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에게도 그렇고 가정이나 혹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내에서
누군가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입장이나 감정에 맞추어 이야기를 해야하니
그리 편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라 여겨집니다.
자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태도를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일은
누구에게도 썩 유쾌한 일이 못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하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를 겨냥하여 베드로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선생은 성전세를 바치느냐”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바친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참으로 무겁고 답답했을 겁니다.
그 당시 성전세는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 되면서 로마의 건국신화 속에 나오는
카피톨 신전에 바치는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로마는 이를 의도적으로 과거 유대인들이 성전에 연례적으로 바치던 액수와
동일한 액수로 부과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습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비위에 맞춘 말을 하고나서
답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현재 왜곡된 성전세를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
실제 성전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전세를 물지 않아도 되는 의미를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비위를 건드릴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보통 우리들 같으면 한 공동체 내에서
그 공동체에 반하는 사람에게 비위나 맞추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거나,
혹 비겁하거나 심지가 곧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하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그 공동체내에서 소외감을 가지게 되고
이내 공동체로부터 이탈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위를 맞추는 발언에 회의하고 답답해했던 베드로의 마음을
너그러이 풀어 주시면서도 그 본질적 의미를 비유를 통해 쉽게 이해시켜 주시고
나아가 해결의 방책까지 확실히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비위를 맞추는 것조차 지혜롭게 헤아리시며
한없는 사랑과 세심한 관심과 돌보심으로 당신의 공동체를 지켜나가셨습니다.
우리들이 속해있는 공동체가
배려와 보살핌이 우선하는 사랑의 공동체인지 묵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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