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큐대와 당구공은 꼭 가져가소' 한국 당구의 부활을 이끌었던 김경률은 지난 22일 불의의 사고로 안타까움과 아쉬움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당시 영정 사진에는 평소 그가 한시도 떼지 않았던 큐대와 공이 놓였다.
한국 당구의 개척자 김경률(35)이 아쉽게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23일 "지난 22일 오후 3시15분께 고양시 행신동의 한 아파트 인도에서 김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신고했다"고 밝혔다. 타살 흔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목격자와 유족의 진술을 토대로 김경률이 아파트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이 아파트 20층은 김씨의 부모가 사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구계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최근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 당구계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대한당구연맹 관계자는 "오늘 오전 소식을 들었고, 깜짝 놀랐다"면서 "한국 당구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안타깝다"고 밝혔다.
3쿠션 세계 랭킹 8위인 김경률은 16살, 다소 늦은 나이에 큐대를 잡아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따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도 지냈다. 특히 지난 2010년 한국 선수로는 18년 만에 월드컵 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당시 김경률은 터키 대회에서 세계 2위 딕 야스퍼스를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1992년 고(故)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 이후 18년 만의 월드컵 정상이었다. 천재로 불린 이 전 회장이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며 강호들과 겨룬 반면 김경률은 순수하게 국내 무대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던 의미 있는 우승이었다. 한국 당구의 중흥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이후 김경률은 2011년 당시 한국 선수 역대 최고인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다. 이후 한국 선수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최성원의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조재호의 월드컵 정상 등 낭보가 이어졌다.
김경률의 비보가 더 안타까운 것은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벌어진 사고라는 점이다. 23일이 김경률의 35번째 생일이었다. 여기에 김경률은 지난 2012년 결혼해 딸까지 둔 가장이었다. 당구계에 더욱 큰 충격을 주는 이유다.
최근 김경률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한 당구계 인사는 "아직 사인이 밝혀지지 않아 조심스럽다"면서도 "김경률은 뇌 수술 이후 성적이 주춤했고, 최근 사업도 지지부진했다"고 밝혔다. 김경률은 고질적인 눈떨림 현상을 잡기 위해 2013년 뇌신경 수술을 받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경기인 만큼 결단을 내렸지만 한동안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최성원과 조재호, 강동궁 등 라이벌들이 김경률을 추월해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다.
최근 시작한 당구용품 사업도 신통치 않았다. 관계자는 "규모가 크지는 않고, 벌인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업이 잘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스폰서 계약도 맺는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할 상황은 아니었는데 단순 사고라고 해도 대단히 안타깝다"면서 "당구 외에 금전 관계 등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당구의 르네상스를 열어젖혔던 김경률. 비운의 당구 천재의 빈소는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의 명지병원에 마련되어서 2월 26일 발인되었다.
'내가 세계 최강' 최성원(가운데)이 11월30일 세계3쿠션당구선수권대회에서 전 세계 1위 토브욘 브롬달(왼쪽)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뒤 시상대 맨 위에 올라 두 손을 치켜들고 있다.(사진=대한당구연맹)
최성원(부산시체육회)이 한국 당구 역사 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정상에 올랐다. 최성원은 지난 2014년 12월 30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체조관에서 끝난 '제67회 세계3쿠션당구선수권대회'에서 왕년 최강자 토브욘 브롬달(스웨덴)에 40-37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 선수로는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세계선수권 우승을 일궈냈다. 미국당구협회(BC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당구 천재' 고(故)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이 전 회장은 월드컵에서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세계선수권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국 당구 106년 역사에 최초로 세계캐롬당구연맹(UMB) '올해의 선수상' 영예를 얻은 최성원(38). 27일 오전 수화기 넘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그러나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절친한 후배이자 라이벌 김경률(35)을 가슴에 묻은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경률은 5일장을 치른 뒤 26일 화장을 거쳐 강화도의 한 추모공원에 안치됐다. 최성원은 후배의 마지막을 보낸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동궁, 김행직 등 동료들과 함께 김경률의 추모 사업을 위한 논의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최성원은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했다. 사실 최성원은 비보를 접한 이후부터 편하게 눈을 감았던 시간이 별로 없었다. 월드 슈퍼컵 출전으로 벨기에 안트워프에 있던 최성원은 곧바로 짐을 싸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차 적응을 할 새도 없이 장례식장으로 달려와 동료, 관계자들과 조문객을 맞았다. 발인 전날인 25일 밤 열린 대한당구연맹의 추도식 때 최성원은 선수 대표로 추도사를 읽었다. 오열 때문에 제대로 낭독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읽어낸 최성원은 다음 날 화장과 안치까지 함께 했다.
↑ '경률아, 같이 이루자고 했잖니' 최성원이 지난 24일 후배 김경률의 추도식에서 선수 대표로 추도사를 낭독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모습.(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최성원은 탈진했다. 연맹 관계자는 "장례식 내내 너무 울어서 기운이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경률은 최성원에게 너무도 특별한 존재였다. 동생이었지만 존경했고, 넘어서야 했던 롤 모델이었다. 그것은 김경률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건설적인 경쟁을 통해 긍정적인 시너지를 냈던 상생의 선후배였다.
먼저 이름을 날린 쪽은 최성원이었다. 부산 지역 고수로 명성을 떨쳤다. 고향 경남 양산을 평정했던 19살 김경률이 그런 최성원과 맞붙으러 부산으로 갔다가 호되게 당했다. 이후 김경률은 절치부심 큐대를 갈았고, 국내 최강은 물론 세계 무대에서도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2010년 터키 월드컵에서 한국인으로는 18년 만에 우승했다. 그러자 최성원도 화답했다. 2012년 역시 터키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뒤 지난해 한국인 첫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세계 랭킹 1위를 이룬 데 이어 지난 22일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쓸었다. 그러나 기뻐할 수 없었다. 최성원은 "경률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었다"면서 "정말 좋아했던 동생이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벨기에에서 상을 받은 뒤 경률이의 소식을 들었는데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면서 "이 상을 경률이에게 바친다"며 힘겹게 말을 마쳤다.
'그 미소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한국 당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김경률은 26일 강화도의 한 추모공원에 안치되면서 영면에 들어갔다. 경기에서 이기면 나오던 그의 사람좋은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한국 당구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척자 김경률. 35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 어머니의 아파트 20층에서 떨어져 숨진 김경률. 5일장을 치른 뒤 26일 발인을 마치고 화장을 통해 수습된 그의 유골은 강화도에 있는 한 추모공원에 안치됐다. 부인과 세 살 난 딸 등 유족과 당구 관계자 등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발인을 앞둔 2월 25일 저녁에는 장례식장에서 대한당구연맹 추도식이 열렸다. 그의 생전 라이벌이자 절친했던 동료 최성원(38)이 선수 대표로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동갑내기 강동궁과 '제 2의 김경률'로 불린 천재 김행직(23) 등 동료 선수들도 함께 했다.
장영철 연맹 회장은 "대한민국 당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김경률 선수의 부음에 전 세계 당구계가 큰 슬픔에 빠졌다"면서 "그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기리고 영면을 기원하고자 전 당구인들과 함께 애도할 것"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연맹은 3월을 '김경률 추모의 달'로 정해 페어플레이 캠페인과 추모 영상 제작 등으로 그를 기릴 예정이다. 한국 대표팀 멤버 허정한 조재호 조치연 김형곤(이상 한국랭킹 1~4위)은 장내에서 도열한 뒤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하고나서 경기 코트 안으로 입장했다. 친한 동료를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앞서 이들은 지난 22일 비보를 접하고 바로 김경률의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한 뒤 대회를 위해 출국했다.
2월 26일부터 독일에서 열린 세계캐롬당구연맹(UMB)도 세계 팀 3쿠션 대회에 애도 행사를 열기로 했다. 대회장에 참석한 듀퐁 세계캐롬당구연맹(UMB) 회장은 개회사 낭독과 함께 “김경률은 현재의 한국 당구 세대의 약진을 견인한 개척자였다”면서 “그의 장례식에 많은 이들이 조문했으며, 연맹과 세계 당구인들은 그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김경률을 뛰어난 스포츠 선수로서 우리의 마음 속에 기억할 것입니다.”(세계캐롬당구연맹 장 클로드 듀퐁 회장) 독일 비에르센에서 26일부터 열리고 있는 3쿠션 당구 국가팀대항 세계선수권대회( World Three-cushion Championship for National Teams) 대회장에 최근 별세한 고 김경률의 대형 초상화가 내걸렸다. 출전한 각국선수들도, 대회관계자도, 관람객도 묵념으로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타 종목 슈퍼 스타와는 달랐다.
김경률이 특별했던 것은 '보통 사람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통상 스포츠 스타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구름 위의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스포츠를 통해 자라온 데다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면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려 가까이 다가서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친해지고 마음을 열게 되면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은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김경률은 조금 달랐다. 당구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 친구', 아니면 보는 사람의 나이에 따라 '동네 형' '아는 동생'이 될 수 있는 푸근한 인상이었다. 탁월한 운동 신경이 없어도 손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당구라는 종목의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김경률은 생전 경기에서 이기면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터키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태극기를 꽂는 모습.(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대학 동기 중에 운동에는 젬병(?)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농구를 좋아해 결성한 동아리에도 동참했던 그 친구는 열정을 따르지 못하는 운동 신경에 늘 애를 먹었다. 야구, 축구, 탁구 등 다른 종목에서도 감각과 재치로 벌충하긴 했지만 조금 느리고 힘이 달리는 열세를 온전히 만회하지는 못했다.
그런 그 친구에게 동기들이 단연 엄지를 치켜세운 종목이 있었으니 바로 당구다. 순발력이 떨어져도 상대를 압도하는 우악스러운 힘이 없어도 그 친구는 다른 동기, 선후배들을 데리고 놀았다. 물론 짜장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박카스로 밤을 지새우며 당구장에서 살았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친구는 동기들 사이에서 당구만큼은 최고가 됐다.
김경률도 그런 선수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종목의 슈퍼 스타처럼 울퉁불퉁하게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가 아니라 배가 적당히 나온 후줄근한 몸매. 누구라도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던 일반인의 영웅이었던 거다. 당구로 또래 중 최고가 된 그 친구도 언젠가 김경률과 한판승부를 벌였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김경률은 일반인 고수들의 겁없는 도전도 사람좋게 받아들였던 그런 친구였다.
▲'적당한 허풍' 인간미 넘쳤던 영웅
김경률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8년. 당시 수원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열린 미디어 데이였습니다. 만약 우승을 한다면 한국 선수로는 16년 만의 일이라 미리 인터뷰를 하는 자리였다. 당시 국내 선수 중 세계 랭킹이 6위로 가장 높고 시드 배정까지 받은 데다 홈에서 열리는 대회라 시차도 없어 가능성이 꽤 높아보였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김경률은 당시까지의 삶을 풀어냈다. 16살에 큐대를 잡아 당구에 미쳐 살아낸 과정과 월드컵을 맞는 각오에 대해 "고향 경남 양산에는 적수가 없었다" "이번 대회 자신이 있다"는 등 적당한 허풍(?)과 과장, 특유의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구 깨나 친다는 동네 고수들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당시 김경률의 인터뷰 기사는 출고되지 못했다. 우승을 하면 작성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승까지는 올랐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꼭 딸게요' 지난 2010년전국체전당시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다짐하는 모습.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앞둔 전국체전에서는 후배 기자가 인터뷰 기사를 냈지만 역시 목표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이루지 못했다. 그해 당구 월드컵 2회 우승을 이룬 터라 기대감이 높았지만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동메달의 아쉬움을 씻지 못했다. 이후 김경률은 세계 무대에서 깜짝 놀랄 만한 낭보를 전해오지는 못했다. 최성원, 강동궁, 조재호 등 다른 선수들에 다소 밀리는 모양새였다. 꾸준히 성적을 내긴 했지만 이제 김경률도 지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故 이상천 회장의 뒤를 이렇게 잇다니…
그러더니 이렇게 경천동지할 소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김경률의 비보는 한국 당구계에 큰 아픔이자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세계 당구계를 주름잡았던 고(故) 이상천 전 연맹 회장 이후 또 한번 큰 별이 불의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199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당구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회 우승을 이루며 세계 랭킹 1위까지 올랐다. 그를 기리는 추모 대회인 '상 리 인터내셔널'이 지금도 열릴 정도로 세계 당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김경률이다. 지난 2010년 이 전 회장 이후 무려 18년 만에 한국인의 당구 월드컵 우승의 맥을 이었다. 다만 이 전 회장처럼 세계 1위는 아쉽게 이루지 못했고, 2위까지 올랐다.
'김경률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한국 당구는 김경률의 2010년 월드컵 2회 우승 이후 최성원, 조재호 등도 월드컵을 제패하는 등 신흥 강호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김행직(왼쪽부터 시계 방향)이 최연소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이루는 쾌거도 이뤘다.(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김경률의 우승은 한국 당구계에 대단히 큰 의미를 안겼다. 우리도 당시 세계 당구계의 대세이던 유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긴 것이다. 이 전 회장이 미국 시민권자로 어릴 때부터 세계 강호들과 겨뤄온 반면 김경률은 국내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토종 선수였다. 이런 김경률이 당시 세계 당구 '4대 천왕'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토브욤 브롬달(스웨덴). 프레데릭 쿠트롱(벨기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김경률에 자극을 받은 선수들이 이후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성원이 2012년, 조재호가 지난해 터키 월드컵에서 정상에 올랐고, 2013년에는 강동궁이 수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여세를 몰아 최성원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정상에 오르며 랭킹 1위까지 올랐다. 특히 최성원은 세계캐롬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까지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이 전 회장도 이루지 못한 최초의 영예다. 김경률의 자극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쾌거였다. 김경률은 생전 부산 당구 고수였던 최성원과 첫 대결에서 완패한 뒤 이를 막물었고 한국 당구 1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다른 선수들이 김경률을 따라잡겠다고 나섰고, 버금가는 위치에 선 것이다.
▲'자살? 실족사?' 김경률을 잃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의 사인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양경찰서는 당초 "타살 흔적이 없다"면서 "자살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최근 주춤했던 그의 성적과 사업 상황까지 맞물려 추측성 기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유족과 연맹은 자살이 아닌 단순 실족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이유가 도무지 없는 데다 고인의 명예가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살에 실과 바늘처럼 붙는 유서의 흔적도 없는 까닭이다. 연맹 관계자에 따르면 경찰은 유족의 완강한 주장에 당초 입장을 바꿔 원점에서 재수사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사인이 어떻든 간에 한국 당구계와 팬들, 더 나아가 한국 스포츠는 큰 인물을 잃었다. 끝내 이루지 못한 고인의 세계 랭킹 1위의 꿈을 아쉬워 하면서 이 기사를 '한국 당구 선구자' 김경률에게 바친다.
다음은 2월 24일 김경률의 추도식에서 최성원이 오열 속에 낭독한 조사(弔詞) 전문.
경률아! 개굴아! 이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구나... 지금 우리들 앞에 묵묵히 당구에 몰입했던 플레이만 남기고 간 너의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실력은 언제나 연습에서 나온다며 어딜 가든 당구 큐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세계 랭커 누구를 만나도 '금마 별 거 아니지' 하던 너의 든든한 모습은 내 마음 속에서도 커다란 힘이었다.
기억 나니? 우리 같이 세계 팀 3쿠션 나가서 그 유명한 브롬달 팀을 상대로 단 1점 못 쳐서 같이 울었던 기억을? 다신 그런 경기하지 말자며 이를 갈고 또 이를 갈고 했던 우리들의 화려한 기억을? 이제 너와 함께 이런 기억을 쌓지 못한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고 또 찢어지는구나.
언제나 선배들 앞에서 예의를 갖추고 후배들 앞에서도 낮은 자세로 당구를 대하던 너의 모습은 항상 존경의 대상이었다. 아직도 바로 옆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박수를 치는 너의 모습을 평생 잊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그런 너의 모습 이제 내가 받아서 조금이나마 네가 추구하고자 했던 당구의 모습을 완성시켜 나가볼테니 부디 하늘나라 편안한 곳에서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