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26권, 26년(1889 기축 / 청 광서(光緖) 15년) 11월 27일(기사)
봉조하 김상현이 묘호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종묘(宗廟)의 예에 공이 있는 임금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임금을 ‘종(宗)’이라 한 것은 칭호를 매우 중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임금들이 전해 온 큰 전례(典禮)이며 또한 만대에 변치 않을 큰 의리이고 공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전례를 중시하는데,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 세조(世祖), 선조(宣祖), 인조(仁祖), 순조(純祖)의 다섯 성조(聖祖)의 묘호(廟號)의 높음이 그 사이에 가장 성대합니다. ‘조’라 하건 ‘종’이라 하건 높이 받드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공이 있으면 반드시 ‘조’라고 칭하는 것은 보통과 다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은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하여 여러 흉악한 자들을 소탕하고 종묘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안정시켰습니다. 임금 자리에 52년간 있었는데,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순전히 바른 데서 나와 삼황 오제(三皇五帝)처럼 대단히 큰 공을 이루었으므로 승하하신 지 이미 수백 년이나 되었지만,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즐거움과 이익을 누리며 잊지 못하고 있으니, 아! 성대합니다. 어려서는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섬길 때는 바로 5살이었는데 여러 가지 꽃을 따서 술을 만들어 바쳤습니다. 왕후가 돌아가시니 그 잠저(潛邸)의 별사(別舍)를 ‘감고당(感古堂)’이라는 현판을 써붙여 추모하는 정성을 표시했습니다. 숙묘(肅廟)께서 편치 않으시자 좌우에서 몸소 부축하셨는데 7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세자로 있으면서 여러 번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법도 있게 응대함으로써 마침내 대궐 안에 화목한 기운이 돌게 하였습니다. 경묘(景廟)께서 병세가 위중해지니 관대(冠帶)를 풀지 않고 구완하면서 왕이 한 숟갈 뜨면 역시 한 숟갈 뜨고 두 숟갈 뜨면 역시 두 숟갈 떴습니다. 이때에 역적 이광좌(李光佐)가 상약(嘗藥)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고 패악한 의원 이공윤(李公胤)을 믿고서 연달아 독한 약제를 시험하자 왕이 울면서 이공윤에게 이르기를 빨리 온제(溫劑)를 써서 양기를 되살리라고 하였으나, 이광좌가 자기 의견을 더욱 굳게 고집하여 마침내 승하하게 되었는데, 왕이 슬퍼하여 몸이 여윈 것이 정도를 넘었습니다.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섬길 때에는 비록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나 매번 손을 모으고 달려가서 물건을 갖추어 봉양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선의 왕후(宣懿王后)를 모후(母后)처럼 섬겨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장릉(長陵)에 옮겨 모시고 나서 옛 능의 소나무과 잣나무들이 다 효묘(孝廟)가 손수 심은 것이라고 하여 그 씨를 가져다 손수 새로 파종하였습니다. 사당의 제향은 반드시 친히 거행하였고 능(陵)과 원(園)은 거의 모두 전알(展謁)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성덕(聖德)이 효도에 기본을 둔 것이니, 아! 성대합니다.
역사상의 무함을 변론하여 두 성왕의 억울함을 씻어냈고 세실(世室)을 정하여 현종(顯宗)을 높였으며,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고 단경왕후(端敬王后)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선조를 추모하는 중대한 일이니, 아! 성대합니다.
만동묘(萬東廟)가 설치되자 손수 편액을 써서 걸고 황단(皇壇)을 증축하여 태조 황제(太祖皇帝)와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함께 제사 지내고 기신(忌辰)마다 망배례(望拜禮)를 올리는 것을 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존주(尊周)의 의리이니, 천하 만세에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 성대합니다.
백성을 사랑한 데 대하여 말한다면, 풍년을 빌거나 비를 비는 것과 같은 일을 반드시 직접 수고로움을 행하였고, 요역을 덜어주고 조세를 감해 주는 혜택을 베풀어 여러 번 윤음을 내렸습니다. 차라리 창고에 보관해 둔 곡식을 미리 풀지언정 돈을 주조하는 것을 통렬히 배척하였고 나라의 재용에 많은 보충이 되더라도 광산을 채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수령(守令)이 하직 인사를 할 때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경계하여 타이르고 압슬(壓膝)의 형을 없애고 자비(刺臂)의 법을 금지했으며, 병조에 영장(營將)을 자세히 살펴 택하도록 명하였으니, 신중히 처리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덕이 백성들의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아! 성대합니다.
절약하고 검소한 데 대하여 말한다면, 즉위한 초기부터 대포(大布)와 대백(大帛)으로 지은 옷을 입도록 권장하여 풍속을 고쳤으며, 벽에 바른 칠이 벗어지거나 창문과 기둥이 떨어지거나 벗겨진 것이나 보연(黼筵)과 포석(鋪席)이 변하여 떨어진 것을 여러 해가 지나도 고치지 않았고, 묵은 곡식이 창고에 차고 넘쳤습니다. 삼남 지방의 대동미(大同米)의 절반을 고을에 남겨두니 집마다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워졌으며 관리들은 자중(自重)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효성과 우애가 위에서 흥기하고 풍류가 아래에서 돈독해져 찬란히 서경(西京)의 융성하던 때와 같았으니 아! 성대합니다.
신축년(1721)에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는데, 불령(不逞)한 무리가 속으로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유봉휘(柳鳳輝)가 앞서 상소를 올려 ‘숙묘(肅廟)의 유언을 받들고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수찰(手札)을 받든다.’는 것을 지적하여 ‘우롱하고 협박한다.’ 하고, 또 ‘인심이 의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묘(景廟)가 병환이 있어 후사가 없음을 알면서도 ‘자손이 많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것에서 병을 숨기는 의논이 처음 생겨났고 조태구(趙泰耉)는 충신이라고 칭찬하였으니, 그가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 무리가 한 번 변하여 목호룡(睦虎龍)이 변란을 고발하는 일이 생기게 되어 무옥(誣獄)이 크게 일어나서 왕세제를 책봉하도록 한 대신인 충헌공(忠獻公) 신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신 이이명(李頣命), 충익공(忠翼公) 신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愍公) 신 이건명(李健命) 이하가 모두 참혹한 화를 당했습니다. 두 번 변하여 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역적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고 세 번 변하여 윤지(尹志)와 이하징(李夏徵)이 흉악한 모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은 을사년(1725)에 죽고, 조태구와 유봉휘 등 여러 역적들은 윤지, 이하징과 함께 을해년(1755)에 역적을 처벌하는 형률을 시행했으며 정희량(鄭希亮) 등은 무신년(1728)에 처단되었는데, 이것은 무력으로 소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사성(李思晟)은 서쪽에서 앞장서서 부르고 김중기(金重器)는 안에서 호응하였으니 명성과 위세가 서로 이어져 조정과 민간이 벌벌 떨며 놀랐습니다. 왕께서 신기한 방책을 빈틈없이 운용하여 기회를 타서 승리함으로써 싸움을 차례로 끝내고 다 평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만 보게 되었으니, 아! 성대합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이니, 반드시 큰 역량과 큰 훈로가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주역(周易)》에, ‘총명하고 지혜롭고 용감하면서 죽이지 않는 자일 것이다.’ 했고, 《서경(書經)》에, ‘큰 괴수를 죽이고 협박을 받아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않는다.’ 했으며, 《시경(詩經)》에, ‘상토(相土)가 열열하시니 해외가 절연히 평정되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란을 평정하고 의리를 천명한 실제 업적이니, 자연히 번성하던 삼대(三代)에 부합합니다. 그런데 대성인의 덕행과 공로에 대하여 아직 ‘조’라고 부르는 예가 빠졌으니, 어찌 사람들의 마음에 유감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어찌 성상의 효성에 만족스럽지 않음이 없겠습니까? 신의 나이가 어느덧 80세가 되어 노쇠하고 병든 데다가 눈이 침침하니, 어떻게 감히 국가의 대전(大典)을 망녕되이 의논하겠습니까마는, 구구한 어리석은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감히 진정을 피력하여 우러러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소장을 내려보내 조정의 신하들에게 널리 하문하고서 결단하여 행한다면 대례(大禮)가 바르게 되고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 태평한 세상이 영원히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신은 다행스럽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우리 영묘(英廟)는 지극한 어짊과 큰 덕과 크고 성대한 공적이 있어서 아! 잊지 못하는 생각이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다. 이번에 경의 상소를 보니, 실로 온 나라의 다 같은 바람에서 나온 것이지만, 전례가 막중하니 수의(收議)하게 하라.”
하였다.
【원본】 30책 26권 40장 B면
【영인본】 2책 332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재정-재정일반(財政一般)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