국의 국왕이 되어 금마차에 오르는 그의 심경이 들여다보이는 듯 깎인 돌은 장엄하지만 끝없는 자연 속에 외로이 선 건물이라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부르봉왕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강조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궁전 내부는 수리 중에 있어 들여다 볼 수가 없다. 궁전을 되돌아 나오다 나는 철문 중앙에 새겨진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 모양의 문장을 발견했다. 프랑스 고궁에서 흔한 틀림없는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 먼 타향 땅에서 꼿꼿이 서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 말대로 집안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켰다. 그런 그는 이 건물을 그러니까 즉위하고 30년이 넘는 청춘을 다 보낸 50에 이르러 지었다. 누구든 나이가 들면 빠져든 영욕도 어쩔 수 없지만 뭉게구름 일듯 일어나는 회상도 어쩔 수는 없는 것 같다. 부르봉왕가를 상징하는 백합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프랑스의 국기로 사용되었었다. 그들이 그 왕가 의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부르봉 왕가의 시조인 앙리 4세이다.
당시는 종교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시기였다. 그는 피레네 산맥 스페인 북부 나바라왕국의 여왕인 어머니와 프랑스 공작 사이에서 태어난다. 정파 싸움으로 어렵게 프랑스 왕에 오르는 그지만 구교와 신교의 갈등으로 프랑스가 내란의 위기에 치닫는 어려움을 또 맞이한다. 그가 그 해결책으로 내 놓은 것이 낭트칙령(Edit de, Nantes /1598)이다. 낭트칙령이 정략적이라고는 하지만 구교의 국가에서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와 공직취임을 허용한 것 등은 이들을 배려한 일종의 관용으로서 종교적 분쟁내지는 정치적 분열을 막고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은 틀림없었다. 이후 부르봉왕가는 절대군주제를 공고히 하고 유럽의 패권을 잡기 시작한다. 지금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닭인데 부르봉왕가가 제위하면서 주말이면 닭을 먹을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주겠다고 공언하고 그 공언이 이루어져 부쳐진 것이라 한다.
부르봉 왕가를 살펴보자니 몇몇 재미난 사실을 알게도 된다. 앙리4세는 그의 부인이 두 명인데 모두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과 연관이 있는 여인들이다. 첫 번 째 부인인 마르그리트 데 발루아(이하 애칭인 마고)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왕 앙리 2세와 메디치 가문에서 시집온 카트린 데 메디치 사이의 막내딸인데 마고왕비는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였고, 왕의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 죄로 앙리 4세 즉위 후인 1599년 이혼 당한다. 앙리 4세의 두 번 째 부인인 마리 데 메디치는 피렌체 유지 가문을 뛰어 넘어 피렌체를 포한한 토스카나 지방을 기반으로 공국을 세운 코시모 1세의 손녀다. 그녀는 1600년 그의 후계자인 루이를 출산한다. 알다시피 메디치 가문은 교황과 돈거래를 하여 번 돈으로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등을 후원하여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되게 한 가문이다.
그런 부르봉왕가는 태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루이 14세를 낳기도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이 16세에 이르러 시민들이 봉기하여 단두대에 오르는 참상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3년 전 알프스 산기슭에 있는 스위스의 호반도시 루체른을 방문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묘하게도 부르봉 왕조를 상징하는 백합을 보았었다. 참 묘하다 싶었지만 덮어두었었는데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다. 그곳에는 꺾어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방패를 껴안고 스위스 문장이 새겨진 방패 앞에서 비통한 얼굴로 죽어가는 `빈사의 사자상`이 벽에 조각돼 있다. 원래 스위스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고 얼마 안 되는 토지조차 척박해 유럽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땅이었다. 오랜 기간 스위스 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해왔고, 주변에는 힘센 나라들로 둘러싸여 생존의 위협까지 느끼는 악조건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용감한 정신과 강인한 체력을 가진 뛰어난 민족으로 주위 국가들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해 강한 전투력을 보여주는 이름난 전사들이었다. 결국 그들 중 700여명의 젊은이는 19세기 프랑스 혁명 와중에 루이 16세와 왕가를 돕는 용병으로 나선다. 혁명이 막바지에 달해 시민들이 왕궁을 포위하고 왕의 항복을 요구하는 가운데 상황이 절망적인 것을 깨달은 왕이 스위스 용병들은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고 시민들도 무고한 용병들을 해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왕가를 호위하는 일을 맡은 이상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싸움을 계속하다 전원이 장렬히 전사하는 최후를 맞았다. 자신들의 나라도 아니고 지켜야 할 왕도 아니었지만 돈을 받고 계약을 맺은 이상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신의를 지킨 이들의 자세는 그 후 스위스 사람들의 평판을 크게 드높였고 십자군원정 때도 그러했다는 그들은 바티칸 교황청이 수비대를 지금도 스위스인만으로 구성한다는 명예를 낳았다.
그들이 그렇게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벌어들인 돈은 헛되지 않았다. 조상들의 피맺힌 희생정신을 기리고 잊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오늘에 되살려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후손들에게 보여주면서 나라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스위스 인들의 자세는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함부로 자신들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강한 정신력을 느끼게 한다. 비밀 엄수로 유명한 스위스 은행들의 경영방식은 세계의 금융 중심 국가로 인정받게 만들었고,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철강과 정밀기기 기술은 스위스를 발전시키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오늘날 스위스가 영세중립국가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것은 이러한 신용과 유비무환을 강조하는 그들의 정신력에 있지 않은가 싶다. 그들은 짭짤한 관광수입말고도 비밀을 보장하여 그 댓가를 오히려 받으며 운영하는 그들 특유의 금융업과 군수산업으로 선진국 중에 선진국이다.
우리는 숲길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문득 그들은 문장을 왜 백합으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시대 명문 집안 들은 문장 하나씩은 갖고들 있다. 메디치 가문은 금색바탕에 진주를 막은 방패를 그들의 문장으로 사용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두 마리의 독수리를 변형하여 상징 문장을 만들었다. 그 옛날 로마의 상징은 바로 독수리였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독수리는 ‘신중의 신’인 제우스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비록 로마제국은 역사상에서 사라졌지만, 이후 서방 유럽은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제국의 왕들은 로마의 영화를 기리며 자신을 로마의 황제에 비견하려 했다. 이러한 로마에 대한 애정과 숭배는 역대 유럽 왕들을 거쳐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대관식 때 내걸었던 독수리 문장이나, 히틀러의 상징인 독수리와 하켄크로이츠로 이루어진 국장은 이런 로마의 영광과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부르봉은 꽃을 택하였다. 혹 프랑스의 종교분쟁을 막기 위해 그 스스로 구교로 개종하였다는데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백합을 일부러 택한 것은 아닐까. 그의 개종을 의심하는 구교신도들에게 백합의 뜻처럼 순수한 결정임을 확실하게 남겨두려 한 것이 아니라면 프랑스의 결합과 사랑을 위해 정한 따뜻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혹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더할 것이 없다 하겠다. 그는 불행하게도 광신적인 구교도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입헌 군주주제인 스페인의 현재의 국왕은 부르봉왕가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부르봉 왕가는 선왕의 뜻에 따라 지금도 여전히 어느 가문보다도 철저히 집안의 명예와 자존심을 꾸준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