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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1~313)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311>인민공사 예고편, 청년 마오쩌둥의 ‘신촌’ 실험 |제312호| 2013년 3월 3일
▲1954년 9월, 국방위원회 1차 회의를 마친 마오쩌둥(앞줄 왼쪽 여덟째)과 펑더화이(앞줄 왼쪽 아홉째). 이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진 김명호]
1535년 7월 초, 런던탑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전 대법관 토머스 모어가 단두대 앞에 섰다. 두 눈이 가려지는 순간 초승달 모양의 섬나라, 유토피아가 눈앞에 출현했다. 청년시절, 이 냉철한 몽상가는 사유재산이 없고 섬 전체가 행복하고 유쾌한 생활을 영위하는 허무의 고향, 유토피아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인류가 수천 년간 꾸어온 꿈이다 보니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1824년, 맨체스터의 부유한 공장주 로버트 오웬이 미국 인디애나주의 이민구 한 곳을 15만 달러에 사들였다. 사람의 힘에 의존해 곡식을 경작하는 농업공동체, 뉴하모니타운을 건설했다. 오웬이 만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실험장은 5년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한 독일계 유대인이 대영박물관을 노크했다. 도서실에 틀어박힌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시체 표본 취급했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해부해 보니 토머스 모어의 이상과 인류의 꿈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자칫하면 곡해할 소지가 많았지만, 몽상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과학적으로 천명(闡明)했다. 한동안 잠복해 있던 유토피아의 유령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국도 공구(孔丘)와 묵적(墨翟)을 시발로 진시황에게 최초의 도전장을 던진 진승(陳勝), 오두미도(五斗米道)의 3대 교주 장노(張魯),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 시인으로 더 알려진 당(唐)대 최고의 검객 이백(李白), 청(淸)제국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지도자 홍수전(洪秀全) 등 면면히 내려오는 이상사회의 계보가 있었다.
20세기 초, 후난(湖南)성의 키 크고 삐쩍 마른 농민의 아들, 마오쩌둥이 창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 인근을 답사했다. 목적은 단 하나, 중국형 신촌(新村) 부지의 물색이었다.
청년 마오쩌둥이 구상한 신촌은 유아원과 양로원, 상점, 학교, 농장 등이 공동으로 운영되는 표준형 유토피아였다. 실현만 된다면 400년 전 런던 브리지에 효수된 토머스 모어의 영혼을 위로하고도 남았다.
후난은 중국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수많은 영웅과 강도들의 고향다웠다. 골목마다 크고 작은 도둑투성이였다. 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너나 할 것 없이 혁명을 노래하던 시대였다. 마오쩌둥도 혁명에 몸을 던졌다. 마르크스의 이론과 중국의 현실을 결합시킨 지 40년 만에 정권 탈취에 성공했다. 960만㎢의 대지 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상사회 건설의 꿈이 되살아났다. 권위와 기백과 열정으로 6억5000만 명을 몰아붙였다.
철강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작은 용광로가 마을마다 들어섰다. 한군데 모여 공짜 밥을 먹다 보니 솥, 수저, 냄비 등은 쓸모가 없었다. 눈만 뜨면 일터로 향하고,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앞치마를 둘러야 했던 남자들은 환호했다. 굴러다니는 쇠붙이를 몽땅 들고 용광로로 향했다. 용광로 땔감으로 쓰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도 모조리 베어냈다. 철 생산량이 유토피아의 발원지 영국을 추월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인민공사처럼 희한한 곳도 없었다. 일을 열심히 한 사람과 빈둥거리며 눈치만 보던 사람의 배당량이 똑같았다.
이성적인 미몽(美夢)이 하루아침에 비이성적인 악몽으로 둔갑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상하이의 경우 연료가 일주일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방 간부들은 과장된 보고서 작성에 머리를 싸맸다.
20세기 중엽에 시작된 거대한 드라마는 1987년 10월, 중공 13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론이 채택되면서 막을 내렸다. 1959년 7월 23일 오전, 여산회의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던 펑더화이의 주장이 마오쩌둥의 한마디에 휴지조각으로 변한 지 28년 만이었다.
펑더화이와 함께 쫓겨났던 전 중공 선전부 부부장 리루이(李銳)는 ‘여산회의 실록’에서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간부들의 성향을 “관료주의에 빠져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헛소리만 해대는 간부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며 거짓 보고만 일삼는 뺀질뺀질한 간부들. 허위인 줄 뻔히 알면서 진실인 것처럼 늘어놓는 고급 간부들”로 분류하며 “마지막 유형이 가장 나쁜 놈들이었다”고 단정했다. (계속) <311>마오, 장·펑 싸잡아 비난 … “文武 연합 군사구락부 조직” |제313호| 2013년 3월 10일
▲1953년 7월 28일 오전 9시, 한국전쟁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펑더화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의 지지를 받는 경우가 있다. 1959년 8월, 여산회의가 끝날 무렵 외교부 부부장 장원텐(張聞天),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 후난(湖南)성 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 등이 펑더화이(彭德懷)와 함께 몰락했다. 황커청은 펑더화이의 오랜 측근이었고, 저우샤오저우는 마오쩌둥의 비서 시절부터 펑더화이를 잘 따랐다. 동향이기도 했다.
장원텐은 경우가 달랐다. 학자와 문인들을 줄줄이 배출한 장쑤(江蘇)성 우시(無錫) 출신으로 학생 시절엔 창작과 외국문학에 심취한 문학청년이었다. 일본과 미국·소련 유학을 거친 후 혁명의 한복판에 뛰어들었지만 총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펑더화이와는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단둘이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성격도 판이했다. 펑더화이는 급하고 표현도 거칠었다.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하급 부하와 애들에게만 인자했다.
장원텐은 사람 됨됨이가 겸손했다. 1935년 1월부터 3년간 중공의 최고지도자였지만 무슨 일이건 멋대로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한 사람이 돌출행동을 하는 조직은 활력이 없다”며 집단지도체제를 견지했다.
◀1976년 봄, 고향 우시에서 부인과 함께 꽃구경 나온 장원텐.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 북부 준이(遵義)에서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당권과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돼버렸지만, 전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마오쩌둥은 장원텐을 정점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의 한 사람이었다. “총서기가 공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여기는 당원들이 많다. 원인은 단 하나, 장원텐 동지의 겸손 때문이다. 1935년 1월, 준이에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사상이나 이론 면에서 당의 책임자로 장원텐 동지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총서기에 선출됐지만 재삼 사양했다. 마오쩌둥 동지가 정 그렇다면 군대는 내가 맡겠다고 스스로 나서자 수락했다. 마오쩌둥 동지가 군사문제를 전담할 3인 소조를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장원텐은 마오쩌둥을 신뢰했다. 훗날 본인은 부인했지만, 마오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그간 우리 당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느라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가 있어야 장정을 승리로 이끌고,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런 장원텐을 마오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뭐든지 첫째, 둘째, 셋째 하며 조목조목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들을 때는 그럴듯하지만, 남는 게 하나도 없다. 시골 중학교 선생이나 하면 알맞을 사람이 혁명에 뛰어든 것이 대견하다. 미국 경험도 있고 하니 훗날 국제무대에 나가면 합리적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을 사람이다”
마오쩌둥의 말대로 장원텐은 지식을 중요시하고 인재를 존중했다. 부패한 사람을 보면 부모 죽인 원수처럼 대했다고 한다. 단, 아무리 태평성세라도 중국에 적합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전쟁시대였다.
신중국 수립 후 장원텐은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소련 주재 대사와 제네바회담 대표를 거치며 국제무대를 누볐다. 1959년 7월, 여산회의 무렵에는 외교부 상무부부장으로 중국 외교를 전담하고 있었다.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의견서를 놓고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됐다. 펑더화이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거의가 동조하는 눈치였다. 7월 21일 장원텐의 발언이 시작되자 다들 숨을 죽였다.
장원텐은 자타가 인정하는 이론가다웠다. 발언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회의 개막 20일 만에 가장 엄숙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산 위에서 오랫동안 회의를 연 적은 유사 이래 없었다”고 입을 뗀 후 무려 3시간 동안 대약진 운동의 성과와 결점을 체계적으로 나열했다. 펑더화이의 의견과 거의 일치했다. 발언 내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그놈에 첫째, 둘째, 셋째 또 시작했다”며 “흥” 하고 코를 확 풀어버렸다.
그날 밤, 바람 쐬러 나온 장원텐은 산책 중인 펑더화이를 발견하자 먼저 다가갔다. “네 주장이 맞다. 오늘 너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펑더화이는 “지원 같은 건 필요 없다”며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그래도 궁금했던지 헤어질 무렵 발언 내용을 물었다.
펑더화이는 자신의 주장이 장원텐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았다. 마오로부터 문무(文武)가 연합해 “군사구락부”를 조직했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313>마오, 펑더화이 제거 작심하고 3시간 자아비판 |314호 | 2013년 3월 17일
▲1951년 겨울, 한국전쟁 참전군 사령관 시절 전선을 시찰하는 펑더화이. 장소 미상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 도중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편지는 별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펑더화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정권을 탈취한 혁명가였다. 권력기반이 군대이다 보니 군을 가장 중요시했다. 인민은 다음이었다.
펑더화이는 중공 정권의 창출에 공이 큰 개국원수였다. 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펑더화이가 산으로 들어갈 결심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 올라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고 “노동자가 아니라면 농민이라도 좋다. 홍군 복장을 입힐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말도 평소 자주 했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가 열렸던 여산인민극장. [사진 김명호]
이럴 때일수록 윗사람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 “펑더화이 편지는 단순한 건의가 아니다. 목적이 있다”며 마오쩌둥을 불편하게 했다.
펑더화이가 보낸 편지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한 마오쩌둥은 3일간 침묵했다. 펑더화이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안후이(安徽)성 서기 쩡시성(曾希聖)을 펑더화이에게 파견했다. 장정 시절, 중공의 비밀문건과 정보를 담당한 적이 있는, 마오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였다.
펑더화이를 찾아간 쩡시성은 “차 한잔 마시러 왔다”며 3가지를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남아있다. “주석에게 편지를 보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펑더화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목적은 무슨 놈의 목적,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럴 때 편지를 이용하는 게 우리의 오랜 습관 아니냐.” “소련 방문 기간 중 흐루쇼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나.” “흐루쇼프와는 대약진운동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린뱌오가 부주석이 된 것에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
쩡시성의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단독행동이라고 확신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펑더화이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7월 23일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단상에 오른 마오쩌둥은 “그간 참석자들은 많은 발언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차례”라며 좌중을 한 차례 둘러봤다. “그간 착오를 저지른 동지들이 많았다.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우파가 아니다. 배운 게 많다.”
마오쩌둥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자아비판을 시작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지난 2년간 뭐든지 빨리 이루기 위해 큰소리만 쳤다. 모든 잘못의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공자가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후손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멸종했다. 아들 한 놈은 전쟁터에서 죽고, 한 녀석은 미치광이가 됐다. 동생들도 모두 맞아 죽었다. 마르크스도 적지 않은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혁명의 그날이 올 거라고 했지만 서구에 혁명다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심상치 않을 징조였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그칠 줄을 몰랐다. “모든 신문이 우리의 잘못을 열거하느라 정신이 없다. 전국에 70만 개의 생산대가 있다. 모든 생산대가 한 건만 잘못하면 잘못한 건수가 70만 건이 된다. 일 년 내내 보도해도 불가능할 정도다. 앞으론 내 이름을 직접 거론해라. 꼭 망해야 한다면, 나는 떠나겠다.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뒤집어엎어 버리겠다. 해방군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해방군을 만들겠다.” 이날 마오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발언을 3시간 동안 했다. 펑더화이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발언이 끝나자 산회했다. 펑더화이는 맨 뒷줄에 있었다. 마오가 부르자 못 들었는지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마오가 달려갔지만 떠난 후였다. 회의장은 언덕 위에 있었다. 마오가 내려가자 공안부장 뤄루이칭(羅瑞卿)과 상하이 서기 커칭스(柯慶施) 등이 수행했다. 저만치 앞서가던 펑더화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회의장 쪽으로 올라왔다. 물건을 놓고 온 사람 같았다. 마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마오가 펑더화이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시뻘게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펑더화이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몸을 돌려 펑더화이를 다시 잡았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얘기 좀 하자.” 펑더화이는 막무가내였다. 할 말이 없다며 마오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다. 수행원들 앞에서 마오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봐서는 안 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뤄루이칭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커칭스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다. 저우언라이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숙소로 불렀다. 8월 2일부터 2주간 여산에서 중공 중앙 전체회의를 열라고 지시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