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백제의 한계
1-1.마한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백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이겨내기에는 더더욱 부족했다.
따라서 왜국에 절대적으로 의존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백제 점령 초기인 근초고왕때 이미 왜국 출신 외척의 전횡을 겪어야만 했다.
1-2 왜국은 태생적으로 해상무역국가였다. 국가 성립과정이 이미 그러했으며 지정학적으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안전한 항로를 구축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선험적, 상황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항구인 고향땅, 옛 대방을 쫓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의미하는바는 고구려와의 투쟁이였으며 필연적으로 백제 주민들의 희생이 강요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것이 근구수왕 사후, 왜국으로 하여금 내정간섭을 넘어 백제의 왕권 계승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하였다.
1-3 세겹의 햇무리 사태
최초 승리자는 왕세자 훈해(여휘)였다.
2년간의 내전 끝에 왜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진사(직지)를 쫓아보낸 그는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왕으로 책봉(386)받는 등 왕위를 계승하는 듯 했지만 뜻밖에 다크호스였던 첩례(침류왕)가 훈해를 살해하고 다시 2년후인 388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훈해의 지지세력들이 불과 일년여만에 다시 침류왕을 살해하고 389년 강화도에서 대기하던 진사(직지)왕이 백제왕으로 즉위케하니 이때부터 백제왕은 왜국의 꼭두각시이고 백제국은 대 고구려 전쟁기지와 다름 없었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설화는 이들을 3형제로 표현하고 있고 일본서기 닌토쿠천황편에 실려있는 내용도 마찬가지지만 사건 전개 과정이나 토요타 족보를 봐도 실제로는 서로 다른 3개의 세력이 격돌했다고 보는것이 옳을것 같다.
2. 영락6년 전쟁
진사왕이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와의 전쟁에 골몰하던 백제에 대해 광개토왕은 396년(진사왕8년)에 직접 전선에 나서며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2-1. 비문의 왜라는 표현에 대해
배를 타고 올만큼 먼곳에 있는 남쪽 해외변방이라는 의미의 메타포다.
빙빙 돌려말하는것을 싫어하는 우리민족의 말하기 방식이다.
2-2. 그러한 표현을 한 이유
전쟁 대상자들이 부여 유민들이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예맥인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실은 국인들 중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부여계 귀족들과의 세력균형이 매우 중요하였다.
후기로 갈 수록 이것이 실패해 급기야 부여인들의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데 영류왕의 대당 저자세 외교도 여기서 기인하는것이다.
전쟁이 끝없이 이어져 국고는 말라가고 백성들의 원망은 왕실을 향하는데 매파들인 부여계 귀족들의 세력은 오히려 강해져만 가니 부여의 옛 영토는 당나라에게 넘기고 평화를 얻고자 하는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태왕비문에 실려있는 개국신화가 삼국사기의 내용과 다른 이유도 전성기인 이때와 달리 후기로 갈 수록 국정이 부여인들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이것으로 인해 부여 조상신인 동명의 권위를 고구려 왕실이 빌려 오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전쟁 대상인 부여 이주민인 마한과 변한을 북쪽사람들에게 있어 해외변방이라는 의미의 "왜"라는 단어로 규정지어 거리를 두고 예맥계인 백제와 신라를 구시속민이라고 정의하며 교화와 구원의 대상으로 선언한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국내의 부여인에게 이들이 해외의 외적일 뿐이며 백제와 신라를 입술로 삼아 이가 시린것을 막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삼국체제가 어느정도 자리잡고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까지 고구려의 대남 전략이였다.
2-2 영락6년 전쟁의 결과
396년 진사왕이 고구려에게 한강이북을 모두 내어주고 진사왕이 직접 항복을 하며 전쟁은 끝이 났다.
3. 아신왕
진사왕의 아들 구이신이 399년 다시 왜국에서 병력을 빌려와 백제 재건에 나섰다.
소극적이며 방관적 태도로 일관했던 부왕과는 달리 구이신은 적극적이였으며 자신이 직접 군사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영락10년(400) 고구려가 신라 구원 전쟁에 나서며 병력에 공백이 나자 401년 백제 왕좌에 앉게 되는데 바로 아신왕이다.
거의 해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나섰는데 그때마다 완패하자 마침내 대방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을 포기 하게되었다.
그대신 왜국은 백제를 경유해(412년)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는(413년) 방식으로 외교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민심이 크게 동요하자 414년 전지에게 왕좌를 넘기게 되었다.
4. 전지왕
실권은 전대 아신왕이였던 상좌평 여신과 해씨들에게 있었다.
동진, 유송과 자주 통교하였다.( 이글도 그 기록들 덕분에 나왔다.)
전지왕 14년(427) 왜국에 무명베 10필을 보내는데 일본서기에 428년 신제도원이 왔다고 하니 혼수로 보인다.
5. 비유왕
429년 왕위에 올라 유송에 사신을 보내고 430년 다시 사신을 보내 전지왕의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잘생기고 말도 잘했다고 한다.
비슷한 처지의 신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나제동맹의 시초가 되었다.
1.전전대왕이였던 여신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2.재위시절 왜국과의 통교가 없었으며
3.전지왕의 서자라고 전해지고
4.이시기의 왜국왕인 진이 백제왕을 포함한 6국제군사를 자처하는것으로 보아
이전까지의 왕과는 계통이 달랐다고 본다.
6. 개로왕
왜왕 제이다.
455년 비유왕을 살해하고 백제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한다.
전대 비유왕의 아들인 모도를 민심수습 차원에서 우대하였다.
실권은 친아들인 곤지에게 있었다.
461년 백제에서 다른 아들을 보자 462년 곤지를 바다건너 진짜 일본으로 보낸다.
곤지는 462년 송에 사신을 보내 왜왕 흥으로 부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미래에 혹시모를 왕자들간의 충돌을 방지하는 교통정리를 미리하면서 백제와 일본에 걸친 2원 체제의 국가를 꿈꾼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야심만만한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7. 문주왕
친아버지의 원수를 갚은것도 아니고 키워준 양부의 은혜를 갚은것도 아니었다.
우유부단하게 살다가 우유부단하게 죽었다.
475년 개로왕이 죽자 백성을 이끌고 공주로 남하하였다.
일본에서 급거 귀국한 왜왕 흥 곤지에게 477년 4월 내신좌평의 직위를 주며 회유하려 하였으나 5월 곤지가 반기를 들고 삼근왕으로 즉위하였다.
마한의 귀족 해구가 같은 해 7월 곤지를 살해하는 공을 세워 기고만장해 478년 문주왕마저 살해하였다.
8.동성왕
부왕 문주가 살해당했을때 불과 13세였다.
우유부단했던 아버지와 달리 어린나이에도 과감하고 기민하였다.
곤지의 부하들을 끌어들여 부왕의 원수를 갚고 곤지(삼근왕)을 전대왕으로 인정하면서 백제왕이 되었다.
삼근왕의 재위기간이 2년인것은 455년 개로왕 사후 부터 곤지가 사망하는 457년 까지를 기간으로 잡아서이다.
삼근왕 2년 동안의 내용은 곤지의 복수를 동성왕이 했다는것을 인정하기 싫은 누군가가
동성왕 초기 2년간의 기록을 삼근왕의 기록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9.무령왕
개로왕이 살해당하자 급히 곤지와 교대해 일본으로 들어가서 477년 곤지가 죽자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주장하였으나 인정되지 않고 백제가 빠진 6국제군사 왜왕무로 즉위 하였다.
478년 유송의 순제에게 보낸 무왕의 국서에 동서북으로 정벌했다는 주장은 왜국이 최초 영산강유역에서 개국했던 당시있었던 전쟁부터 가야와의 있었던 전쟁, 백제를 점령하던 때와 대방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까지, 조상들이 벌여온 모든 정복전쟁들을 나열한것이지 그당시에도 모두 점령하고 있다는것이 아니다.
501년 동성왕이 측근 백기에게 살해 당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외직을 사양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살해했다고 나와있지만 동성왕 20년에 있었던 전쟁위기후 사망직전 말년까지 좋지 않은 징조들이 이어지는것으로 보아 실재로는 왜왕 무와의 전쟁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패전을 예감한 백기가 동성왕을 살해해서 무령왕에 잘보여 살아 남으려고 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다.
이때 이후의 사서는 온조왕 바로 뒤에 왜왕이였던 루자 돌림의 3왕을 집어넣고 대방지역에 있었던 왕들의 계보도 살려서 백제본기의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백제왕의 계보로 쓰여진다.
이제 진짜 다왔네요.
마지막 한편이면 다 쓸듯 합니다.
마지막 내용은 성왕때 부터 대가야를 두고 벌어진 일들이 주된 내용입니다.
첫댓글 1) 근초고왕이 왜국과 교섭하였다고 하셨는데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왜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백제본기에 나오는 최초의 왜국 기록은 고구려 광개토왕에 의한 396년 잔국토벌 다음 해인 397년입니다. 무슨 근거로 근초고왕이 왜를 만났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2) 일본의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390경)까지를 전기고분시대라고 합니다. 전기고분시대에 일본서기에 일본에 국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전기고분시대의 일본이 풍습이나 지리 기록도 좋습니다. 일본서기 어느 기록인지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근초고왕과 고국원왕 때인 369년에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고구려의 선공으로 최초로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 전쟁원인이 무엇입니까?
무령왕이 왜왕 무입니까?
곤지가 개로왕비를 데리고 가던 461년에 섬에서 아들(무령왕)을 낳자 개로왕의 지시에 따라 아들은 돌려보내고 왕비만 데리고 갑니다. 따라서 무령왕은 왜국에 간 일이 없습니다.(전라도천년사도 이것은 정확하게 썼습니다.)
무의 사신이 송에 가서 자신이 7국도독이자 왜왕을 자처하는 해가 462년입니다.(무령왕은 1살) 무가 사신을 보낸 이유는 왜왕세자 흥의 사신이 왜왕 책봉을 받으려고 하니 흥은 죽고 자신이 왜왕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왜왕 무의 사신은 478년인데 국서를 보면 비통함이 가득하고 책봉을 구걸하여 이전 462년과 전혀 다른 모습인데, 그 이유는 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왜국은 무가 갑자기 죽자 후계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였는데 혼란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여 무의 죽음을 숨기고 책봉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후 502년에 양을 건국한 양무제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여 과거 사신을 보냈던 주변국 왕들을 일제히 승진시켜 책봉하는 행사를 치렀습니다. 마치 시진핑이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여 루즈벨트를 미국 왕에, 처칠을 영국 왕에 책봉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때 왜국에서 마지막으로 사신을 보낸 왜왕 무도 다시 책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