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6일 [연중 제27주일]
마르코 10,2-16
끝까지 가는 부부의 비밀: 의무가 감정을 이기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도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욕구로 살면 실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지만, 남편이 자신이 벌어온 돈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서로 감정이 상하게 만듭니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는 것입니다.
‘EBS 부모 – 아이 양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묻는 말에 ‘아무것도 아닌 아들’이라 대답했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아빠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내가 맞지?”라는 듯 아내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 옆에서 엄마는 “당신이 하는 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화가 더 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감정 카드를 뽑았는데, ‘외로움, 고통’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무시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감정은 외로움과 고통이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욕구로 생겼을까요? 남편은 ‘존재감(중요하게 여겨짐), 이해’를 뽑았습니다. 남편은 무언가 근저에 인정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이 원인으로 뱃속 깊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했고 거기에서 외로움과 고통의 감정이
생겼으며 그 원인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욕구에 지배당함으로써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이 생겼고 결국 그 원인을 상대에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무는 감정을 이깁니다.
하느님이 주신 의무는 뱀의 욕구를 이기는 새로운 욕구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가 함께 십일조를 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면 부부생활은 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2년 당시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준 네이피어(100)는 결혼생활 79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결혼을 의무로 여겼습니다.
매일 자기 전 뽀뽀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이 의무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의사도 선풍기 틀고 자면 큰일 난다고 어머니가 선풍기를 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자는 게 소원이랍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주님 현존 안에서 돈 때문에 서로의 탓을 하는 일은 사라집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의무’만 남습니다.
사랑의 의무란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맺어주셨음을 믿읍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복음: 마르 10,2-16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돌아보니 불과 5~60년 전의 일입니다.
가구마다 자녀를 너무 많이 낳다 보니 인구가 너무 급증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반에 70명, 80명이 배정되어 담임 선생님이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한 명 한 명, 인격적 대우가 아니라 도매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있는 시골은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온 마을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을 입구에 큰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너무 귀한 아이들이다 보니,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감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 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4~15)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일 강론>
(2024. 10. 6.)(마르 10,2-16)
<배우자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2-12)”
1) 이 이야기에 있는 예수님 말씀들은, 모세가 정한 이혼장 규정을(신명 24,1)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폐지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그 규정을 신경 쓸 이유가 없고,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죽은 규정’일 뿐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아내와 헤어져도 됩니까?” 라고 묻지 않고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의 ‘버리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아내를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이고,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정답을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자식을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물었다면?
어떻든 가족을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버린다면, 그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사실, 가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호하고 명확합니다.
“버리면 안 된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소유물이 아니니까, 버릴 권한이나 권리 자체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18.21-24).”
하와는 아담의 분신이고, 사실상 아담 자신입니다.
그러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혼인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는 다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지만,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혼인도 ‘거룩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혼인과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집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하고 단순한데,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리면 안 된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0-13.15.).”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결혼한 경우에,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고 하면 헤어지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권고를 ‘바오로 특전’이라고 부르고, 실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무조건 안 된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바탕으로 해서,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의 경우에는, 잘못한 일이 없으니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낸다면,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라는 말도 중요한데, 혼인성사가 신앙인들을 억압하는 족쇄로 작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