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미켈란젤리는 1920년 이탈리아 브레스치아에서 태어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그의 부모는 모두 피아니스트였고 3세 부터 그는 바이올린을 배운다.
그러나 그는 곧 바로 피아노로 바꾸어 피아노만을 집중해 지도를 받는다.
10세때 벌써 밀라노 콘설바토리에 입학한 그는 1933년까지 Giovanni Anfossi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일찌감치 음악수업을 마친 그는 6년간 의학공부을 한다.
18세인 1938년 벨기에 브루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 7등을 하고, (이때 우승은
에밀 길레스가 차지한다.) 이듬해인 1939년 쥬네브 콩쿨에서 그는 우승을 한다.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알프레드 콜또는 새로운 리스트가 나타났다라는 평을 한다.
1943년 2월 앙세르메와 베를린 필 연주로 슈만 피아노 콘첼토를 협연한다.
종전후 1946년 런던에 데뷔를 하고 1948년 뉴욕데뷔를 해 크리틱커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는 1950년대 건강이상으로 연주여행을 못하게 되자 1964년
그의 고향 브레스치아에서 국제 피아니스트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5년간 책임자로 일한다.
그때 그의 제자로 말타 아르게리히, 마우리치오 폴리니,이반 모라벡 등이 있다.
Martha Argerich Maurizio Pollini Ivan Moravec
그의 음악세계는 우선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완벽한 기교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많은 레파투어를 하지 않고 베토벤,브라함스,슈만, 드뷔시, 라벨 등의 몇 안되는
작곡자의 곡만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클래식 연주가들은 거의가 완벽주의자 들이다.
이는 장시간의 연주, 수많은 곡들을 한치에 실수도 없이 청중들에게 전달 하기위해
생긴 그들의 프로적 생활 특징이다. 특히 그는 완벽을 누구보다도 중요시 여겨 많은 기행적
일들을 벌인다. 자신의 피아노로만 연주회를 고집해 긴 연주여행이라도 전문조율사를
대동하고 꼭 자신의 스타인웨이를 실고 다니고, 악기의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을 느끼면
가차없이 정해져있던 연주회까지 취소를 하고,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거나 청중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주회 도중 무대에서 뛰쳐나가는 기행들을 벌인다.
연주회 당일에는 하루 종일 연주회장에서 피아노 소리와 조율상태를 체크하고,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되, 연주회를 두시간이나 지연 시킨적도 있고 파리에서는 손이 시럽다면서
홀의 난방상태를 트집잡아 연주를 거부하기도 했고 청중의 기침소리때문 앙콜을 중단하고
나가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절대 용납될수 없는 기행적 행동들을 한 그가 음악인이나 애호가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지 하나 그의 음악에 크기였다. 그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누구보다 중시
여겼고 그들의 노력만큼이나 보호받고 존중 되야하는 이유들을 몸소 그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연주인들이 연주회를 하기위해서 얼마나 힘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하나를
청중들에게 각인 시켜줌으로써 그의 기행적 행동이 연주인들과 청중들을 더욱 인간적으로
묶어주는 효과도 생겨난다. "그의 음악은 절대 가식이나 과장이 없다."
순수함과 더불어 그가 만들어 내는 피아노의 소리는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피아노 톤은 피아노의 그것이 아니라 바이올린과 오르간의 콤비네이션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음색을 설정한다는 말에 일치하는 느낌을 가진 독창적이다.
그가 어떤 음악인보다도 음악에 있어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점은 그가 보는 세상의
넓이와 깊이가 달랐다는 점일것이다. 그는 10세때 이미 밀라노 콘설바토리를 들어가
3년만인 13살에 나이로 졸업하고 바로 의학공부를 6년동안이나 한다. 20세 초반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공군에 입대해 전투기조종사가 된다. 전후 피아노에만 전념한 그는
바로 세계적이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얻지만 30세 후반에 건강에 이상으로 장거리 연주회를
못하면서 음악의 우물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카 레이서로 다른 세계를 맛보기도 한다.
비록 작은 대회였지만 카 레이서로 우승도 한 그를 보면 그가 어떠한 일을 하던지 최선을
다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다른 피아니스트의 음악을 듣지 않는다. 내 스스로 공부하며, 피아노라는 악기가
타악기적인 면이 있어 썩 좋아하지 않아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공부하기도 했다.
나는 내 방식만의 피아노 연주와 소리를 연구했고 내 피아노음의 색채는 내가 추구하는
바이올린과 오르간의 결합된 조화라고 생각을 하고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독창적인 사고방식과 세계를 보는 그의 시야가 다른 어떤 음악인들보다 넓어
그의 음악세계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듯하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답게 요리를
무척 즐겨 만들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르게리히나 폴리니는 피아노를 가르쳐 준 것이
하나도 없고 스파게티 국수 삶는 법, 산책 잘하는 법, 좋은 책 찾아 독서하는 법 등만을
그의 아카데미시절 배웠다고 한다. 생활과 음악 그리고 자기가 맡은 일에대한 완벽추구
이러한 그의 일생이 어마어마한 사건이랄수 있는 많은 기행적 일들을 잠재우고 그를
추모하며 아직도 많은 음악인이나 애호인들이 참 음악인으로 기리는 점 일것이다.
ps. -필자는 음악가가 큰 그림을 그리려면 음악이라는 틀의 우물에서 자주 빠져나와
다른 세계를 경험하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클래식 연주가들 중 솔리스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거의 독방에 감옥생활과 같다.
식사하고 휴식하고 그외에는 연습의 연속이다. 우리들이 익히 아는 지휘자 정명훈의 일상을
들여다 보자.우선 올 12월 그의 대략적으로 본 스케쥴이다. 4일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을 해
5일 아침 저녁에 있을 빈 오퍼 라 트라비아타 리허설을 단 한번하고 저녁에 공연을 한다.
8일 같은 프로그램으로 연주를 한 그는 그다음날 비행기에 몸을 실고 서울로 와 오자마자 12일
서울 시향과의 공연 리허설을 하고 12일 연주 후 다시 빈으로 와 16일 라 트라비아타를 다시 한번
공연 한 후 20일 있을 리골레토 시즌 첫 공연을 위한 연습과 또 23일 같은 곡을 연주하고 다음 날
비행기로 서울로 와 26-27일 공연을 하고 바로 빈으로 다시와서 30일 리골레토를 공연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살인적인 일정이다. 그것도 놀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의 경우
적게는 2시간에서 3-4시간 장시간을 서서 지휘를 해야한다.
우리는 우리들이 아끼는 세계적 보물인 연주자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그들이 모든 인생을 쏟으면서 몰두하고 헌신하여 만들어준 음악들을 즐겁게 느끼고 우리의 삶에
큰 위로와 행복을 얻는다면 더 더욱....... " 예술인들은 자존심을 먹고산다. "
작금의 시향 사태를 보면서 그들이 우리 참 예술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마친다.
Discografia parziale