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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주일설교 몸된 교회를 세우라(에베소서 4:1-16)
본문: 에베소서 4:1-16
제목: 몸 된 교회를 세우라
오늘은 에베소서4:1-16의 말씀을 가지고
“몸 된 교회를 세우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무엇입니까?
“몸 된 교회를 세우라”
오늘은 우리 율리교회 창립 112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합방된 112년 전 1910년도에
이 땅에 교회가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역사적 자료가 다 있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8.15해방 전 몇 년과 6.25때 몇 년을 제외하고는
예배가 계속 드려졌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로
예배당에서 예배를 못 드린 몇 주간도 있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을 살고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저도 1992년도부터 30년 이상을
함께 율리교회를 통해서 신앙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교회하면 일주일에 한번 세상 죄를 씻고
무겁고 피로했던 세상살이에서 오는 짐을
던져 버리는 곳으로 여기거나 우리 식으로 하면
컬컬한 마음을 해소하는 장소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평안을 얻고 축복을 받고,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장소를 생각합니다.
마치 고속도로를 통해 여행을 하다가 피곤할 때 들려
쉬고, 음식을 먹는 휴게소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신자는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까?
불렀으면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까?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을 왜 불렀습니까?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율법과 규례를 지키게 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부른 것은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무슨 복을 주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복입니다.
세상의 존재가 아닌 사탄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구체적인 장소를 만들어 놓고 부르셨습니다.
그 장소가 어디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어디로 부르셨을까요?
그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가장 바르게 정의한 말씀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의 개념을 단순히 교회라고 한다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풀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됩니다.
그 고백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왕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에게 교회라는 이름이 붙어집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 묶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말할 때 지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주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내가 주안에 산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 곧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리스도인인 나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지체의 관계로 몸의 일부분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지 않는
지체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즉 머리와 몸이 나누여져 있다든지
서로 연결을 이루고 있지 않는 분열 구조로 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위치에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로 부름 받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8:5-9에 이런 말씀에 보면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십니다.
이것을 ‘영적인 연합’이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의 말씀으로 표현하면 비로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속에는
예수님께서 사시고 또한 성령님께서 함께 하는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개념이 뜻하고 있는 본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자녀라든가,
하나님의 백성으로만 부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써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연합의 관계,
한 몸으로써 지체된 관계성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면 이러한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져야 함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서 교회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성전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이 바로 보이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라고 칭송을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인
성전이 세워져야 하고 성령님이 내주하는
성전이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세워지지 않는다면 건축물로서
성전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머리되신 예수님의 그 지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답이 본문 3절에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무엇을 지키는 것입니까?
하나 되는 것입니다.
몸이 서로 하나 되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몸의 역할을 말해 주는 것으로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몸의 통일성입니다.
교회는 내가 선택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분열을 시키고 몸을 나누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된 우리는 사랑스런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으로서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서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지체의 다양성입니다.
몸으로서 교회는 한 가지 악기로 하는 독주회가 아니라
여러 악기가 동원된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휘자만 있을 수 없습니다.
현악기도 금관악기도 목관악기도 타악기도
다 있어야 합니다.
그 어느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현악기가 드러날 수 있고 어떤 때는 목관악기가 드러날 수 있고 어떤 때는 타악기가 드러날 수 있으며
그래야 연주가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두가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여 몸이 건강함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 사도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목사가 된다면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겠습니까?
모든 성도가 설교를 하고 있다면 교회가 온전하겠습니까?
발, 손, 귀, 눈, 입, 허리 무엇이든
몸에서 귀중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모두가 필요하고 모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신 은사를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기질을 버려야 합니다.
다양한 교회가 주님의 교회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보면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
트라이 앵글을 연주하거나 케스트네츠의 연주입니다.
보통 어린일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의 연주 때 보면 단순한 그 소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아주 멋있게 들립니다.
그 한번을 위해 그 주자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그때 한번 소리를 냅니다.
연주는 단순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연주는 완성이 되지 않습니다.
셋째 몸은 상호의존성입니다.
교회는 개인주의를 반대하는 곳입니다.
고린도전서 12:24-27을 보시겠습니다.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리라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리라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인간의 몸은 다른 기능의 도움에 의해서
서로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합니다.
눈이 몸에서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다른 지체가 도와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눈에 영향소가 들어가지 않으면 눈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하면 눈이 잘 안보이게 됩니다.
몸에서 눈을 받쳐 주어야 눈이 눈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너는 내게 소용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필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도가 몸으로서 온전한 기능을 하려면
다른 기능들의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도움에 의해서 세워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한사람의 잘못은 모든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런 한 사람이 잘되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나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실패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판단하고, 내가 화를 내고,
내가 가볍게 행동을 하고. 내가 바르지 못하면
교회전체에 큰 피해를 입히고 고통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상호도움의 몸을 회복해야 합니다.
서로 서로 도와주는 것이
몸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넷째, 몸의 성숙성입니다.
바울은 몸에 대해 가르치면서
몸은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몸을 세우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합니까?
13절, 15절, 16절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온전한 사람’ ‘장성한 분량’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 몸을 자라게 하며’ 모두가 성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완전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최상적인 목표는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12절의 말씀인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말은
“성도를 준비시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몸의 조화를 위하여
서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몸이 자라야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만일 손 만 자라고 있다든지,
발만 자라고 있다면 잘못된 변형의 몸이 됩니다.
모두가 골고루 자라야 몸이 보기도 좋고
기능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신자와 신자의 관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성도는
몸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신자는 몸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신자와 신자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바로 오늘의 주제가 이 문제이기에
좀 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지체관계’라고 합니다.
교회로써 부름 받은 신자들이 온전한 교회,
바른 교회를 세우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지체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룬 지체끼리, 즉 믿음의 권속끼리
화목하고 힘을 모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신앙고백을 갖고 있는
성도들끼리 어떻게 마음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각자의 일을 하되 협력하여야 하며
그것을 통해 영광스런 주의 사역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지체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느냐에 따라서 조직으로 나타난 교회도
건강한 교회인지 허약한 교회인지를 평가받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좋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저것 잘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나 척척 해결사 노릇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지체로서의 신앙생활을 잘 해내느냐,
얼마나 지체들을 위해 희생하느냐, 얼마나 지체들을
세워주기 위해서 노력하느냐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인상적인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을 실족케 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로서의
부름 받음은 실패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교회라는 문제를 상기시키면서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단어가 무엇이냐면
겸손, 온유, 인내, 용납, 사랑입니다.
본문 12, 13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기”위해서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자가 많아야
좋은 교회입니다.
혹 넘어진 성도는 없는가?
혹 쓰러진 성도는 없는가?
혹 실망을 당한 성도는 없는가하며
눈에 불을 키고 찾아다니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하고 온전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안에서 서로 지체된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가 지체됨을 지켜 교회가 든든하게 서가듯
우리도 지체됨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율리교회 성도로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령의 전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몸이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주장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깨어서 예배를 바르게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다른 성도들을 돌보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명령을 온 세상에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일이 없이 성전이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세울 때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받게 되고
우리가 보이는 성전도 세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힘써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